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인선원

10분經 | 윤회, 전생, 업. 이런 게 없다고 가르치는 게 아니다 | 월인선원

Buddhastudy 2024. 6. 27. 19:24

 

 

/마음으로 짓고서

몸으로 그 업보를 받나니

남을 원망하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마음으로 짓고 몸으로 그 업보를 받는다

예를 들면 수도 없이 많은데

보통 불교에서 신구의 삼업이라고 그러잖아요.

이 신구의 삼업이라고 그러는데

 

하여튼 이 업이라고 하는 것은

분별망상을 업이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그 업 뒤에 이 장이라고 붙은 이 한자의 뜻은

장애 할 때 장이거든요.

업장 할 때는.

 

그러면 이 업이 장애가 된다이 말은

당연히 우리 본래 마음이라고 하는 이거를 깨닫는데

깨어나는 데 장애가 되는 거죠.

그래서 업은 분별 망상이에요.

 

그러니까 이것도 조금 구체적인 사례를 제가 말씀드리면

저희 선원에 연세가 꽤 많이 드신 보살님이에요.

보살님이 어찌어찌해서 저희 선원에 오셨어요.

물론 그 보살님이 좋아하는 어느 분 소개로 오셨는데

근데 법회 끝나고 같이 밥 먹으러 가면서, 또는 차 마시면서

저한테 늘 물었던 게

한 몇 년 물었어요.

전생의 업이라고 하는 게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제 본문을 들어보니까

전생의 업에 대해서 그렇게 구체적으로

절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있다고 잘 얘기를 안 해.

 

업이 있다 그러면

지금 분별 망상하는 그게 업이다

뭐 이렇게만 얘기하니까.

 

그리고 또 묻는 게 있으셨어요?

윤회라고 하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특히 윤회에 대해서 참 많이 고민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저한테 계속 그걸 물으셨어요.

물을 일이 있으면.

 

오랫동안 절을 다니시면서 또는 불교 공부를 하시면서

그 윤회라고 하는 게 있다라고 하는 이 사실을 믿으시는 거고

전생이 있다라고 하는 어떤 이 사실을

오랫동안 믿으셔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근데 참 어떤 때는

그렇게 자기가 믿고 있는

사실이라고 여기고 있는 그 믿음 하나가 깨지고 사라지는 데

참 오래도 걸린다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여튼 최근에 그 부분이 해결이 되셨더라고

제가 보니까

 

물론 법문을 들어보시면

윤회가 없다’, 이쪽으로 듣기가 더 쉬울 겁니다.

하도 윤회가 있다고 하니까

윤회 같은 건 없어

이렇게 제가 얘기할 때도 있을 거고.

 

아니 결국은 똑같이 말하잖아요.

불교는 윤회가 있음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고

윤회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는 거지

윤회가 있음을 가르친다 그러면

똑같이 고를 얘기한다고 해서

고 있음을 가르친다, 이렇게 하면

그건 뭐 종교도 아니잖아.

고가 있으니까 어쩌라고.

그냥 있으니까 있는 대로 살아라 이 말이에요.

불교는 고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고

윤회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고

업이 있다고 한들 업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는 거거든.

 

그러니까 윤회니 고니 업이라고 하는 것은

다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진 환상과 같은 거다.”

이렇게 가르치거든, 불교는.

환상과 같은 것이다고 다 가르치는데

자꾸 뭐가 있다 그러고

뭐 전생이 있다고 그러고, 윤회가 있다고, 그러고 업이 있다고 그러고

그러니까 고집하는 거예요.

있다 없다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는데

자꾸 자기는 있다고 하면서

그걸 불교라고 해버리니까.

 

제 입장에서 봤을 때는

아니 왜 저걸 불교라고 하지?”

불교는 있고 없고에서 벗어나라고 그러는 거잖아.

 

그러니까 업이 있든지 없든지

자기가 업이라고 하는 걸 느끼고 있으면

그걸로부터 벗어나라고 가르치는 거거든.

 

벗어나서 보면은

업이라고 하는 것은 환상과 같은 거예요.

실체가 없었던 거야.

그냥 본래 부처였다니까.

우리 모두가 그냥 본래 부처였어요.

 

근데 희한하게도 부처가 허망한 생각에 매여서

그걸 줄 없는 줄에 자기가 묶인다고 그러죠, 자승자박.

이 허망한 생각에 자기가 묶여서

그걸 있다고 계속 고집을 하고 있는 거야.

 

근데 딱 깨어나서 보니 묶인 적이 없어.

업이라고 할 것도 없고

윤회라고 할 것도 없고

전생이라고 할 것도 없어.

깨어나서 보니

다 자기 생각이었을 뿐이야.

 

그렇다고 제가 없다를 가르치는 사람이냐?

아니에요.

벗어나라고 가르치는 겁니다.

뭐가 있든 없든 그걸로부터 벗어나라.

벗어나야 자유로워지니까.

 

그걸 적멸이라고 하고, 열반이라고 하고

이 측면으로는 해탈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묶임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하는 겁니다.

 

반야심경이나 반야경에서는 바라밀이라고 그러죠.

벗어났다 이 말이에요.

건너버렸다.

고에서, 윤회에서, 업에서 건너버렸다는 거야.

 

그럼 더 이상 자기 본래 마음이라고 하는 걸

가로막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장애되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걸 반야심경에서 무장애라고 딱 써놨잖아요.

 

더 이상 뭐가 장애 되는 게 아무것도 없어.

여기는 뭐라고 할 게 아무것도 없는데

뭐가 장애가 되겠습니까?

뭐 업이 침범할 수가 있겠습니까?

윤회가 침범할 수 있겠습니까?

전생이 침범할 수 있겠습니까?

귀신도 침범을 못하죠, 여기에는.

귀신도 침범을 못 하니까 또 뭐라고 써 있습니까?

무외(불도를 닦는 데 부닥치는 온갖 장애에 대하여 두려움이 없음)라고 딱 써놔버리잖아.

뭐 장애될 게 있어야 무슨 두려움이 있지.

 

참 배움이라고 하는 게

물론 배운다고 해서

다 자기가 그 틀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 많은 걸 우리가 배우고 익혔지만

그게 다 내 틀이 돼 있지 않아요

자기가 딱 옳다고 여기는 딱 집착하는

그게 내 틀이 되는 거지.

 

예를 들어

전생이 있다.

그건 뭐 사연이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개인적으로는 전생이 없다고 그러면 너무 억울해.

뭐 이런 사연들이 있을 거예요.

윤회가 없다고 그러면 너무 억울해.

뭐 이런 사연들

꼭 이 사연만 있지는 않겠지만.

 

사연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이 개개인의 삶을 우리가 이야기를 해보면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람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어떤 이유, 사연은 다 있죠.

 

그렇다고 우리가 그 사연에 매어서 끝내 고통받으면서 살아야 됩니까?

어쨌든 그 사연이라고 하는 개인사라고 하는 걸로부터도

우리가 훌쩍 뛰어넘어야 될 거잖아요.

그 사연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될 거 아니야.

 

그게 해탈이에요.

그게 해탈.

자기를 묶고 있는, 자기 발목을 잡고 있는

그 모든 걸로부터 벗어나버리는

내 발목을 잡고 있는 모든 것이 벗어나면 사라지는 거니까.

벗어난다라고 하는 건

그게 사라졌다는 말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사라진 측면을 얘기할 때는 적멸열반이라고 얘기하는 거고

거기서 벗어난 측면을 얘기할 때는 해탈이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적멸과 해탈은

똑같은 거를

이 측면 저 측면에서 표현하는 말일 뿐이야.

 

그러니까 사라졌다 해도 좋고, 벗어났다 해도 좋아

건넜다 해도 좋고

모두 다 멸도시켰다 해도 좋아해요.

 

그 모든 장애가

그게 사연이든 옳다고 하든

그 모든 장애가

다 장애거든.

자기를 묶고 있는 장애들이에요.

 

그 모든 장애가 사라질 때는

일시에 사라집니다.

그냥 곧장 사라져요. 곧장

곧장 사라지는 겁니다.

 

근데 희한해.

그게 사라지고 나면

뭐가 보이냐 하면은

본래 나를 묶고 있었던 건 아무것도 없었어.

본래 자기를 가로막고 있었던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이 측면 때문에 모든 중생을 일시에 다 제도 시켰지만

제도 시키고 보니까

제도 된 중생이 하나도 없더라 이 말을 하는 거예요.

 

본래 중생이 없는데 어떡해?

본래 중생이 없었다니까.

자기가 이 허망한 생각을 집착해서

중생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을 뿐이지.

그건 중생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지

중생이라는 사실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부처가 중생 노릇 하고 있었던 거지.

 

자기가 부처인데

중생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야.

착각한다고 해서 본래 부처인데, 부처가 바뀌겠습니까?

이 부처는 안 바뀌어.

내가 착각 좀 한다고 부처가 바뀌어?

 

예를 들어서

내가 사람인데, 내가 소라고 착각하고 있어.

그렇다고 사람이 소가 되지는 않잖아.

그런 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본래 우리 이 마음은 그냥 깨끗하고, 텅 비고

뭐라고 할 게 아무것도 없어.

어떤 것도 장애가 없어요.

어떤 거에도 오염되지 않기 때문에.

 

이걸 우리가 성품이라고 그래요.

진여자성이다,

이런 성품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겁니다.

진여자성인 이 성품을 우리가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도라고 표현하고, 깨달음이라고 표현하고, 실상이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 하나는 누구나 다 가지고 있죠.

그리고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고

이거 하나를 다 쓰고 있다니까 누구든지.

 

근데 자기 스스로만

자기가 중생이라고 착각을 하니까

안타까울 일인 거죠.

 

자비심은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소나 곰이나 말이

사람 되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데

사람이 안 되는 모습을 보고

자비심을 내는 게 아니라니까.

그건 어차피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낼 마음이 없어.

그냥 헛된 노력을 하고 있구나이렇게 돼.

 

그게 뭐하고 똑같냐면

수행을 통해서 부처되려고, 깨달으려고 하는 사람 보면 딱 그거예요.

소나 말이나

애쓰고 노력을 해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그런 거하고 비슷해.

 

근데 본래 부처인데 희한하게 무슨 약을 먹었는지는 모르겠어.

무슨 약을 먹었는지는 모르지마는

자기가 중생이라고 착각해서 막 애를 쓰고 있으니까

그게 안타까울 뿐인 거지.

 

마음으로 짓고서 몸으로 그 업보를 받는 거는

그런 분별 망상 속에 있을 때는

뭘 해도 그렇습니다.

뭘 해도.

 

어떤 생각을 하고

좋은 생각을 하든, 좋지 않은 생각을 하든

다 그 업을 받아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분별 망상할 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