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그라운드(2024)

[신박한깨달음] 20세기 최고의 영능력자가 전하는 영적 성장 방법과 인생의 목적|신과 함께

Buddhastudy 2024. 7. 2. 18:39

 

 

미국이 낳은 20세기 최고의 영능력자로 불리는 에드가 케이시는

최면 상태에서 무의식으로 말하는 리딩을 통해

자신도 전혀 알지 못하는 여러 일들에 대해

놀라운 정보를 제공했다.

 

그는 난치병 환자들의 치료법을 알려주면서

결코 치료비나 보상을 받지 않았고

평생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때는 1910109일 뉴욕타임스에는

<글도 못 읽는 사람이 최면 상태에서 의사가 되다>라는 제목으로

에드가 케이시에 대한 기사를 싣자, 미국 전역이 들끓었다.

 

의사와 과학자들은 비판을 쏟아냈지만

수천 명의 난치병 환자들은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윌슨 대통령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에드가 케이시에게 리딩을 요청했고

아인슈타인도 그에게 리딩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그의 신비한 능력을

여러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최면 상태에 있는 케이시에게 적절한 질문을 하면

고차원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많은 사람들이 케이시에게 질문했다.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케이시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생활을 보내면서 영적으로 성장하여

궁극적으로는 신의 공동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라고 대답하면서

자신의 최대 업적은

이 책을 세상에 남긴 것이라고 했다.

 

오늘은 에드가 케이시 가르침의 핵심을 담은 책

<신과 함께>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영혼의 속성은 무엇인가?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의 일과 가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특정한 나라, 특정한 지역에서 살고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그와 같은 상황과 시간 및 장소까지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바로 이곳에서부터 봉사를 시작해야 한다.

미소와 배려가 담긴 말, 치유에 대한 생각 등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으며 베풀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인생은

마음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오랜 세월 동안 영적 힘은

현실 세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여겨져 왔다.

 

우리는 영적인 능력을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내면에 눈을 뜨면 물질세계를

보다 의미 깊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 막 깨닫기 시작했다.

 

하나하나의 시련에 맞서 극복해 나감으로써

우리는 성장한다.

그 모든 각각의 경험은

우리를 시험하고 단련시켜 강하게 만들기 위한 기회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면 우리에게 선이 돌아온다.

그것은 선이 선을 부르기 때문이지

보상으로서 선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어떤 법칙의 결과로서 돌아오는 것이다.

그 결과란 영적 이해이자 영적 성장이다.

 

우리의 영혼 속에는 신의 속성을 전부 가지고 있다.

자신의 존재를 잃지 않고

또 신과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이해할 수 있도록

그것을 기다리고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케이시의 리딩에 의하면

욕구는 의지에서 비롯되며, 육체에도, 영혼에도 속해 있다.

욕구는 그것을 일으키는 힘에 의해 그것이 향하고 있는 영역에서 활동한다.

욕구는 진화의 토대이자 생명과 진리의 근원이다.

그러나 욕구는 또한 지옥의 문으로 향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 욕구 때문에

영혼, 육체, 정신에 있어서 종종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욕구는 우리의 육체적 자아와 영적 자아를 움직이는 힘이며

의지는 그 욕구의 방향을 조정하는 힘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욕구를 통해서 자신의 현재 상황을 만들어 왔다.

우리가 육체적, 정신적, 혹은 영적으로 어떠한 상태에 있든

그 상황을 만들어 온 것은 우리 자신의 욕구 때문이다.

 

우리가 이 같은 욕구의 지배를 받게 되면

우리의 육체와 정신체는 그것들에게 점령되어

영혼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어지게 된다.

 

우리의 영혼은 창조주의 동반자로 만들어졌다.

이 영혼에는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능력과 함께

의지라는 창조력을 영적으로 승화시키는 힘이 주어져 있다.

그것이 영혼과 그 활동에 신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물질은 정신이 활동하는 모습이다.

 

만약 우리의 활동이 명성이나 재산, 지위와 같이

자기 이익을 충족시키거나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고 싶다는 욕구의 뿌리를 둔 것이라면

그것들은 육체적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활동이

사랑, 인내, 다정함, 친절,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와 같은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영적 성장을 가져다준다.

 

 

당신은 자신이 추구하는 관계로부터

어떠한 욕구를 만족시키려 하고 있는가?

 

만약 그것이 자기 자신의 육체적 욕구를 증대시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육욕인 것이다.

하지만 선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영적인 것이다.

 

그 선택은 우리 자신의 몫이며,

우리는 뿌린 대로 거두어 들여야만 한다.

 

 

사랑을 얻고 싶다면

우리의 눈에는 신의 길에서 등을 돌린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까지도 더욱 사랑을 가지고 대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영혼의 경험이자 그것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신을 잃은 것보다 더 끔찍한 경험이 있을까?

인생의 고단함은 일시적인 것이다.

평안과 조화를 얻고 싶다면

자기 자신 속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평안을 만들어내야 한다.

왜냐하면 같은 성질끼리는

서로를 끌어당기고 모이는 것이 법칙이다.

 

나무딸기에서 사과를 수확할 수는 없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미움 속에서 사랑을 찾아낼 수는 없는 법이다.

 

태어난 순간의 날짜와 시간, 그 장소의 환경이

우리의 운명에 영향을 주는 것일까?

태어난 때에 해와 달을 나타내는 숫자가 운명에 영향을 주는 것일까?

 

그러한 것들은 전부 조짐이자 전조이며

길옆의 이정표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징후들이 운명을 설계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숙명, 영혼의 숙명, 몸의 숙명은

모두 신 안에 있기 때문이다.

 

태초의 신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신의 마음이 움직이고 형태를 가진 물질이 존재하기에 이르렀다.

신의 마음은 창조자이다.

마음은 그 자체가 물질과 정신, 양쪽에 걸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정신에 속한 무형의 것을 나타낼 수도 있고

물질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물질이란

정신이 활동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정신이 물질적인 모습을 취하지 않아도 기능할 수 있는 것처럼

이상은 보이지 않는 신에게서 유래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은

우리 내면에 머물며 성장을 촉구하는 추진력이자

그것은 물질 위에도 나타난다.

한순간의 단순한 생각으로는 그 무엇도 바꿀 수가 없다.

 

계속적으로 생각하고

계속적으로 만들어냄으로써

우리는 바뀌어 가는 것이다.

 

신이 모든 영혼의 자유 의지를 부여하셨기 때문에

각각의 실체는 그 건설력

즉 정신을 자신을 찬미하는 데 쓸 수도 있고

신과의 조화를 실현하는 데 쓸 수도 있다.

 

 

--육체는 결코 빈 껍데기가 아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지상에 태어났을 때

이미 그 숙명이 결정되어 있었던 것일까?

 

우리가 만들어내고 있는 삶의 패턴에

우리의 선택과 의지가 덧붙여진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 두어야 한다.

 

이 패턴은 우리가 스스로의 존재 목적과 부합하기 위한

커다란 기회가 될 경험을 통과하도록 우리를 운명 짓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생각과 목적에 있어서

우리의 마음이 작용하고 있는 방향대로 우리는 된다.

 

그렇다면 수명은 우리의 노력에 달린 것일까?

아니면 신으로부터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양쪽 모두 정답이다.

이 세상에는 사람이 각자의 이해력에 따라서 해석하는

어떤 종류의 표시가 있다.

 

그것은 여러 경험 영역을 통과해 온 영혼의 성장 단계를 나타내며

이번 생에 있어서

영혼이 선택한 인생의 여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표시들 중 몇몇에 대해

점성술, 숫자점, 손금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방법들이

숙명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단정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충분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표시들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 극복되는 것이며

성장 과정과 그 가능성을 나타내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꿈이나 점성술, 숫자점, 그리고 금속이나 돌 등의 파동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는 단순한 등불이나 징후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어둠 속에서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촛불과도 같은 것이다.

초의 불꽃을 숭배해서는 안 된다.

 

특정 출생일이 운명을 결정하는 경우는 없다.

운명은 특정한 충동이

쉽게 드러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오히려 그 충동들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서

운명은 바뀌어 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육체의 숙명을 자각하고 있을까?

우리의 육체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구조물로

환경과 유전의 법칙뿐만 아니라

영혼의 성장에도 영향을 받는다.

 

모든 원자와 입자는

그 자신의 구조 속에 우주의 모든 패턴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육체는 여러 가지 성질을 가진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들이 육체를 활동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하고 항상성을 유지한다.

 

우리의 육체는

살아계신 신이자

살아있는 영혼의 신전이다.

 

육체란

우리가 전체의 한 부분으로 나타나기 위한 구조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는

우리 안에 있는 신의 소유물이다.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신조차도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할지, 알지 못한다.

 

육체의 숙명은 우리 안에 있으며

특정한 인생과 여러 가지 인생에 있어서

자신의 육체로 무엇을 할지는

우리 스스로가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영혼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이번 생에서든, 전생에서든

주어진 기회에 대해 자신이 무엇을 해왔는가에 대한 결과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도움으로써

보다 큰 도움이

자신에게도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한 부분이 되고, 우리의 경험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영원히 이 지상에 들어오는 목적은

내면의 신을 일깨우기 위해서이며

그것은 동포에 대한 영의 열매를 나타냄으로써 실현된다.

 

따라서 우리는 해야 한다고 믿는 일을 성심껏 행해야 하며

그 결과는 신의 손에 맡겨야 한다.

 

지상의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있어서

육체적인 죽음은

다른 체험의 영역에서 태어나는 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상에서의 각 체험에도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물질세계에서 우리의 활동에 나타나는

창조력과 협력할 수 있도록 더 큰 성장을 위해서 지상에 왔기 때문이다.

 

지상에서의 선택은

자유의지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지상에서의 생애와 생애 사이의 중간 세계에서의 선택은

우리가 물질 형태에 있었을 때 무엇을 달성했는가에 따라서 조건 지어진다.

 

우리는 육체를 가진 상태에서 뿌린 것과 대면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혼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이치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육체를 취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상의 온 목적은

배워야 할 것을 배우고

자신의 영혼을 표현할 기회를 새로이 얻기 위함에 있다.

 

법칙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그 지식을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으로 옮길 때

그것은 우리 인생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

 

우리 영혼의 숙명은

영혼을 존재하게 한, 신 안에 있다.

 

그것은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창조력에 대해

우리의 영혼이 더욱 잘 알게 되는 것이며

언젠가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