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적으로, 구조적으로 우리는
고통 속에 살도록 태어났어요.
우리의 삶 자체가 ‘집짓는자’예요.
그럼 여기서 이 불붙은 이 집을 빠져나오든지
‘부수는자’는 과연 누구냐?
이거를 기독교적으로는 ‘메시아’라고 그러고 ‘구원자’라고 그러고
불교적으로는 ‘해탈자’라고 하죠.
불교적인 가르침에서의 ‘집짓는자’를 ‘부수는자’는
말하면 진리를 발견하는 자죠.
그리고 진리를 보는 자, 진리와 하나 되는 자를 말하는 건데
불교에서는 정견, 바른안목을 말해요.
즉 삶 자체는 좋거나 나쁜 게 아닌데
마음이 [연기법] 속에서 [망상분별]을 만들어서
좋다 나쁘다에 자꾸 [분별]하고 있어서 [고통] 속에 빠져요.
예를 들면
개 두 마리가 싸우고 있어요.
개 두 마리가 막 서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어요.
길 가는 사람은
“그냥 개 두 마리가 사생결단으로 싸우네” 하고
아주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갈 수 있는데
개 주인이 되면 이게 얘기가 달라집니다.
내 개가 지금 자칫하면
죽냐 사냐 하는 문제가 걸리면 어떻게 돼요?
몽둥이라도 들고 가서 상대편 개를 쫓아내죠.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개가 둘이 싸우고 있다.”
그런데 만약에 내 마음이
‘저 개가 내 개다’라는 분별이 딱 시작되는 순간
처음에는 그냥 ‘싸우나 보다’ 했는데
가만히 보니까 한 놈이 우리 집 개야.
이렇게 되면 바로 내 마음이 어떻게 되냐 하면
좀 전의 평정이 무너지고, 바로 쫓아가거나
어떻게 저걸 뜯어말리거나
상대편 개를 공격하거나 뭐 이렇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러한 어떤 개입이나 어떤
“아이고 큰일 났네”라고 하는 마음이
그게 어디서 시작됐냐 하면
내 분별에서 시작된 거예요.
또 만약에 이건 저도 직접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뉴스에 강화도 어디에서 젊은 가장들이 아이들하고 불타 죽었다는 거예요.
“어 그런가 보다” 했는데
한 30분 뒤에 전화가 왔어요. 조카한테서.
그게 내 조카 사위라는 거예요.
실제로 제가 7년 전에 있었던 일이에요.
그러니까 그전에
“그런가 보다” 하는 평정심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마음으로 변할 수 있잖아요.
자, 그렇다면 이런 것들은 다 무엇에 기반하고 있냐면
[분별심]에 기반하고 있어요.
나, 내 것, 내 주변.
그래서 이거를 우리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그래요.
사람들은 왜 그러냐 하면
그래야 자기가 행복하거든.
그런데 사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다가는 어떻게 되죠?
망하기 딱 십상이죠, 그리고 사기당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사기당하는 이유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 때문이에요.
“이 돈 투자하면 10배로 번데”
그럼 그것만 믿어요.
대부분은 사기죠.
이렇게 분별심에 의해서 자기가 속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분별심을 안 버려요.
끝까지 분별심을 쫓아다녀요.
왜 그러냐면
에고가 나를 끌고다니는 거예요.
“내가 더 잘 돼야 되는데, 더 돈 벌어야 되는데
더 행복해야 되는데, 더 좋은 걸 누려야 되는데”
그런데 문제는 바로 고통의 근원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분별은 반드시 좋고 나쁜 것이 같이 다닌다고 내가 했잖아요.
좋은 것만 누릴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이 프로그램에서 벗어나는 길은 명백해졌어요.
뭘까요?
좋고 나쁘다고 내가 판단 분별하는
이 [마음의 본질을 보는 거]예요.
“이게 과연 좋고 나쁘다는 게 뭔가?
누가 지금 이 짓을 하고 있나?”
이거를 철저하게 보는 거예요.
그 마음이 그렇게 일어난 생각, 충동, 감정, 느낌을 무작정 쫓아가는 게 아니고
그 마음을 돌이켜 보는 거예요.
이제 이거를 부처님은 [팔정도]에서
첫 번째 [정견]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보통 사람은 그런 분별이 일어나면 분별을 쫓아가는데
이 공부하는 사람은, 또는 깨어 있는 사람은
그거를 다시 돌이켜봐요.
“이게 뭔가?”
그때 우리는 모든 일이 일어나기 이전에
평등한 마음의 자리를 볼 수가 있어요.
이거는 여러분들이 ‘평등하다’라고 하는 게
무슨 바보 천치나 치매의 상태를 말한 것처럼 오해하실 수가 있는데
그게 아닙니다.
이거는 정견을 하면
여러분이 여태까지 자기가 보지 못했던 마음의 차원이 열리게 돼요.
여태까지는 우리는 흑백 논리 속에 살았는데
흑백의 본질이 뭔지를 보게 된다고요.
흑이라고 하는 게 별것 아니고
그냥 “내가 까맣다고 인식한 의식작용이고
백이라고 하는 건 하얗다고 인식한 의식작용에 불과하다.”
둘은 다 의식의 작용에 불과하다라는 걸 보게 되는 거예요.
모든 것은
의식이 이렇게 순간적으로 분별하고 있다라는 걸
보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매 순간 의식이 휙까닥휙까닥 하는 것을 보게 돼요.
그래서 나중에 익숙해지면 삶 자체가
마치 고요한 바다에 저녁노을이 있는데
그 파도에 황금빛이 비치면 어떻게 돼요?
파도 잔물결들이 반짝반짝하고 빛나죠.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그 파도의 빛처럼 보이기 시작해요.
그래서 살아있는 채로 니르바나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게 지복 또는 해탈, 열반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압니다.
왜 슬픈 일이라는 걸 모르겠어요.
다 알죠, 아는데 더 본질을 보는 거예요.
슬픈 감정에 빠져서 “아이구나” 하는 게 아니라
슬픈 감정도 알지만 그 뿌리를 보는 거예요.
뿌리에는 뭐가 있냐면
[순수하고 맑고 투명한 의식]이 있어요.
그게 살아서 활동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보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자기란 존재의 근원을 보실 수가 있어요.
여러분의 [존재의 근원]은 뭐냐 하면 [의식]이에요.
여러분은 의식 없이 뭘 인식할 수가 없어요.
제가 이렇게 하면
이 순간 의식이 어디 있어요?
이 막대기도 의식이죠.
의식 위에 막대기란 이름의 분별이 붙은 거예요.
의식 없이 이게 막대기라는 걸 어떻게 알아요?
그다음에 이게 이렇게 움직이는 것도 의식이에요.
이 막대기를 분별하기 위해서
막대기의 배경에 있는 이 허공, 이것도 의식이에요.
그러고 보니까 의식이 아닌 게 없어요.
전부 다 의식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이 의식은 어디에 기반을 두고 있어요?
여러분의 생명 없이는 의식은 있을 수가 없어요.
[생명활동]이 [의식]이에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생명활동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근원은
여러분이 아는 말로 제일 가까이하면 [생명]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이 아는 생명이라는 건
여러분은 무엇으로 알고 있냐면
생각과 느낌을 알고 있는 거예요.
진짜 진리적 생명은 그걸 넘어서 있어요.
그걸 보는 게 깨달음이에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볼 수 있느냐 하면
정견을 여러분이 정확히 하면
미세하게 여러분의 생각과 감정과 느낌이
조작하는 것들을 볼 수 있어요.
여러분의 생각과 감정의 느낌이 자꾸 뭔 짓을 하고 있어요.
그 짓을 넘어서야 돼요.
그 프로그램을 넘어서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은 만들어진
한마디로 주어진 정보에 의해서 살던 피조물의 신세에서
주어진 정보 이전에
모든 것을 조작하고 만드는 자를 만나게 돼요.
그래서 정견이 유일한 깨달음의 해법이에요.
그러면 그 [의식]이라는 말을 다른 걸로 바꿔봅시다.
‘보는 자리’가 있어야 돼요.
보는 자리라고 바꿔봅시다.
지금 보는 자리가 있으니까
이 방 안 전체 시공간이 인식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의식의 다른 이름은 [보는자]예요.
여러분이 저를 보고 계신다면 여러분은 ‘보는자’로 있는 거예요, 지금 .
의식이란 말 대신에 ‘보는자’라고 해봅시다.
이제 다른 말로 또 바꿔볼까?
여러분은 저를 보고 알고 있어요.
저 사람이 누구라는 걸.
그러면 이제 ‘아는자’라고 해봅시다.
여러분은 이제 동시에 또 ‘아는자’야. 그죠?
‘아는자’이기도 하고 ‘보는자’이기도 했는데
내가 왜 이렇게 말을 바꾸냐 하면
여러분들이 의식을 하면 또 자기가 아는
의식이라는 선입견, 생각 감정에 또 떨어지기 때문이에요.
너무나 번개같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걸 걷어내 주려고 이렇게 다른 말을 하는 거예요.
‘아는자’인 동시에 보는 자예요. 그렇죠
‘느끼는자’는 안 될까요?
여러분 느낄 수 있어요.
‘느끼는자’도 되죠.
자 ‘분별하는자’는 돼요? 안 돼요?
되죠.
저 사람이 누구다. 그죠?
그러면 여러분 도대체 여기에 뭐가 있길래
‘아는자’도 돼, ‘보는자’도 돼, ‘분별하는자’도 돼, ‘의식’도 돼, ‘생명’도 돼.
이거 뭐야? 도대체
이거 뭐라고 말해야
이거를 정확히 표현할 수가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말로 표현해서
이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게 거꾸로 된 시도예요.
왜냐하면 이게 먼저 있었고
그다음에 말이 만들어졌고 우리가 배웠거든요.
근데 우린 거꾸로
이걸 알겠다고 말을 붙들고
생각이라는 건 말에 의지해서 단어를 배열하는 게 생각이에요.
그래서 생각으로 자꾸자꾸
느낌도 지기가 여태까지 느껴서
가진 정보 안에서 어떤 느낌으로 찾으려고 들어요.
이래서 여러분은 깨달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 짓을 하는 한 영원히 못 깨달아요.
안 되는 거 가지고 되려고 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이게 저절로 딱 드러날 때까지
내가 일체 중단해야 돼요.
그리고 오로지 유일한 방법, [정견]만 해야 돼요.
왜냐하면 이 자리가 바로 [정견] 그 자체이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부처님의 안목이 불안
근데 불안만 있는 게 아니고
법안도 갖고 계시고 혜안, 심한, 육안 다 갖고 계시죠.
그래서 오안이라 그래요.
제가 가장 당부하는 것이
“이것은 무엇이다”라는 짓을 중단해야 돼요.
“이것은 무엇일까?”
자꾸 그거 가지고
수단이 뭐냐 하면, 생각, 느낌 아니면 뭐 이런 것들이에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진리
이 자리에서 나온 그림자는
하잘 것 없는 정보에 불과한 껍데기를 가지고
본질을 붙잡고 묘사하려고 들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여태까지 우린 그렇게 살아왔지만
이제 거꾸로
“그럼 이걸 어떻게 할 거냐?”
어떻게 할 거라는 생각을 놔야 돼요.
왜냐하면 어떠한 시도도 이것을 붙잡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모든 걸 다 내려놓으면
여러분이 이미 그거예요.
왜 그런가 봅시다.
여러분의 삶이 여태까지 살아온 게, 자기가 살았어요?
뭔가 자기가 알지 못할 힘이 여러분을 살려왔어요?
후자거든요.
여러분이 알지 못할 힘이 여러분을 살려온 거예요.
아침밥 먹은 것도
지금 내가 소화시키고 있는 사람은 없어요.
[자기도 모르는 섭리]에 의해서 소화되고 있고
피도 내가 돌리고 있는 게 아니에요.
자동으로 지금 돌아가고 있어요.
여러분이 숨을 일부러 쉬고 있지 않아요.
저절로 쉬어지고 있어요.
이 눈앞의 세상이 여러분이 보고 있는 게 아니에요.
저절로 나타나고 있어요.
저를 안 보려고 해봐요.
여러분이 눈 뜨고 있는 한 저는 보입니다.
여러분이 보는 게 아니라고
보여지고 있어요.
안 들으려고 해봐요.
소리가 들려지고 있어요.
이게 뭐죠?
이미 이거라고.
이미 여러분이 이거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자꾸 이 몸이, 눈코귀입이 보고 듣고 있다
이렇게 착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그런 얘기를 자꾸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꿈에서 자기 꿈을 보는 자는 누구냐?
눈은 감고 잘 자고 있는데
꿈에서 나타난 이 세상을 보고 있고
그 이미지를 보고 있는 그 눈은 무슨 눈이냐? 이거예요.
또 꿈에서 저는 몇 번 얘기했는데
파가니니가 나를 찾아왔고 앞에서 기가 막힌 데블스 트릴을 연주 해.
내가 하도 너무 노래가 좋아서
그 악보 좀 파가니니한테
악보 좀 빌려달라고, 악보 첫 소주를 내가 외웠다니까요.
이거 내가 자각몽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럴 리가 없잖아요.
생시에 파가니니가 어떻게 날 찾아와
죽은 지 얼마나 됐는데.
그러니까 저 파가니니 선생, 잠깐 좀 악보 좀 들려달라고 그래서
내가 그걸 외웠다는 게, 꿈 깨면...
그러면 꿈속에서 그 소리가, 그 기가 막힌 천상의 선율이
과연 이 내 귀를 통해서, 공기 중의 매질을 통해서
달팽이관을 통해서 들어왔습니까?
이게 도대체 뭐냐고?
여기 이런 뭔가가 우리가 알지 못할 차원에
뭔가가 이렇게 딱 여러분 눈앞에 있잖아요.
근데 우리가 이걸 왜 못 알아보느냐면
이게 바로 자기 자신하고 딱 붙어 있기 때문에 못 알아보는 거예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온 것은
우리의 삶을 살아온 이 삶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는 말로 그냥 ‘삶이다’ 하지만
이 [삶의 존재의 기반]이 뭐냐 하면
바로 [참나]고 [생명]이에요.
생명 없이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와
그 생명이라는 것 자체가, 기반이 이 참나라고, 진리라고요.
진리가 없이 어떻게 생명이 나와.
그래서 우리는 이 삶이라는 생명, 삶 자체가 진리의 발현이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가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이 생겨났다는데
그 문제가 있어요.
몸이 생겨났는데 만약에 여러분 봅시다.
몸이 생겨났는데
몸이 자기 스스로를 보호 관리하는 마음이 없으면
즉 분별 능력이 없으면
저 앞에 원시시대에 무슨 맹수가 나타났는데도
“저게 맹수인지 마누라인지..” 그러고 그냥 앉아 있으면
오늘날 인류가 존재할 수가 없어요.
다 호랑이 밥이 됐을 테니.
그러니까 나쁜 게 나타났으면 튀어야 되고
좋은 게 나타났으면 가서 먹을 거면 따와야 되고
무슨 그거로 집을 짓는 거라면 거둬서 집을 지어야 되고
뭐 이래야 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분별 능력이 있어야 살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분별이라고 하는 것은
모험이라는 자동차를 드라이빙하는 매니지먼트, 매뉴얼이라고요.
분별 자체가 나쁜 게 아닌데
이 분별이 만든 정보
분별은 정보를 만들어서 마음속에 그거를 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번 무엇을 경험하면
그것에 입각해서 다음에 그것을 어떻다고 판단하기 시작해요.
이게 문제인 거예요.
그 분별에 떨어져서 분별심을 만들어요.
분별 행위가 분별심을 만든다고.
그래서 그 분별심 속에서 분별을 계속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분별을 하다 보면
반드시 이 분별은 뭘 만드냐 하면
‘나’라는 주체를 만들어요.
왜냐면 행위가 있으려면
행위만 있는데 주체가 없고 대상이 없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
그러니까 얘는 주체도 만들고, 대상도 만들어.
그래서 우리가 분별 세계에 빠지는 거예요.
근데 깨어난자는, 깨달은자는
주체도 없고, 대상도 없고, 분별만 있어요.
그래서 분별심이 안 만들어지는 거예요.
설사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순간적으로 벗어 나와요.
매 순간, 분별심에 빠지지 않는 거야.
마치 돌멩이를 호수 위에다 옆으로 던지면
돌맹이가 그 물수제비 뜬다고 그러죠.
물에 안 빠지고 어떻게 돼요?
표면만 탁탁 치면서 이렇게 지나가죠.
마치 이와 같아요.
또는 파도타기 하는 서퍼와 같아요.
물에 안 빠져.
모든 고통의 파도 위에서 파도타기를 해요.
물에 젖지 않고, 양복 입고.
그게 부처님이 말씀하신 깨달음이에요.
그렇다면 깨달음의 본질은 이런 거고
여기서 분별에서 벗어나야
정확히 말하면
분별심에서 벗어나고 자유로워져야만
해탈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역사적으로
어떤 불교든, 신두교든, 아니면 어떤 다른 종교가 됐든 간에
무슨 수도, 수행, 이런 것들은 끝없이 있어 왔어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불교적으로 보면은
위빠사나 무슨 또는 참선, 관법, 또 호흡법
여러 가지 수행법들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들을 우리가 수행을 한 목적은 결국은 뭐냐 하면은
‘나’라고 한 에고
즉 식스존이 만든 오온, 생각, 감정, 느낌 그리고 의지, 분별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거예요.
벗어나서 불붙는 집에서 일단 벗어나서
그래서 나의 본질을 발견하자는 거예요.
이게 깨달음이에요.
그래서 참선 같은, 우리나라 대승불교를 보면
위빠사나 같은 소승불교는
아라한 밑에 사다함, 아나함, 수다원 이렇게 또 계급도 만들고
또 대승불교도 보면 무슨 심지어 화엄경에서는 보살 50지까지 만들고
뭐 수행의 경지가 어마어마하잖아요.
그런데 참선에서는 뭐라고 하냐면
직지인심이라거든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고 하거든
단 한 방에 깨달을 수 있다
이런 말까지 한단 말이에요.
그럼, 누구 말이 맞는 거예요?
즉, 어느 말도 맞는 게 아니고
다만 자기가 본질적인 것만 보기만 하면
그러면 누구나 해탈을 얻고 깨어날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 대승불교도 직지인심이면 즉신성불이다
이렇게 얘기를 했지만
사실 대승불교 8만대장경이 얼마나 많은지
말로는 직진인심이고 일초직입여래지라고 하지만
사실 대승불교 수행해서 일초직입여래지 하신 분이 거의 없잖아.
아마 육조 혜능 정도
‘금강경는 소리 듣고 단박에 깨달았다’ 뭐 이 정도지
그분도 나중에 또 스승인 홍인대사가
한 번 더 설법을 해줘서 비로소 확연해졌다, 이런 얘기를 할 정도니까
일초직입여래지가 없는 거예요, 사실은.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많은 무슨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안내하기 위한 시도들은 있어왔단 말이죠.
그래서 비올라 마음학교는
그걸 굉장히 현대적으로 좀 바꿔본 거예요.
그래서 식스존은 뭐냐 하면
우리가 빠져 있는 이 6가지 미혹의 영역이
그걸 우리는 ‘나’라고 여긴다고요.
생각을 ‘나’라고 여기고
감정을 ‘나’라고 여기고
감각적인 걸 ‘나’라고 여기고
시간 공간을 내 몸이 살고 있는, 내 몸과 딱 붙어 있는
하나의 근거지로 여기고
그다음에 인간관계에서 몸부림치고 있고.
근데 이것들이 다 허망한 환상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식스존을 먼저 가르치고
식스존을 넘어서면
그다음에 바로 이 직지인심 즉견성불 이거를 가르치는 거예요.
현대적인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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