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0살짜리 아들을 두었는데요
천상천하 유아독존입니다.
자신을 왕으로 생각하며 행동해요.
어른들한테도 존댓말을 안 쓰다 보니까
선생님들이 저를 붙잡고 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제 있었던 일화를 예로 말씀드릴게요.
아들이 하키를 합니다.
연습하러 가기 전에 아들이 하키 스틱과 물을 챙기고
저는 아들을 훈련장으로 데려다줍니다.
그런데 이날 차에서 내려서야 스틱이 빠진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스틱 어디있어?’ 하고 물었더니
자기가 먼저 들어가서 준비할 테니
저보고 집에 가서 스틱을 가져 달라고 해요.
조금 화가 났지만 집으로 스틱을 가지러 갔습니다.
막상 돌아와 보니
아들은 신발끈조차 안 묶고 저만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저에게 신발끈을 묶어 달라는 거죠.
왕은 저리 갈 정도입니다.
그리고는 ‘요구르트가 왜 이렇게 끈적끈적해?’라고 말하는 거예요.
화가 확 올라왔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찾아보면
스무 살까지는 엄마가 끼고 키워야 된다고 하셨는데
제가 아들을 이렇게 키우는 게 맞는 건지 고민입니다.
남편은 아이를 보딩스쿨에 보내서 자립심을 키우자고 하는데
그건 아이를 요양원에 갖다 버리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듭니다.
어느 선택이 아들을 위해서 좋은 걸까요?//
그 아이를 누가 낳았어요?
누가 키웠어요?
그럼 누구를 닮았을까요?
아들의 버릇이 없다면 그건 질문자가 뭔가 잘못해서 생긴 거지
다른 곳에서 생겨날 수가 없어요.
질문자의 설명 속엔 이미 아이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요인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어요.
아이와 학교에 가다가 뭘 잊어버리고 왔는데
아이는 당당하잖아요.
‘안 가져와서 어떡해’ 하며 울지도 않고요.
‘나는 먼저 들어가 있을 테니까 엄마가 좀 갖다 줄래?’라고 하면
‘엄마도 바쁘니까 오늘은 그냥 학교 가라’
이렇게 얘기하면 됩니다.
아니면 ‘그래 엄마가 갖다 줄게. 먼저 가 있어’라고 하면 되지
뭐가 어렵습니까?
갔다 왔는데 아이가 신발끈을 안 묶고 있다가
‘신발끈 좀 묶어줘’라고 하면
‘엄마는 바빠서 가야 하니까 신발끈은 네가 묶어라’ 하고 가면 되죠.
안 그러면
‘오케이 알았어. 내가 묶어 줄게’ 하면 되는 겁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지금 질문자가 하는 행동은
아이의 버릇도 나쁘게 만들고
아이에게 심리적 억압도 주는 거예요.
‘왜 신발끈을 아직도 안 묶었니? 앞으로는 네가 묶어라’ 하고
아이를 야단치고는
결국에는 신발끈을 묶어주기 때문입니다.
‘왜 스틱을 안 가져왔니?’ 하고
야단을 치고는
또 스틱을 갖다 주는 겁니다.
야단을 치면 아이에게 심리적 억압이 생기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면 버릇이 나빠집니다.
질문자는 지금 아이에게 나쁜 영향만 주는 행동을 하고 있어요.
이건 질문자로부터 빚어진 문제이지, 다른 문제는 전혀 없습니다.
제가 ‘아이는 스무 살까지 엄마가 키워야 한다’
이렇게 말한 적이 전혀 없는데,
자기가 자기의 아이를 애완용 동물로 키우고 싶으니까
스님이 스무 살까지 키우라고 했다고
연결시키고 있는 겁니다.
저는 생전 처음 듣는 소리입니다.
저는 ‘아이가 세 살 때까지는 엄마가 키우는 것이 좋다’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이 말은 네 살부터는
반드시 엄마가 키우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부모는 아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보호자로서 보살펴야 되지만,
스무 살이 넘으면 완전히 독립시켜야 된다는 것이
늘 제가 강조하는 거예요.
그리고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아이들의 행동에는 가능하면 관여하지 말고
냉정하게 지켜보는 것이 사랑입니다.
어릴 때는 따뜻하게 감싸주는 게 사랑이고
사춘기 때는 지켜봐 주는 게 사랑이고
스무 살이 넘어 성인이 되면
정을 끊어주는 게 진정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지
스무 살까지 엄마가 끼고 키우며
보살펴야 한다는 얘기는 한 적이 없어요.
질문자는 있지도 않은 얘기를 만들어서
자기 행위를 합리화하고 있어요.
질문자는 지금 아이에게 잘못 대응하고 있어요.
아이를 자꾸 나쁘다고 하는 건 올바르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떻게 나빠질 수가 있겠어요?
조그마한 아이가 경어를 안 쓴다는 건
질문자가 남편에게 경어를 안 쓴다는 걸 말합니다.
아이가 바뀌기를 원한다면
질문자의 행동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남편이 질문자에게
‘구두도 네가 신겨라’, ‘옷도 네가 입혀라’
이렇게 뭐든지 요구를 했든
아니면 질문자가 남편에게 작은 일까지
‘여보, 이거 해주세요’ 하고 요구를 했든
어쨌든 둘 중에 하나가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요구를 하는 그런 분위기 속에
아이가 자랐기 때문에
아이도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아이는 자기가 보지도 듣지도 않는 행동을 할 수가 없어요.
마치 컴퓨터에 입력시키지 않은 자료가
컴퓨터에서 나올 수가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자꾸 아이를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말고
질문자가 반성하고 행위를 고쳐야 합니다.
아이가 스스로 신발끈을 묶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신발끈은 엄마가 매 주기 싫다. 네가 매라'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아이가 울든, 죽는다고 하든, 악을 쓰든
'엄마는 바쁘다. 오늘은 네가 신발끈을 맸으면 좋겠다' 하고
가버리면 됩니다.
아이가 학교를 가든 안 가든
너무 신경 쓰면 안 됩니다.
밥을 차려 주었는데 밥을 안 먹으면
'안 먹으면 치운다' 하고 화를 내면서
밥을 치워버리면 안 됩니다.
'엄마는 회사에 출근해야 되니까 밥을 치울게.
나중에 네가 시간 되면 찾아 먹어라'
이렇게 부드럽게 얘기하고
아이가 나중에 밥을 차려 달라고 하면
'엄마는 일이 있으니까 네가 차려 먹어라' 하고 말하면 됩니다.
만약 아이가 울면 가만 놔두세요.
여러분은 '이게 어디서 울어? 먹으라고 할 때는 안 먹더니!'
이러면서 또 밥상을 차려줍니다.
이렇게 하면 야단을 맞은 아이에게
심리적 억압이 생기고, 아이의 버릇도 나빠집니다.
'배가 고프니? 네가 차려 먹어라.
엄마는 지금 일이 바쁘단다'
이렇게 부드럽게 말해야 합니다.
아이가 굶는다고 할 때도 벌칙으로
'너는 굶어라' 하고 말하면 안 돼요.
'엄마는 오늘 아파서 밥을 할 수가 없단다' 하면서
질문자도 같이 굶어야 합니다.
애가 뭐라고 해도
'네가 찾아 먹어라.
엄마는 아파서 밥을 할 수가 없단다'라고 말해야 해요.
자녀가 문제가 있을 때 자
녀를 직접 때리는 어머니도 있지만
현명한 어머니는 매를 아이에게 가져오라 하고
아이한테 매를 주면서
엄마의 종아리를 때리라고 합니다.
'엄마가 너에게 모범이 못 됐기 때문에
너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엄마의 잘못이다.
그러니 네가 엄마의 종아리를 때려라'
이렇게 말할 때, 아이가 감동을 해서 변화가 오는 거예요.
'이놈, 누가 그리 가르쳤니?' 하면서
매를 갖고 아이의 종아리를 때리면
아이가 일시적으로는 안 하는 것 같지만
엄마가 안 볼 때 또 합니다.
그러니 전적으로 질문자의 잘못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아이를 그냥 이대로 두든지
아니면 아이를 변화시키려면
질문자의 생활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아이한테 '존댓말 해라'하지 말고
앞으로 질문자가 모든 용어를 존댓말로 써야 합니다.
아이는 나에게 반말을 쓰더라도
나는 아이에게 존댓말을 써야 됩니다.
그러면 시간이 흐르면 아이도 존댓말을 쓰게 돼요.
...
그러니 전적으로 질문자의 잘못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아이를 그냥 이대로 두든지
아니면 아이를 변화시키려면
질문자의 생활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아이한테 '존댓말 해라' 하지 말고
앞으로 질문자가 모든 용어를 존댓말로 써야 합니다.
아이는 나에게 반말을 쓰더라도
나는 아이에게 존댓말을 써야 됩니다.
그러면 시간이 흐르면 아이도 존댓말을 쓰게 돼요.
(제가 아이한테도 존댓말을 써야 합니까?)
아이가 영어로 말하기를 원하면
질문자도 영어를 써야 되잖아요.
나는 한국말을 하면서 아이한테만
'너는 영어로 말해라' 이러면 안 되잖아요.
아이가 영어로 말하기를 원하면
내가 영어를 써야 되듯이
아이가 존댓말을 쓰기 원하면
나도 존댓말을 써야 합니다.
존댓말이라는 게 특별히 어려운 게 아니에요.
그냥 말일뿐입니다.
내가 존댓말을 써야 아이가 존댓말을 배웁니다.
아이에게 존댓말을 쓰라고 명령할 게 아니라
내가 모든 용어를 존댓말로 쓰면 됩니다.
집안에서 부부끼리도 존댓말만 쓰면
아이는 존댓말 빼고 다른 언어를 모릅니다.
집에서부터 부부지간에 반말을 막 하고 사니까
아이도 그대로 배우는 겁니다.
보딩스쿨에 보내는 것도 당분간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보딩스쿨에 보내보고 좋아지면 계속 놔두고,
안 좋아지면 또 데려와서 다른 방법을 쓰면 됩니다.
질문자는 일단 못 보낼 겁니다.
보냈다가도 아이가 힘들다고 하면 바로 데려올 사람이에요.
아이를 하나의 사람으로 대하는 게 아니고
애완용 동물처럼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행동하면 아이는 절대 고쳐지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엄마가 항상 갖다 주니까 '엄마, 가져와' 하는 겁니다.
...
내 말을 안 듣는다고 갖다 버리듯이 보내면 안 된다니까요.
아이의 문제를 자기가 책임지지 않고
남의 손에 맡겨서 고치겠다는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일단 한번 보내보고, 돌아와서도 집에서 아이가 계속 반말을 하면
그냥 반말을 쓰도록 두면 돼요.
제가 시카고에 어느 교민이 살고 있는 집에 갔는데요.
엄마가 가게를 하니까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없어서
친정어머니를 모셔와서 좀 돌봐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할머니가 '얘들아, 밥 먹어라' 해도
아이들이 밥을 안 먹고 노니까
시골 할머니가 '너 밥 안 처먹을래? 밥 처먹어'
자꾸 이렇게 얘기했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스님이 그 집에 갔는데, 아이들이 스님한테
'스님, 밥 처먹어' 이렇게 말했어요.
아이들이 그런 말을 어디서 배웠겠어요?
누가 집에서 그 말을 쓰니까 배운 겁니다.
아이는 그 말이 나쁜 말인지 좋은 말인지 개념이 없고
할머니가 쓰니까 따라서 쓰는 거예요.
질문자의 아이도 질문자가 그 말을 썼기 때문에 따라서 쓰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반성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에게 어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자꾸 아이를 나쁘다고 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아이가 왜 이러지?' 하면서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의 태도와 삶의 방식을 바꿔서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변화가 없다면, 두 가지 원인이 있어요.
-첫째, 아이가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면 잘못된 버릇 때문입니다.
-둘째, 아이에게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부모가
자신의 아이에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아동심리를 전공한 의사에게
전체적인 평가를 받아야 해요.
보딩스쿨에 보내는 게 핵심이 아니고
치료를 먼저 해야 됩니다.
만약 아이가 정신적으로는 이상이 없고 버릇이 잘못 든 문제라면
다른 교육을 받게 하는 게 우선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항상 아이의 입장에서 무엇이 아이에게 도움이 되느냐를 살펴야 해요.
내 입장에서 내가 보고 싶으니까 데려오고
내가 귀찮으니까 보내는 것은 부모가 아닙니다.
자식을 위해서 부모가 있지
부모를 위해서 자식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아이의 입장에서 부모가 보살피는 게 좋다면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보살펴야 됩니다.
아이가 보딩스쿨에 가서 배우는 게 좋다면
내가 아무리 보고 싶어도
아이를 위해서 내 아픔을 참아내야 됩니다.
그게 부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대부분 자기감정을 우선합니다.
어떤 여성은 이혼을 했는데
아이를 5일 동안이나 못 봐서 죽겠다고 하면서 울어요.
그건 부모를 위해서 자식이 있는 거예요.
부모가 아이를 보고 싶으면
아이가 그 욕구를 채워주는 것을 부모의 권리라고 생각해요.
물론 법적으로 엄마의 권리일 수는 있지만
그것은 자식을 위하는 마음이 아니고
자기 욕심입니다.
나와 떨어져 있는 게 자식에게 도움이 된다면
내가 아무리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아도
자식을 위해서 내가 인내를 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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