법륜스님/즉문즉설(2023)

법륜스님의 희망세상만들기_ 공동체성이 필요할까요?

Buddhastudy 2023. 5. 30. 19:35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고

서로에게 도움 주는 것을 안다면

많은 사람이 행복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님은 공동체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질문이라고 할 게 없는 거 같은데요.

자기의 소감이나 자기의 견해를 밝힌 거 아니겠나 싶어서

저도 뭐, 지금 발표하신 내용에 대해서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

 

아니 몰라서 묻는 거예요?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내 입을 빌려서 하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자기 얘기, 공동체성을 살리고,

서로 연관되어 있으니까 서로를 알고 이렇게 했으면 세상이 행복할 텐데

이기주의로 접근하니까 세상이 시끄럽지 않으냐,

이런 거를 요약해서 자기가 말했거든요.

 

이미 자기가 다 말해놓고 나보고 뭘 얘기하라는 거예요?

ㅎㅎ

정말 자기가 궁금해서 그래요?

자기 하고 싶은 얘기를 스님이 좀 덧붙여서 해주기를 원해서 하는 얘기에요?

 

...

 

전적으로 동의한다잖아, 전적으로 공감한다고.

 

...

 

전 별로 중요한 게 없습니다.

중요한 게 없다는 거를 중요시 여깁니다.

 

얼마 전에 외국에서 인터뷰했는데

스님이 살아오면서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합니까?”

“70년을 살아보니까 중요한 게 없더라.

이게 제일 내가 중요하게 깨달은 바다이렇게 얘기했어요.

중요하다 할만한 게 없더라.

 

...

 

, 얘기가 나왔으니까,

이 젊은이는 자기의 얘기를 스님 입을 빌려서 좀 하고 싶다.

그럼 내가 뭐, 속은척하고 해주면 되는데

나도 이 성질이 더럽죠.ㅎㅎ

속은척하고 그냥 해주면 되지만..

그런데 이렇게 내가 까발려서 얘기해서

 

그래서 자기보고 하라는 거예요.

정말 궁금해서 묻는 말이 아니고, 질문자는

자기는 이미 생각이 있는데, 스님 얘기 들어보고 그거하고 비슷하면

, 이 스님이 괜찮은 사람이네

자기 하고 틀리면

이 스님 별로네이렇게 생각할 사람이지

정말 몰라서

, 이런 건 어떻습니까?”하고 얘기해주면

, 그게 그러네요이런 스타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자기 생각이 좋은 생각이긴 좋은 생각인데, 자기 생각이 이미 꽉 차 있다.

자기 생각이 꽉 차 있는 사람은

그릇이 꽉 차 있는 사람은 거기 더 이상 뭘 넣을 게 없어.

얘기해 줘봐야 별로 도움이 안 돼.

 

궁금하다는 건

내가 몰라, 그릇이 비어있어.

그러니까 뭐든지 채울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놓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런 데서 생각이 좋다는 거예요.

나쁘다는 게 아니라, 생각은 참 좋은데

그 좋은 생각으로 꽉 자기 에고를 만들어서 갖고 있다.

 

그래서 자기 생각하고 다른 어떤 생각이 있으면

,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네이렇게 받아들이기보다는

, 저건 이기주의야, 저건 잘못된 생각이야.”

이렇게 할 가능성이 질문자에게 있다.

 

그러면 사람과의 사이에 허심탄회한 대화는 어렵다.

유유상종, 나하고 생각 비슷한 사람끼리만 소위 죽이 맞아서 대화하고

생각이 틀리는 사람은 배척하고 이럴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런 말씀을 좀 드리고 싶어요.

 

 

즉문즉설은 여기서 마치고

자기가 한 얘기를 내가 조금 더 붙여서 한다면

우리가 경제활동 할 때, 여러분들은 경제활동을 뭐라고 생각해요?

경제활동.

 

우리가 먹고, 입고, 자고 하는 이 생필품을 생산하는 거라고 생각하죠.

왜냐하면 늘 우리가 필요로 하는 소비를 충족할 생산을 못했기 때문에

경제하면 곧 생산, 이렇게 생각을 한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에 혼사 사냥을 한다.

그러면 자기가 노력한 만큼 생산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둘이 협력해서 사냥한다면 생산력이 높아지는 거예요.

협력을 하면 뭐가 좋아진다고?

생산량이 높아진다.

혼자서 하루에 한 마리 토끼를 잡았는데

둘이 협력하면 세 마리를 잡을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서 협력을 한다, 분업을 해서 협력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분업을 해서 협력을 하면 반드시

그 생산된 거를 어떻게 나눌 거냐는 분배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경제의 핵심은 생산과 분배에요.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생산만 경제라고 생각하지 분배는 별로 중요시 안 하는 거예요.

 

세 마리를 잡았다, 생산량은 높아졌어.

그런데 세 마리를 어떻게 가져갈 거냐는 거예요.

어떻게 분배할 거냐.

 

한 사람이 세 마리를 다 가져가 버렸어.

그러면 그 사람은 횡재했죠, 같이 하니까 훨씬 이익이잖아요.

그런데 한 마리도 못 가져간 사람은 같이하니까 손해잖아요.

그러면 이 사람 내일부터 같이 안 하겠죠.

 

그러니까 한 마리도 못 가져간 사람만 손해를 보는 게 아니고

세 마리 가져간 사람도 장기적으로 보면 이게 손해에요.

자기의 이익이 지속 가능하지 않잖아요.

오늘 하루 이익 보고 끝이 나버렸다는 거예요.

 

이렇게 자기에게 손해,

오늘 하루 이익 보지 장기적으로 자기에게 손해 보는 행동을 자긴 잘한 줄 알고 한다.

이걸 탐욕이라고 그래. 탐욕.

지나친 욕심이다.

지나친 욕심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다는 거예요.

남에게 손해 끼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게 된다.

 

그래서 이게 지속적으로 계속 협력관계가 유지되려면

아무리 못 줘도 참가한 사람에게는 한 마리는 줘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야 이 사람이 계속 협력할 거 아니겠어요.

손해날 짓을 왜 오래 하겠어요, 한두 번이지.

 

그러면 여기서 분배할 수 있는 건

세 마리가 분배의 대상이 아니에요.

한 마리 한 마리 가져가고 한 마리만 뭐가 된다?

분배 대상이 된다.

 

그럼, 이 한 마리 한 마리 가져가는 게 뭐다?

기본이에요, 기본.

요즘 말하면 기본소득과 같은 거예요.

이건 보장하고 그 한 마리를 어떻게 나눌 거냐?

최대로 가져갔을 때, 한 사람이 두 마리 가져갈 수 있는 거예요.

즉 한 마리를 다 가져갈 수 있다.

 

그러면 이 한 마리 가져간 사람은 협력해서 아무 이익이 없잖아요.

아무 이익이 없으니까 협력을 그만둘 수도 있지만

손해난 것도 하나 없잖아요.

그러니까 협력을 유지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이게 최대라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 한 사람이 1.8마리 가져가고

한 사람이 1.2마리를 가져가면

두 사람이 불평등하긴 해도 이 협력을 깨기 어려운 거예요.

? 이익이니까.

불평은 하지만 협력이 안 깨지는 거예요.

 

그러면 1.5마리씩 똑같이 나누면 정의냐?

그래도 불평이 있습니다.

? 기여도가 누가 높으냐? 이게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기여도가 높은 사람은

기여도가 낮은 사람하고 똑같이 나눈 게 불만일 거예요.

 

그러니까 분배는 1.5마리가 정의다, 이렇게 말하면 안 돼요.

여기서 정의는 한 마리에서 두 마리 사이가 정의에요.

한 마리와 두 마리 사이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기여도를 따져서 서로 합의해서 결정해야 해요.

1.5마리, 이거는 이론적인 정의이고

현실에서의 정의는 1마리와 2마리 사이에요.

 

그러니까 그 상황에 따라서 1.5- 1.5가 될 수도 있고 1.8- 1.2가 될 수 있고 1.9- 1.1이 될 수도 있고

그런데 이게 2.5- 0.5 이렇게 되어버리면 0.5가 다음에 협력을 포기해버리는 거예요.

공동체가 붕괴한다, 이런 얘기에요.

 

오늘날 빈부격차가 극심해 가잖아요.

극심히 커져 가면 극빈층은 어때요?

더 이상 이 공동체를 통해서 자기가 이익을 보는 게 아니라 손해를 보니까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죠.

폭동을 일으키든지, 법질서를 안 지키든지, 이런 일이 발생하죠.

그걸 무력으로 진압하지만,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사회가 붕괴한다.

 

그러니까 부자들이 부를 독점하는 것은

아까처럼 3마리 가져가는 거와 같다.

일시적으로는 좋지만, 그것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

그런 데서 우리가 분배를 굉장히 중요시해야 한다.

 

사회주의라든지 이런 쪽으로 너무 경도되면

1.5마리씩 나눠야 한다는 절대 평등에 너무 초점을 맞추고

자유주의니 이런 것을 너무 내세우면

한 사람이 3마리 가져가는 것도 자기 능력이다,

이런 지금 양극단에 치우쳐 있다.

 

그래서 협력을 하면 생산은 늘지만 분배 문제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 분배 문제를 한 마리와 두 마리 사이에

그때그때 기여도와 조건과 합의에 따라서 잘해 나가는 것이

그 시점 시점에서의 정의다.

이걸 시중이라고 그래요.

중도라는 것은 딱 1.5가 중도가 아니고

그 시기, 시기, 그 시대적 사회적 배경에서의 가장

사람의 마음이 동의할 수 있는

그런 합당한 조건을 만든다. 이런 얘기에요.

 

우리가 코로나에 대응하는데도 이번에 보면

전체 이익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좀 자제해라,

그래서 우리가 이 전체 코로나에 신속하게 대응하자

가장 대표적인 나라가 최고 공동체성을 가진 게 북한이죠.

두 번째가 중국이죠.

그다음 베트남이죠.

이런 나라들은 공익을 위해서 개인의 사적 자유를 용인 안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코로나 걸리는 것도 괴로움이지만

코로나 걸렸다고 아파트 문 잠궈버리고 거리에 못 나오게 하고

3주간 집을 봉쇄해 버리면 코로나 걸린 것 보다 더 큰 고통 아니에요?

이게 한 쪽에 극단에 치우쳤다는 거예요.

 

유럽 같은 데는

, 주사를 맞든 안 맞든 내 맘대로다.’

내가 장사를 하든 안 하든 내 맘대로다.’

내가 어디 여행을 가든 그걸 왜 정부가 간섭하냐? 그건 자유다.’

이런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죠.

개인주의적 자유주의가 얼마나 이런 전체 이익을 해쳤나 하는 걸 이번에 봤지 않습니까, 그죠?

 

그래서 이게 다 양극단에 치유친 거예요.

그러면 한국은 뭐, 정부가 잘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이런 약간 좀 전제적인 그런 역사적 배경 위에 민주화가 이루어져 놓으니까

우리 국민들은 어떤 규제를 하는 것도 싫어하지만

또 알아서 적절하게 협력하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게 요번에 잘한 나라가

한국, 일본, 대만, 홍콩, 뭐 베트남, 이런 데도 다 잘한 축에 들어가거든요.

?

그 문화적으로 개인주의와 공동체성이 적절하게 갖추어져 있다.

그런 데서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이 볼 때는 아직 공동체성이 너무 강하다고 보고

노인들이 볼 때는 젊은 애들은 너무 개인주의가 강하다, 이렇게 보여지죠.

변화의 흐름 속에서.

 

그러나 지금의 한국이 세계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그게 중간쯤 있는 거예요, 지금.

일본도 그렇고.

우리는 아무 통제도 안했지 않습니까, 강제도.

그런데 다 마스크 끼라면 끼고

거리 두라면 거리 두고,

가게 문 닫아라! 그러면 문 닫고.

다 잘 따라 했잖아요.

 

그래서 이 코로나를 잘 극복했다면

첫 번째가 공로자는 국민입니다.

우리 국민이 가장 잘했고

두 번째는 의료진들이 굉장히 헌신적으로 했고

공무원들이 아주 공익적으로 협력을 잘했다.

 

정부는 그거를 방해하지 않았다.

보통 보면 정부가 방해를 많이 합니다.

방해하지 않고 그래도 뒷바라지를 했다.

그런데 정부가 너무 지가 잘했다, 이렇게 내세우니까

코로나가 확산되니까 또 다 정부책임이 되죠.

 

그래서 항상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아이고 국민들이 협력을 해주셔서 잘됐습니다이렇게 했으면

확산이 되도 국민들 잘못이죠, 그죠?

공로가 국민들이면 잘못되도 국민들이까 정부 욕을 안한단 말이에요.

잘될 때 정부가 다 자기가 잘했다고 자랑을 해 놓으니까

잘못되니까 욕을 욕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전번 선거는 잘될 때, 투표를 해서 효과를 봤고

요번 선거는 안 될 때 투표를 해서 역효과를 본 거죠.

이게 자업자득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좀 잘된다고 그렇게 너무 교만하면 안 된다, 겸손해야 한다.

또 안됐다고 너무 비굴하면 안 된다.

항상 새로운 기회를 위해서 당당해야 한다.

 

그런 데서 이 공동체성이라는 건 딴 게 아니에요.

사실을 알면 저절로 공동체성이 됩니다.

 

커피 한잔을 내가 마시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관여되었을 했을까?

이 사실을 알면 수천만 명, 수억 명이 관여되었다는 것을 알면

자연적 소중하구나’, ‘아껴먹어야지’, ‘감사하구나’, 이렇게 저절로 나오는 거고

아이들처럼 아무것도 모르면

밥은 어디서 나오니?’

밥통에서요,’

물은?’

수도꼭지에서요.’

이렇게 생각하면 고마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거에요.

옷은 옷장에 있고.

 

그래서 어린애들은 부모 고마운 줄 모르죠.

자기가 어른이 되어서 애를 키우면서

그 어릴 때 내가 사용했던 모든 것들이 누군가가 준비해준 것이구나를 알면 어때요?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한국에 살면 다 불평이 많은데

외국 가서 살아보면 조국의 고마움을 알고

부모 밑에서 살 때는 불평이 많지만

부모 곁을 떠나서 보면 부모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것도

다 사실을 알면 돼요.

우리의 삶 자체가 공동체성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 공동체성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전제적으로 하면

우리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뭐 너 잘되라고 이러지!” 이렇게 애들한테

다 너를 위해서 엄마가 이렇게 하지

이런 식으로 하니까

그건 엄마 생각이고 애들은 저항감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개인의 자유도 존중하는 범위 위에서

또 개개인은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는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있었던 그런 거는

소규모 공동체, 어떤 자급자족의 범위가 작을수록

이 하나하나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것을 다 알게 되기 때문에

다 알게 되면 아무 그런 나쁜 생각을 가질 수 없어요.

 

무지하기 때문에, 모르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원시공산체제, 이런 말이 있잖아요.

공동체 구성원이 50, 100명 이럴 때는 절대적으로 그 안이 평등합니다.

왜냐하면 숨길 수 없기 때문에.

 

그러나 집단이 커지고

지배계급의 음모와 피지배계급에 대해서의 위선적인 행동들을 함으로해서

지배질서를 유지하지 않습니까?

말은 거창하게 좋은 말하고 속은 딴 짓하고

그게 정보가 100% 유통이 안되기 때문에, 공개가 안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거든요.

 

그런 거는 인류문화사를 공부하시면

인류가 어떻게 계급이 발생하고

종교가 발생해서 어떻게 사람을 세뇌하게 시키고 어떻게 지배를.

지배를 하는 데는 폭력적 억압만 아니라

종교라든지 학문이라든지 이런 걸 갖고 세뇌해서

여자로 태어난 거는 전생의 죄다’, ‘하느님의 벌이다이렇게 해서

남성에 복종하도록 한다든지

양반에게 상민이 복종한다든지

이런 게 다 일종의 정신적 세뇌에 들어가든요.

모든 인간은 다 평등한데도.

그런 것도 다 공동체성의 붕괴에서 오는 현상이다.

 

오늘날 우리 지구상에 나타나는 큰 현상은

개인은 자아상실, 자존을 못 느끼고 있고,

인류 공동체는 붕괴되고 있고, 전부 개인주의가 되고,

인류 지구 환경은 어때요? 파괴되고 있는

이게 삼대로 진단할 수 있습니다.

 

지구 환경파괴

인류 공동체 붕괴

자아 상실

 

이 문제를 어떻게 치유해 나갈 것인가가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안고 있는 하나의 미래의 과제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

 

항상 공동체성이 중요하다, 부처님 말씀이 중요하다 해도

부처님 말씀 아닌 예수님 말씀도 경청할 줄 알고

공자 말씀도 경청할 줄 알고

무슬림 얘기도 그렇게 사물을 보는구나이렇게

항상 거기 동조하라는 것도 아니고

반대하라는 것도 아니고

, 그들은 저렇게 믿고 있구나’, ‘저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이렇게 열린 자세가 되어야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

 

딱 정해놓고 있으면 더 이상 배울 수 없다.

즉 그릇에 뭔가 가득 차 있으면 더 이상 담을 수 없다.

좋은 것이라도

그걸 꼭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