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3)

법륜스님의 하루_ 성적 에너지를 절제하면 더 높은 영적 경험을 할 수 있나요? (2023.05.07.)

Buddhastudy 2023. 7. 13. 20:03

 

 

(제가 듣기로, 금욕을 해서 성적 에너지를 절제하면 더 건강하고 생산적이며 초월의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밀교(티베트불교)에서 이러한 상태를 추구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를 실천하는 것이 어렵고 또는 그 효과를 알 수 없어서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 남자친구는 사정하면 많은 힘과 에너지를 잃게 된다고 합니다. 그가 금욕하는 방법을 배워서 에너지를 보존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는 둘 다 영적인 것에 관심이 많아서 초월의 상태를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이에 대해 조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지만 아직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실제로 증명해 보려면 금욕을 한다고 알려진

남자들의 평균 수명이 얼마인지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얼마인지

각각의 통계를 내어서 비교해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 곳곳의 장수촌 사람들이 대부분 결혼해서 살고 있는 것만 봐도

그것은 과학적으로 신뢰할 만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성적인 욕망을 지나치게 추구하면 건강을 많이 해친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성적인 욕망은 최소한으로 절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결혼해서 성적인 욕망을 서로 나누기로 해놓고

그것을 마지막에 가서 참는다는 것은 굉장한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에

건강상 오히려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마지막 단계에서도

그것을 참아낼 수 있는 힘을 키운다는 극기의 측면에서는

아주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수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성관계를 하면서 마지막 단계에서 사정을 하지 않고 참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수행과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수행자들이 성을 수행의 방법으로 삼는 등

성욕을 합리화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욕망이 극에 달했을 때 이것을 참아낼 수 있는지 테스트를 해보는 것은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수행은 화가 끝까지 일어났을 때

그 화를 참는 것이 아니라

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질문자가 말하는 것은

마치 화가 끝까지 났는데

결국 바깥으로 화를 내지 않고 끝까지 참으면

건강에 좋다는 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그것은 굉장한 스트레스를 줍니다.

그리고 성을 가지고 수행의 도구로 삼는 그런 수행법은

개인에게는 수행이 될지 모르지만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시킬 수도 있습니다.

 

 

다른 것도 참을 것이 많은데 왜 하필 그것을 가지고 참는 수행을 하려고 합니까?

본인이 참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 훈련을 해본다는 것은 괜찮지만

상대편에게 건강을 위해서 그런 것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관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수행이 아니라

가장 극한 어려움을 참아내는 극기 훈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훈련이 건강에 좋다고 하는 것도 좀 더 검토를 해봐야 합니다.

특히 수행은 오래 살고 안 살고 이런 것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세계에는 가장 건강하고 오래 사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을 장수촌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사는 지역을 살펴보면 보통 해발 700m에서 1000m 사이입니다.

위도가 좀 높은 지역이라면 해발 500m 정도이고, 대부분 초원 지역입니다.

초원지역이라는 것은 비교적 습도가 낮아 공기가 건조하다는 것을 의미해요.

 

사람들의 직업은 대부분 목장을 운영하는 목동들입니다.

동물을 가둬 놓고 키우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을 풀밭에 풀어놓고

늘 지팡이를 짚고 동물들을 따라 이동합니다.

 

그들은 결혼도 하고 자식도 있어요.

왜 이런 사람들이 건강할까요?

농부들은 굉장히 무거운 짐을 지거나 때로는 과로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비교적 과로를 하지 않고 하루 종일 20km 이상 걷습니다.

 

첫째, 과로하지 않고

둘째, 천천히 오래 걷고

셋째, 음식을 적게 먹으며

넷째, 사는 곳의 공기가 맑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역 사람들이 비교적 건강하고 수명이 길다고 합니다.

 

옛날 왕들이 여러 후궁을 두고 성적인 욕망을 지나치게 소비한 것도 과로에 속합니다.

이것은 건강에 매우 해롭습니다.

젊을 때 방탕하게 살면 건강을 잃게 되기 때문에

방탕하게 살지 말라’, ‘욕망을 절제하면서 살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질문자의 이야기는 이것과는 조금 성격이 다릅니다.

 

...

 

남자친구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면 안 돼요.

남자친구의 성적인 문제 때문에 남자친구의 건강이 걱정된다면

질문자가 남자친구를 만나지 말아야 합니다.

 

질문자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오히려 남자친구와의 성관계가 너무 잦다는 생각이 들 때

조금 자제하자고 말하는 것은 좋지만

상대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먼저 자기를 잘 살펴봐야 합니다.

무슨 이유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내 속에 어떤 욕망이 있기에 이런 말을 빌려서 이렇게 이야기하는지 한번 살펴보면 좋겠어요.

 

마치 남자친구의 건강을 생각하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질문자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그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밀교의 그런 전통에 대해서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들의 문화이고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알면 됩니다.

 

질문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떻게 하면 돈을 버느냐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하느냐’,

어떻게 하면 출세를 하느냐하는 것과 똑같은 관점에서

어떻게 하면 깨달음을 얻느냐하고 욕망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 욕망의 대상이 깨달음이 되었을 뿐이에요.

욕망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깨달음의 길에 이르는 것이지

욕망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에요.

 

콧구멍으로 숨을 어떻게 쉬면 깨닫느냐

성을 어떻게 참으면 깨닫느냐

뭘 어떻게 하면 깨닫느냐

이런 생각 자체가 모두 욕망을 추구하는 마음을 반증하는 겁니다.

깨달음과 아무 관계가 없는 어떤 신비적인 것을 지금 쫓고 있는 거예요.

 

명상이나 요가, 수행을 가르치는 많은 단체에서는

사람들을 많이 오게 하려고 욕망을 부추깁니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행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바른 법과는 매우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 욕망들을 다 내려놓을 때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을 니르바나(Nirvana),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신비한 것이 아닙니다.

 

질문자가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아요.

어떻게 하면 건강할 것인지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것인지

이런 관점에서 그런 행동들을 해보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개인이 돈을 벌거나 공부를 하겠다고 할 때

방법을 찾는 것과 같은 하나의 선택 사항이니까요.

그러나 깨달음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수행이란 괴로움이 없는 상태

즉 니르바나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가능합니다.

 

질문자는 욕망을 참는 것으로 깨달음을 구하려고 하니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성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지로 나아가야지

성적 욕망을 추구하면서 단지 사정을 안 하면 건강해지느냐

초월의 경험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수행과는 매우 거리가 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