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3)

법륜스님의 하루_ 타협하는 마음과 중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2023.08.12.)

Buddhastudy 2023. 11. 13. 20:04

 

 

저는 자신과 타협하려는 마음과 중도의 차이점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을 배울 때 부처님께서 대기설법으로 대중을 깨우쳐주시는 이야기를 듣고 당시 수행자들이 무척 부럽기도 했습니다.

공부에 진전이 없어 집으로 돌아가려는 소나 꼴리위사(Soṇa koḷivisa)에게

수행을 거문고에 비유해 주신 법문에서

중도가 이러한 것이구나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일상생활에서 공부를 하다가 집중이 안 된다거나

강의가 어려워서 재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다른 할 일을 떠올리며 그날 공부 목표량을 채우지 못하고 끝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더 능률적이라고 제 자신과 타협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자신과 타협하는 마음과 중도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삶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복을 받는다는 전통적인 주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복을 받는다는 건

확인할 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인간은 욕망을 갖고 있는데 그 욕망이 채워지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것이 세속에서 말하는 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거나 큰 집을 사거나

아이가 공부를 1등 하는 일을 두고

복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여기에 반대하는 새로운 주장은

욕망의 씨를 말려야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행복이라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욕망 자체를 없애버려야 진정한 행복에 이른다고 주장한 거예요.

욕망을 충족시키는 걸 쾌락주의라고 하고

욕구 자체를 없애려는 걸 고행주의라고 합니다.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에는 왕자로 사셨기 때문에

쾌락주의의 끝까지 가봤습니다.

왕궁에서 늘 파티를 열고, 쾌락을 즐겼습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도 쾌락을 즐기다가 출가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처님은 출가하신 후로는 그와 반대로 고행주의를 따랐습니다.

고행주의자 스승을 만나서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온갖 고행을 다 하며

고행의 끝까지 가봤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쾌락의 끝에서도 완전한 자유에 이르지 못했고

고행의 끝에서도 완전한 자유에 이르지 못하자

도대체 뭐가 잘못됐을까하고 자신의 인생을 돌아봤습니다.

 

세상에 있는 두 길을 모두 다 가봤는데

둘 다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제3의 길이라는 건 없었기 때문에

쾌락주의 아니면 고행주의였고

이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었던 거죠.

 

이건 우리가 명상을 해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명상을 하다가 다리가 아프면, 다리를 펴든 지, 고통을 참든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도

담배를 피우든지, 아무리 피우고 싶어도 이를 악다물고 참든지

길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다리를 펴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이렇게 욕망을 따라가게 되면 과보가 따릅니다.

반대로 참으면 스트레스를 받게 돼요.

그렇기 때문에 둘 다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길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이걸 알게 되신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욕망을 따르지도 않고, 욕망을 참지도 않느냐?’ 하는

새로운 길을 탐구하셨습니다.

이 길은 욕망을 따르지 않으니까 과보를 받지 않고,

참지 않으니까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 길입니다.

그게 바로 욕망을 다만 욕망인 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욕망을 쫓지도 않고, 욕망과 싸우지도 않는 길이에요.

다만 욕망이구나하고 알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새로운 길을 발견하셨는데, 이것을 중도(中道)’라고 합니다.

 

공자님도 이러한 이치를 발견하셨습니다.

다만, 공자님은 수행적 관점에서 발견하신 게 아니라

정치적 맥락에서 발견하셨습니다.

공자님이 살던 당시에는 여러 가지 백가쟁명(百家爭鳴)이 있었는데,

그 많은 주장들 가운데 이쪽이든 저쪽이든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용(中庸)입니다.

 

우리가 북한 핵문제를 해결할 때도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합니다.

한쪽에서는 저놈들은 나쁜 짓을 하니

압박을 해서 핵을 포기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관계를 개선해서 핵을 포기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금은 둘 다 안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한다고 해서 핵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고,

북한을 압박하고 군사훈련을 한다고 해서 북한이 핵을 포기한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두 가지 방식이 아닌 새로운 해결 방식을 찾는 것이 중도입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죠.

 

기원전 4세기 경에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와 유사한 황금 중도라는 개념을 정치에 적용했습니다.

당시 인도와 중국 사이에도 아무런 교류가 없었고

인도와 그리스와도 아무런 교류가 없었는데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관점이 나온 건 인류사적으로도 특이한 일입니다.

 

지금 질문자가 공부가 안 돼서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쾌락을 따르는 것이지 중도가 아닙니다.

그냥 하기 싫은 마음을 따라간 거예요.

 

그건 명상을 하다가

다리가 아플 때 다리를 펴는 것과 같습니다.

중도와는 거리가 먼 거예요.

 

오히려 중도의 길을 가려면

공부를 하다가 이해가 잘 안 되고 싫은 마음이 일어날 때

지금 싫은 마음이 일어나는구나’,

공부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이 있구나하고 살피면서

공부를 계속해나가야 합니다.

이를 악다물고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니고 중단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지금 싫어하는구나하고 알되

그 싫은 마음에 휘둘리지 않고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중도입니다.

 

길을 가다가 다리가 아프다고 해서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다리가 부러져도 억지로 참고 가는 것도 아니고

가긴 가되 다리가 아프니까 잠시 쉬었다가 가거나

다리를 좀 주물렀다가 가는 것이 중도입니다.

 

배가 고프다고 포기하는 게 아니라

가긴 가되

배가 고프니 잠시 밥을 먹고 가는 것이 중도입니다.

 

지금 질문자가 이야기한 것은

중도와는 거리가 먼 얘기예요.

좋고 싫은 감정에 끌려가는 것은 욕망을 따르는 행위입니다.

싫은 마음이 난다고 해서 공부를 그만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욕망을 따르는 행위예요.

, 한쪽에 치우친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말귀를 잘 알아들어 줘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