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나는 누구인가 13. 뇌과학으로 풀어보는 깨달음의 비밀

Buddhastudy 2023. 8. 17. 19:14

 

 

 

무생물과 생물을 구분하는 잣대는 의식의 유무이다.

의식으로 인해 무생물과 구분되는 생명 현상이 신비롭게 전개된다.

하지만 과학계에서의 의식은 여전히 부정적 존재로 남아 있다.

실험과 검증으로만 답을 내려야 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그런 과학계의 일대 변화가 일고 있다.

그것은 현대 물리학이 발전하면서 일부에서나마 의식을 물리 현상의 하나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전물리학에서 의식을 철저히 배제한 것에 비하면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서 삼라상 모든 것이 정보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다.

정보는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제3의 존재 형태라는 점도 알아봤다.

사실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유나 무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허구이다.

 

이렇게 만물을 정보로 보게 되면 물질과 생명의 간격이 매우 좁혀진다.

같은 정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돌멩이와 강아지를 비교하면 폐쇄성이 높아 정보 활동이 위축되어 있는 것이 돌맹이

폐쇄성이 상대적으로 낮아 정보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강아지가 된다.

 

돌멩이를 다시 한 번 관찰해 보자.

다른 정보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엄청난 고집이 느껴지지 않는가!

 

 

무생물이라 불리는 것들 대부분이 고집불통이다.

자신이 지닌 정보대로만 움직이려 한다.

돌과 나무를 상자에 담아 흔든다고 해서 그 둘의 정보가 섞이는 일은 없다.

이에 반해 강아지와 고양이를 한 방에 두고 지내게 하면

그들의 습성에 약간의 변화가 올 것이다.

사실 식물 역시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아 호불호로 반응하는 것이 관측되고 있다.

 

기계론적 우주관에서는 물질과 생명을 갈랐다.

하지만 양자 역학에서는 물질과 생명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물리 현상에 의식이 개입되는 현상을 실험으로 관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래서 양자 역학자들은 [의식 역시 자연의 일부]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의식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의식의 위치와 운동량을 찾게 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다.

하지만 물질의 최소 단위인 양자들도

그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찾을 수 없어 확률적으로 계산하는 마당에

그것보다 작고 애매모호한 의식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다.

 

일단 의식이 있을 확률이 가장 높은 뇌부터 살펴보자.

주름이 잡힌 뇌를 펼치면 신문지 반장 정도의 작은 면적에 지나지 않지만

뇌에 극히 일부분이라도 손상되면

생명을 잃든지 아니면 의식의 변화가 오면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뇌는 엄마의 자궁 속에서 잉태되는 순간부터 자라나게 되는데

단순히 뉴런의 수만 증가하는 것이 아니다.

시냅스라는 미세한 가지가 촘촘히 뻗으며 네트워크를 이루고

여기서 온갖 신호를 처리하며, 지능이라는 것이 싹트게 된다.

그래서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인간의 영혼을 천억 개의 뉴런과 천조개의 시냅스의 연결망에서 찾기도 한다.

 

우리는 시시각각 떠오르는 생각을 이용해서

나름 주체적으로 사유하며 판단한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뇌가 만들어내는 일련의 정보 활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뇌과학자들의 물질론적 주장에 반대하려 해도

속속들이 보고되는 뇌에 관한 연구들은

의식의 존재를 부정하는 쪽으로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던 존재가

사실은 뇌에서 만들어지는 정보의 환영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여간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뇌를 살펴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쉽게 3층짜리 주택을 떠올리면 된다.

1층은 뇌줄기(뇌간)와 소뇌로 구성된, 흔히 파충류의 뇌라고 알려진 곳이다.

호흡이나 심장 박동, 혈류와 같은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기능을 주로 맡고 있다.

만일 우리의 뇌가 1층에서 멈췄다면,

지금쯤 하거나 뱀처럼 음침하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1층 위에 종뇌라는 2층이 올려져 있다.

이곳은 파충류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화를 내며 우르렁거리는 것은 기본이고, 웃거나 울 줄 아는 감정도 생산해내는 신비로운 곳이다.

그뿐만 아니라 애정 표현도 다각도로 할 수 있게 함으로써

파충류와 구별되는 포유류만의 특성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그래서 2층의 중뇌는 포유류의 뇌혹은 감정의 뇌라고 부른다.

 

우리 뇌가 2층에서 멈췄다면 어땠을까?

아마 십중팔구는 털복숭이 원숭이가 되어 나무 위를 펄펄 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인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2층짜리 주택에서 멈추지 않았다.

끊임없이 3층을 올리기 위해 진화했고, 결국 대뇌 피질을 확장하여 전뇌를 만들어냈다.

비로소 복잡한 사고와 창조 기능을 담당하는 고도의 두뇌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전뇌를 가리켜 이성의 뇌 또는 인간의 뇌라고 한다.

 

이렇게 3층 주택에서 만들어내는 사고라는 것은 신비롭고 오묘하기 짝이 없다.

사실 컴퓨터 수십만 대를 모아 한꺼번에 가동한들

그 정교함에 있어서는 인간의 의식을 따라오지 못한다.

이런 것을 보면 인간에게는

의식이라는 고차원적 존재가 뇌 속에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현대 뇌과학은 인정사정없이 의식의 존재를 도륙 내고 있다.

인간의 세세한 감성과 생각의 흐름마저 과학적으로 풀어냄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물질 현상에서 파생된 것으로 전락케 한다.

 

 

최근 들어 대뇌 피질 중 전두엽의 앞부분에 위치한 전전두엽이 주목을 끌고 있다.

어떤 일을 계획하고 결정하는 의식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사람의 감정을 제어하는 세로토닌계가 있는데

여기에 장애가 발생하면 폭력적 성향이 두드러지게 된다.

반사회적 인격 장애인 사이코패스의 대부분이 이곳의 질환에서 발생한다고 하니

이런 것을 보면 마치 인간의 의식이 뇌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뇌와 인식의 관련성에 대한 자료는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고

이에 반비례하여 의식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대로 쭉 가다가는 유전자를 조작하듯 뇌를 조작하여

원하는 인간상을 만들어내는 시절이 올지도 모른다.

 

가령 수술대 위에서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를 비롯해

고호나 피카소처럼 뛰어난 예술가도 만들어낼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두려움 없이 적진에 뛰어들 전쟁 영웅도 만들고

나아가 예수처럼 온 인류를 무한히 사랑하는 성인도 만들어낼 것이다.

 

돌이켜보면, 십자가에 못 박히던 예수는 참으로 인간적이었다.

처참한 앞날을 예견한 예수는 산상 기도를 통해 그 길만은 끝까지 피하려 했다.

허나 끝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자,

주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면서 자신을 버린 신을 원망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육신에 가해지는 고통과 두려움이 컸던 탓이리라.

 

드물지만 고승들 역시 소신공양하여 등신불이 되려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대단한 용기가 없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산채로 불태워지는 고통을 그 무엇에 비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뇌에서 특정 부위의 활동을 정지시키거나

모르핀보다 100배나 강한 엔도르핀을 촉진하게 하면

간단히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뇌 속에서 고통의 신호가 원천적으로 차단됨으로써

등신불이 되어, 육체가 타들어 가도 거룩한 미소를 잃지 않을 것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더라도 환위에 잠긴 표정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뇌과학이 더욱 발달하면, 우주의식이라 불리는 해탈심까지 넘보게 될지도 모른다.

뇌를 조작하여 형이상에 머무르던 도통의 경지를 현실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금처럼 어렵게 도를 닦지 않고도 간단히 성불에 이르러

모든 사람들이 부처가 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유전자를 조작하여 무병장수하고 뇌를 조작하여 성인이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이 정말로 실현 가능할까?

 

그런데 의식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육신의 뇌를 조작하여 얻어지는 결과물은

그야말로 아침 햇살에 반짝 빛나다 사라지는 초로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의식이란 물질이 만들어낸 일종의 신기로 같은 현상에 불과하게 됨으로써

자아의 정체성 문제와 함께 인간성 상실의 위기는 더욱 수렁에 빠져들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없는 사실을 억지로 꾸며 의식의 존재를 무턱대고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간의 정체성이나 상실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연법칙에 대한 올바른 진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