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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經 | 먼 과거에도 세상의 이치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 동양사상과 불교 | 월인선원

Buddhastudy 2024. 4. 10. 20:23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도

이 세상에 생기고 사라지는 일의 어떤 이치나 도리를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어요.

 

세상에 이런 일 저런 일이 있잖아.

막 계절도 바뀌고 눈도 오고 비도 오고

별도 어떤 때는 이쪽에서 떴다가 저쪽에서 떴다가

계절별로 조금씩 자리를 바꾸고 이러니까

이 세상에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날까?

무슨 이치나 도리 때문에 일어날까?

이런 고민을 많이 했겠죠.

 

그래서 제가 이런 불법을 공부하면서 보니까

동서양의 어떤 사상 이런 걸 보면은

그런 고민을 참 많이 해서 만들어 낸 이런 표현들이구나

이런 게 느껴지는 때가 있는데

그게 예를 들면 음양오행이라든지 이런 건데.

 

불교에서도 이걸 깨닫고 보니까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뭐라고 할 게 아무것도 없어.

여기는 마음이라고 하는 이름조차도 없어.

어떤 형체도 없고

물질도 아니고

그렇다고 뭐 어떤 정신적인 것도 아니니까.

왜냐하면 정신적인 건 느낌이거나 감정이거나 뭐 이런 거거든.

근데 그게 아니야.

이거는 뭐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래서 이걸 텅 비어 있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거든.

 

동양사상에서도 도를 그렇게 표현합니다.

그래서 라고 보통 표현해요.

동양사상에서도 무.

 

그래서 동양사상은 유라고 하는

있는 것은 다 무에서 나왔다고 그러죠.

도에서 나왔다 이 말이에요.

무에서 나왔다라고 하는 말은.

 

근데 구마라집이라고 하는 이 사람이 중국으로 잡혀 왔잖아요.

잡혀 와서 불경 번역을 시키니까 번역을 했는데

그러면 이거를 한자로 뭐라고 표현할까?

이거를 이거를, 말할 수 없는 이거를.

 

근데 이 동양의 중국 사람들은

그때도 이걸 라고 표현했거든

뭐가 없다라고 표현을 했어요.

 

근데 그 자 가지고는 이걸 다 표현할 수가 없어.

제가 구라마집을 만나서가 아니고, 공부를 해보니까

그래서 구마라집이 찾아낸 게 공이에요. .

 

하고 는 좀 느낌이 어감이 다르시죠?

그래서 그 말하지만 공을 찾아낸 거예요.

라고 해놓으면 이 동양에서 이미 쓰고 있는 라고 하는

동양에서 이 라고 할 때는

라고 하는 게 있는 거거든.

라고 하는 게 있어요.

 

그래서 동양사상을 보면

이 무에서 유가 생길 때

아직 이 모습을, 유라고 하는 모습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이 무가 유로 그냥 생기는 게 아니지.

뭐가 생기려면 뭐가 꼬물꼬물해야 될 거 아니야?

생기려면.

 

이 꼬물꼬물하는 이 상태를 뭐라고 그러냐?

음양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우리 태극기.

 

태극기 보면 꼬물꼬물하고 있잖아.

둘이 이렇게 붙어서.

그래서 이 꼬물꼬물한 거는

모습은 아직 없는데

이거를, 모습으로 형상화한 걸 음양이라고 그러는 거야.

근데 불교에서는 이 음양 빼버리지

 

필요 없어. 그거는.

꼬물꼬물한 이거 설명 안 해도 돼.

그래서 이 꼬물꼬물함이 생겨나기 위해서

이 모습 없이 꼬물꼬물한

두 개의 어떤 기운이라고 해도 좋고, 음양이라고 해도 좋은데

이게 꼬물꼬물 생겨나기 전에 이렇게 하고 있는 거를

한자로는 곤이라고 그러는 겁니다. .

 

그리고 장자에 보면

바다에 큰, 어마어마한 큰 뭐가 살고 있는데

그놈이 바다 위로 올라와서 하늘을 날 때는 봉황이 된다고 그러잖아요, 봉황새가.

바닷속에 있을 때 그놈 이름이 이에요.

 

그래서 이 이라고 하는 말은

아직 이 모습이 봉황으로 딱 드러나기 전에

이 꼬물꼬물하고 있는

이거를 얘기하는 거예요.

 

불법에서 그거 빼버려요.

그거 필요 없어. 그거는.

 

알 수는 없는데, 이걸 체험해 놓고 보면

있다고 하는 모든 것은

그냥 여기에서 다 생기고 사라진다라고 하는

이런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감이 좀 있어요.

근데 알 수는 없어, 이거는.

 

그래서 이걸 교리적으로 뭐라고 하냐?

우리 마음에는 두 개의 문이 있다.

이 문은 없는 문이지.

모습이 지어진 문이 아니에요.

첫 번째가 진여문이고

두 번째가 생멸문이다.

 

이 생멸문은 뭐냐?

분별, 우리 분별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분별도 사실은 일이에요.

알 수 없고, 모습 없는 이게 모습을 드러낼 때

분별로도 드러내는 거고

분별없음으로도 드러나는 거지.

 

그래서 대승불교는

이 분별 망상 그대로가 해탈 열반이다 하고

그냥 탁! 하고 가르쳐 버리는 겁니다.

 

분별 망상을 어찌해서

해탈이 되고, 깨닫는 게 아니고

그전까지는, 대승불교가 나오기 전까지 이 불교도 그랬고

다른 어떤 수행도

선정을 통해서 해탈한다고 그랬죠.

뭔가를 갈고 닦아서 해탈한다고 그랬어요.

 

근데 이게 다 아니야.

깨달아 본 입장에서는 그건 다 틀린 거거든.

아니야, 그 길이 아니야.

그냥 분별 그대로가 해탈 열반임을

우리가 조견

비추어 보는 거를 깨달음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반야심경에 첫 구절에 딱 써놔 버린 거예요.

관자재보살 행심반야 바라밀다시

조견 오온이 개공이면

도 일체고액이다하고 딱 써놔버린 거예요.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고

그게 생각, 느낌, 감정이

이 생각이냐? 저 생각이냐?

이 생각은 깨끗하고, 이 생각은 더럽고

이 생각은 옳고, 이 생각은 그르고

이걸 따지는 게 아니고

옳은 생각이든 그른 생각이든

두려운 느낌이든, 감정이든, 기쁜 느낌이든, 감정이든

다 그냥 이거다.

더 이상 뭐가 필요합니까?

이렇게 다 천명을 해놨고 다 가르쳐 놨는데

더 뭐가 필요하냐고.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는 하나하나가

그냥 이 일이다 라고 딱 가르쳐 놨는데 뭐가 필요합니까?

뭘 이해할 게 더 있어야 됩니까?

그냥 이 일임을 확인하면 되는 거 아니야.

 

필요한 건 그거밖에 없어요.

이 일임을 아는 게 아니고

이 일임이 한번 확인이 돼야 돼. 통해야 돼.

그것만 필요한 거지.

 

그러니까 불교 공부는 다른 거 없어.

경전을 읽고, 무슨 수행을 하는 게 아니고

이미 다 가르쳐 놨다니까.

조금도 부족함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