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불교와 양자역학4. 중관사상과 유식학은 양자역학과 잘 어울린다

Buddhastudy 2023. 8. 21. 19:42

 

 

양자역학은 입자들의 실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파동함수의 붕괴로 인한 입자의 현실화에 어떤 인과율도 개입하지 않음을 얘기한다.

이것은 불교의 교리와 맞기도 하고 배치되기도 한다.

그러나 중관사상의 과 유식사상의 꿈의 비유와 비교해 보면

매우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인과율을 부정하는 것은

현상계를 꿈에 비유하는 유식학에서는 널리 받아들여지는 주장이다.

실체 없음()과 꿈 같은 현상계(만법유식),

그것은 둘 다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갈애,집착)의 소멸에 기여한다.

양자역학은 깨달음을 위한 과학으로 음미할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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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불교와 양자역학 네 번째 시간

뇌와 양자역학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19세기가 경제학 제국주의

20세기가 심리학 제국주의

21세기가 뇌과학 제국주의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어떤 인문학적인 또는 물리화학적인 생물학적인 가설들은

요즘은 어떻게 보면 뇌 과학이 다 채점하고 점수를 매겨주는 것 같은

이런 위치를 갖고 있고

뇌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 과학적 발견들이 축적됨에 따라서

믿음을 대단히 크게 가지고 있죠.

 

그런데 뇌과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뇌에 대해서 아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음은 어떻게 생겨나는가하는 것도

사실은 정확하게 규명된 게 아니거든요.

 

어쨌든 오늘은 양자역학과 뇌에 관한 얘기를 하면서

이게 불교와 어떤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지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신 활동하고 내 활동은 같은 것인가?

그러니까 정신활동이라고 하는 것은 물리적 기반이 있는 것인가?

물리적 기반이 전부인가?

물리적 기반과 독립해서 일어나는 활동인가?

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아무래도 뇌 과학자들의 입장에서는

뇌의 전기화학적인 활동이라고 하는 뇌 활동이

결국 정신활동이 아닌가라고 하는 잠정적 가설을 가지고 연구를 하겠죠.

 

그런데 과학자들이 또 양심적이어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되게 상관관계 정도는 확실한 것 같은데

이게 완전히 정신활동이라고 하는 것이 물리적 기반 위에 있는

뇌의 전기화학적 활동일 뿐이라고 하는 환원할 수는 없다, 환원주의적인 시각이죠.

환원한다고 할 수는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되게 정직한 거죠.

그래서 그건 아직 연구의 시작 단계일 뿐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정신활동은 물론이고

인간은 뇌 활동조차도 정확하게 규명해내고 있지 못한 것이

오늘날 과학의 현실이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어찌 됐건 뇌 활동이 만약에 전기화학적인 물리적 작용이라면

그 작용에는 양자적 사건이 분명히 발생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전자가 개입하기 때문에.

 

그런데 이 양자적 사건에는 곤란한 점이 있는데

인과라든지 필연성이라고 하는 것이 없는 거잖아요.

이게 순수한 무작위성, 랜덤니스가 작용한다,

이렇게 보는 거지 않습니까?

 

그래서 추상적인 공간에서 파동함수, 확률로 나타나는 파동함수로 존재하다가

측정의 순간에 그것이 함수가 붕괴되면서 현실로 나타난다라고 하는

우리가 이런 문과생이 듣기에는 좀 동화 같은

그러나 그것이 증명이 되고 적용이 된다고 하는 데서는 또 난감한

이런 순수한 무작위성이 특징이다.

이렇게 얘기를 한 것이죠.

 

물론 무엇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예측은 못하지만, 통계치를 제시할 수 있는데

그 통계치가 99.9999%라면

또 퉁 치는 걸 잘하는 문과에서는 그게 그거다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어찌 됐건 바늘의 바늘 바늘의 빈틈에 어떤 게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을 확률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거는 어떤 해석이 가능한가 하면

내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려고 하는데 나는 악한 행동을 할 수도 있는 거죠.

그럴 확률이 전혀 없지 않다.

이게 사람 머리 뒷골을 잡아당기는 것이죠.

이게 양자역학적인 사실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거를 또 문과적으로 또 읊어보면

로마서의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선이지만

나는 선을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데도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탄과 같은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거시적으로는 거시적으로는 99.99% 의도한 대로 가는 것이지만

미시적으로는 또는 양자적으로는

양자적 사건에는 필연성이 인과성이 없다 라고 밖에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이런 양자역학적인 관점이

불교와 잘 맞는 측면이 바로 실체성 없음이잖아요.

그러니까 확률 파동 함수나 함수의 붕괴로 인한 현실화라고 하는 것은

실체적 존재가 필요하지 않다라고 하는

또는 없다라고 하는

불교의 공사상과 잘 부합을 합니다.

 

불교가 공이 참 중요한 중심 개념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고득락

괴로움을 벗어나려고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양자 현상이라고 하는 것이 인과관계가 없다 라고 하면

이게 세계관에 문제가 좀 생기는 것이죠.

 

인과율을 부정하는 세계관을 우리가 받아들이면

불교에서 말하는 사성제, 고집멸도

고집멸도의 사성제라고 하는 것은 의학적인 진단 같은 거거든요.

증상을 보고 증상의 괴로움 아닙니까?

집은 그 증상이 나타나는 이유잖아요.

멸은 그 정상을 소멸시키자 라고 하는 것이고

도는 그 소멸시키는 방법론에 관한 것이니까

고집멸도라고 하는 사성제는

사실은 괴로움의 발생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인과적인 해석이고 가르침이거든요.

 

이거는 원리적으로 부정될 수도 있는 것이어서

불교가 매우 불편해하는 지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어떤 수행을 한다든지

다른 사람을 돕는다든지

지혜와 자비를 만들어 나가야 되는 그런 측면에서 보면은

그것도 또 기운을 꺾는 그런 세계관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이다, 받아들여라, 이렇게 얘기하니까

불교입장에서는 곤혹스럽다이렇게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도 그런데 이거를 어떻게 통합이 안 되니까 분리해 놨거든요.

그러니까 중력이 지배하는 거시 세계에서는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고전 물리학이 지배한다.

그리고 양자 수준의 미시 우주에서는 양자역학이 지배한다.

 

이렇게 뚝 잘라서 이것과 이것은 하여튼 다르다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상황 아닙니까?

 

그러면 마음도 똑같은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생활, 사회생활에서는, 사회관계 속에서는 인과율로 간다.

인과율이 적용되고 인과 윤리의 귀속을 받는다.

하지만 미시 세계, 내 마음의 세계에서는 이걸 법계라고도 하는데

무작위성, 우연성 또는 무작위성을 진리로 수용하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

하는 얘기를 해볼 수가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비불교적인가?

이런 얘기도 해볼 수가 있을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평안을 얻으려면 일단 집착에서 벗어나야 되잖아요.

다 떠나서 요즘 그 노래가 있잖아요.

내가 내 그게 부럽지가 않아, 전혀 부럽지가 않아.’ 이랬을 때

우리는 평안을 얻을 수가 있는데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어떻게 보면 능선길과 계곡길 처럼 두 가지가 있을 수도 있다라고 생각을 한번 열어봅시다.

 

예를 들면

우리는 괴로움을 느낄 때 괴로움이라고 하는 게 이런 거죠.

뭐 후회라든지, 자책이라든지 그죠?

또는 거기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낀다든지 이런 쪽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참 좋다, 선망하고 부러워하고

그렇게 해서 어떤 형태로든지 집착하는 것이죠.

거기서 묶여 있는 거잖아요.

그것이 자꾸 나를 괴롭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누구의 책임도 아니고

더 좋은 것도 아니고, 더 나쁜 것도 아니고

그냥 우연한 하나의 랜덤한 현상에 불과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의 집착을 소멸시킬 수 있는가 그죠?

 

그냥 가다가 영화를, 그냥 미드 하나 본 것

웹툰을 하나 읽은 것, 판타지 소설을 하나 읽은 것

서로 내 마음이 그렇게 우연적인 것 또는 비현실적인 것, 꿈 같은 것으로

우리가 대하는 현실을 내 마음이 현실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그 현실을 받아들인다면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어쩌면 집착이나 괴로움, 집착으로 인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다라고 하는 것이 성립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조금 달라 보이는 대단히

논리적인 길이 아니라

인과율에 따르는 엄격한 인과율에 따르는 그 논리성이 있는 그런 것 아닌

랜덤니스, 그 무자비성, 우연성 또한 우리의 집착을 뿌리 뽑을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아직까지 희망적인 것은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뇌 과학의 지금 초기 발전 단계에 있기 때문에

이게 뇌의 물리적인 작용의 우연성이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정신활동 전체가 우연하다, 혹은 랜덤하다

이렇게 지금 결정해버린 것도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과학은 계속 지그재그로 발전하고 있고

과학이 더 발전하면서 우리는 조금 더, 더 지혜로워지고 밝아질 수 있고

우리의 괴로움을 소멸시키는데

골짜기면 어떻고, 능선길이면 어떻습니까?

봉우리에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죠.

 

그래서 이게 나의 어떤 잘못 때문에 일어났다라고 하는

인과응보도 굉장히 중요한 길이 될 수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인과관계가 없고, 우연하고, 꿈과 같고, 환상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버리면

이것 또한 집착으로부터 완전히 놓여날 수 있다.

 

근데 사실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뭡니까?

유식학이죠.

 

양자역학은 실체가 없다라는 점에서는 중관사상과 대단히 잘 부합하고

이 모든 것이 꿈과 같다, 환상과 같다라고 이해하는 점에서는 유식학과 비슷해서

제가 볼 때는

양자역학과 불교는 매우 잘 지금까지는 어울리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뭐냐 하면

결국은 어떻게 해석이 되었든

집착으로부터의 벗어남

그것이 괴로움의 소멸이고

평안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하는 것 자체가 변할 수는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