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3)

[즉문즉설] 제486회 집착을 놔야 된다는데 집착하고 있다

Buddhastudy 2013. 7. 16. 22:13

출처 YouTube

 

. 예를 든다면 내가 남편한테 집착을 한다. 또 자식한테 집착을 한다. 그러면 집착을 한다는 건 내 뜻대로 하고 싶다. 이 말이거든요. 내 뜻대로 안되니까 어때요? 내가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짜증이 나고, 스트레스를 받죠. 그러다가 그 집착을 놓으면. 즉 내 뜻대로 하겠다는 생각을 놔 버리게 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거요. 그러니까 첫 번째 깨달음장에 갔을 때 내가 마음이 편안한 거는 지금까지 갖고 있던 거를 놔버렸다는 거요.그런데 두 번째 또 집에 가서 남편하고 자식하고 부딪치니까 또 내가 자꾸 남편과 자식을 잡는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제 알았잖아. 그죠? 놓으면 된다. 해서 또 내려놓으니 또 편안했단 말이오. 그런데 또 나도 모르게 경계에 부딪치면 또 잡게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것도 놔야 되는데. 이제 이렇게 된단 말이오. 놔야 되는데 하는데 현실은 잘 안 놔진단 말이오. 그래서 이제 또 내 자신에 대해서 괴로워지는 거요. 그러면 놔야 되는데 안 놔지는 내 자신을 보고 괴로워하는 거는 무슨 병일까? 이 말이오. 그것은 놔야 된다는데 또 집착하고 있는 거요. 그러니까 놓아야 편안해지는데, 지금은 놓는 게 아니고 놔야 된다는데 집착하고 있다. 이 말이오.

 

내가 예를 든다면 어디를 가야된다하면 가면 되는데 안가고 여기 있으면서 가야되는데, 가야 되는데, 가야 되는데, 하면 괴로워지는 거요. ?가야 되는데 하고 안가고 있으니까 가졌어요? 안 가졌어요? 안 가졌지. 그러니까 괴로울 수밖에 없단 말이오. 그러니까 놔야 되는데 놔야 된다는 생각만 하는 거요. 이게 뜨거우면 , 뜨거하고 놔야 되는데, 쥐고 아이고 이거 놔야 되는데, 아이고 뜨거라. 놔야 되는데. 놔야 되는데. 왜 난 못 놓지?” 이렇게 하고 있단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첫 번째에 왔던 그 편안함이 안 오는 거요. 지금. 그럼 지금 공부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러 가지에 내 식대로 집착을 하면 사람이 생기가 있습니다. 욕심을 내도 사람이 생기가 있죠? 그죠? 생기가 있지만 괴롭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놔버리게 되면 욕심이 없어진다 이 말이오. 즉 욕심을 놔버리면 그 괴로움이 없어진단 말이오. 그럼 괴로움이 없어지고 생기는 그냥 남아있어야 되는데, 항상 세상일은 한꺼번에 안 돼요. 그러면 괴로움도 없어지지만 뭐도 없어진다? 생기도 없어진다. 의욕도 없어진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이 욕심 속에 의욕이 같이 포함이 되어 있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괴로운 거는 의욕 때문에 괴로운 게 아니라 욕심 때문에 괴롭다는 거요. 으흠. 그러니까 내가 뭘 하겠다 하는 게 괴로움이 아니란 말이오. 내가 어떤 물건을 10키로를 들어야 되겠다. 하는 이거 자체가 욕심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가 10키로 들 능력이 없으면서 10키로를 들어야 되겠다하면 이건 괴로움이 된단 말이오. 그다음에 들지도 않으면서 들어야 되겠다고 생각만 해도 이게 괴롭단 말이오. 어떤 일을 열 번을 해야 그것을 이룰 수 있는데, 두 번해 놓고 왜 아직도 안 이루어지나? 이러면 괴로워진단 말이오.

 

그럼 이걸 다 뭐라 하냐? 욕심이라 그래. 욕심은 그 능력이 안 되는 것을 되는 줄 착각했거나, 열 번을 해야 되는데 두 번해놓고 안된다고 생각하거나 이건 다 욕심에 들어간다는 거요. 그러니까 그걸 하겠다는 게 잘못된 게 아니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괴롭다. 이 거요. 그러니까 욕심을 버리라는 것은 하겠다는 시도를 하지마라는 게 아니고, 두 번, 세 번 하고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마라. 이 말이오. 그러니까 그것을 하려면 열 번을 시도해라. 이 말이오. 그런데 이 욕심을 버려라는 할 때 그냥 모든 의욕을 다 같이 버렸단 말이오. 그러니까 사람이 무기력해졌다. 어이해야 될지 모르겠다.

 

남편이 뭐라 해도 아무 관심이 없고, 자식이 뭐 해도 관심이 없고, 그래서 무슨 사람인지 돌인지 꿔다놓은 보릿자루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은 법을 잘못 이해했다는 거요. 내가 밥을 먹겠다 하는 게 잘못된 게 아니에요. 밥을 먹겠다 할 때 거기에 과식을 하는 거를 보고 과식을 하지마라 이 말은 밥 먹지 마란 얘기가 아니에요. 그런데 과식을 하지마라 하니까 밥을 안 먹어버렸단 말이오. 그러니까 힘이 빠져 허기가 진다. 이 말이오. 그래서 오른쪽으로 치우쳤다가 다시 왼쪽으로 치우친 격이 된다. 즉 극단으로 치우쳐졌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자식이 어떤 얘기를 할 때 너는 이래야 돼. 너는 이래야 돼.” 하는 내 의도, 자식의 의사에 반해서 하는 내 의도는 버려야 된다. 그것은 이루어지기도 어렵고 아이도 괴롭히고 나도 괴롭힌다. 그런데 아이가 엄마 이거 어떻게 해야 되요?” 하고 물을 때는 그거, 니 알아서 해라.”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 애가 나한테 묻는 거 자체도 자기 알아서 하는 것 중에 하나에요. 묻는 거 자체도. 그러니까 물으면 대답을 해줘야 된다는 거요. 모르면 모른다고 얘기해주고. 알면 아는 만큼 얘기를 해줘야 돼.

 

그건 네 알아서 해라. 이렇게 말하면 안 돼지. 남편이 늦게 들어오면 여보 왜 늦었어요?” 이렇게 말해야 된단 말이오. 안 그러면 여보, 꽤 늦었네요.” 이렇게 말하든지. 니야 뭐 12시에 들어오든 2시에 들어오든 너는 너대로 들어오고 나는 나대로 자고 이러면 이건 외면이지. 너하고 나하곤 딴 사람이다. 이거 아니오. 그러니까 왜 늦게 들어왔냐? 어쨌냐? 맨날 싸우는 거 보다는 나아. 그러나 집착을 놓으라는 건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에요. 그걸 갖고 싸우지 마라 이거야. 그 사람도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늦는 거니까. 이유가 있어서 늦는 거니까. 그걸 이해하라는 거요.

 

그러나 사람이 늦게 들어오면 어때요? 걱정은 해줘야 될 거 아니오. “오늘 너무 늦었네요.” 라든지. “어떤 일로 늦으셨느냐?”라든지 물어봐야지. 시비하는 게 아니고. 그러한 관심과 애정은 표현해야 되지. 그런데 왜 생기가 없어지겠어. 지금 치우쳤다는 거요. 꼭 이런 얘기에요. 아이가 그네를 탈 때 부모가 그네 옆에 붙어 계속 아이를 떨어질까 싶어서 잡고 있으면 애가 그네를 못 배운단 말이오. 그래서 내가 애가 떨어지든 말든지 그냥 놔둬라. 제 맘대로 해보고 그래야 그네를 배울 거 아니야. 좀 놔둬.” 이러면 이제 또 뭐라고 질문합니까?

 

그러면 애가 그네 타다 떨어져 죽어도 놔둬요?” 또 이렇게 물어. 그와 똑같은 거다. 엄마가 아이에게 집착을 해서 아이의 안전을 생각한다는 게 지나쳐서 아이잡고 있으면 애는 그네를 못 탄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관심을 좀 꺼줘라. 넘어지든 자빠지든지 알아서 하게 놔둬라 이 말이오. 그러나 애가 떨어져서 팔이 부러지거나 다치면 어떻게 해야 된다? 업고 병원에 가야 된단 말이오. 내 자식이 아니라도 딴 애라도 다치면 병원에 가요? 안가요? 가니까 그건 집착이 아니란 말이오. 그거는 어른이 아이를 돌보는 거에 속하고, 성한 사람이 다친 사람을 돕는 거에 속하는 거란 말이오.

 

죽든지 살든지 모르겠다. 내버려둬라. 이런 말이 아니란 말이오. 왜 사람이 사람이 죽는 걸 내버려 둬요? 빨리 데려가서 치료를 해야지. 그러니까 그것이 집착을 놔라하니까 외면으로 가버렸다. 치우쳤다. 너무 가버렸다. 이런 얘기요. 과식하지마라니까 아예 밥숟가락 끊어버렸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일차적으론 해결이 됐는데 그것에 따른 다시 부작용이 생겼다. 그래서 지금 힘들고 헤매는 거요. 그러니까 남편에 대해서도 관심을 분명히 해라. 아이에 대해서 물으면 대답을 해라. 아는 만큼.

 

전에는 모르는 게 간섭하잖아. 묻지도 않는데도 내가 지시하잖아. 그러지 말고 묻거든 얘기를 해라. 내 의견이 있으면 얘기를 해라. 내 의견이 있으면. 내가 엄만데 자식한테 자기 얘기를 못해. 애가 늦게 들어오면 늦게 들어오든 일찍 들어오든 내버려두긴 왜 내버려둬요? 부모가 자식한테 얘기를 할 수 있지. 내버려두면 안 돼지. 스님의 법문의 뜻은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이오. 아이에게 지나친 간섭을 하지마라. 그래서 자기가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 있는 기회를 좀 줘 봐라는 거요.

 

그런데 애가 그걸 핑계로 해가지고 나쁜 버릇을 계속 고집하면 그게 아이가 부처님 법을 자기식대로 잘못 이용하는 거 아니오. 그럼 그럴 때는 기회를 몇 번 주고 객관적으로. 그러니까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할 만한 몇 번의 기회를 주고는 얘기를 해야지. 구체적으로 딱 잡아 얘기를 해야지. 이렇게 해선 안 된다. 질문 있으면 얘기 해봐요. 그때 이제 들어주는 건 잘한 일이고, 또 그렇게 말할 때 당신 말을 듣고 보니 그것도 옳은 얘기다. 옛날에 나도 이렇게 새벽에 일어나 지극정성으로 기도할건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일단 나를 한번 고쳐보려니까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중이다. 요거부터 먼저 해가지고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게 되면, 그다음에 두 번째로 당신 밥을 내가 정성들여 지어주는걸 시도해보겠다.” 이렇게 이게 위트거든요. 이렇게 탁 재치 있게 얘기해야 된다. 그러니까 시험을 해보면 내가 시험에 불합격 한 거 아니오. 그러면. 그런 것들을 남편이 볼 때 부처님한테 마음이 더 가있고, 자기한테는 마음이 덜 와 있다. 이렇게 느끼는 거 아니오? 그죠? 그러니까 당신이 부처님 생각하듯이 나 좀 생각해 둬 달라.” 이 말인데.

 

그 말은 가만히 보면 남편이 아내에 대한 애정결핍증을 갖고 있는 거요. 관심 좀 가져 달라 이 말이오. 그게. 나 좀 봐 달라. 이 말이오. 나 좀 봐 달라고 그렇게 얘기하면 알았어. 내 좀 봐줄게.” 이렇게 애기하면 되지. “밥해줘도 안 먹 두만.” 이러지 말고. 그게 이제 나한테 관심 좀 더 가져달라는 얘기 아니에요. 예를 든다면 동생을 낳았는데 엄마가 동생 애기를 돌보니까 큰애가 와가지고 엄마, 동생이 나보다 더 예뻐? 예뻐?” 이렇게 묻는 거는 동생만 쳐다보지 말고 나도 좀 쳐다봐 달라. 이 말이거든. 그 말 자체가.

 

그런데 우리가 그런 말에 의미를 못 새기지. 으흠. 그러니까 그렇게 말할 때는 , 남편이 내가 좀 더 관심을 가져달라는 얘기구나.” 전에는 너무 간섭을 해서 귀찮았는데, 요즘도 너무 관심을 안 가져줘서 어때요? 섭섭하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약간씩 간섭을 해주라 이 말이오. 관심을 가져줘라. 저녁에 들어오거든 왜 늦게 왔어요?” 이렇게 마음에는 일찍 들어오든지 늦게 들어오든지 상관하지 말 돼. 말로라도 왜 늦게 들어왔어요? 내 당신 기다린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렇게 말을 자꾸 해주라 이 말이오.

 

또 얘기해요. 할 거 있으면. 그런데 여러분 또 안 그래요. 너무 이렇게 시시콜콜 다 간섭하는 거 싫죠? 그런데 또 너무 오든가든 관심 안 가져도 싫잖아. 빈말이라도 조금 이렇게 약간씩은 너무 세게 말고 약간씩은 간섭을 해주는 걸 더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남편만 그런 게 아니라 나도 그렇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조금씩은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좋다. 둘이 같이 살 때. 그렇게 하면 너는 너고, 나는 나고, 아예 관심 안 갖고 살려면 중이 되면 되지. 중이 되도 그래도 좀 관심을 가져줘야 된다 그러는데, 부부가 됐는데 그럼 관심을 안 가져주면 섭섭하지.

 

제일 서로 관심 안 갖고 너는 너고, 나는 나고, 정말 관심 없이 사는 게 가장 대표적인 게 누구요? 스님들 사회에서 사는 거 아니오. 그죠? 같이 명상하다가 옆에 사람들 죽어도 신경 안 쓴다. 이렇게 배운단 말이오. 우리는. 참선할 때 옆에서 한사람 죽어도 죽든지 말든지 관심을 안 둬야 돼. 그게 무슨 무정하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만큼 자기 공부에 어떻게 집중해야 된다. 이렇게 가르친다 말이오. 그러니까 공부에 집중하라 그렇게 가르치는데 이게 부작용이 생기면 진짜 상대편이 아파도 관심을 안 갖는단 말이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도 제자들이 한 제자가 아팠는데 아무도 관심을 안 가져. 전부 자기 공부하는데 집중해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가셔서 그 환자를 치료했어. 부처님께서 그 비구를 치료하고 있으니까 제자들이 이제 다 그 처소로 갔단 말이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수행이라는 것은 이렇게 사람이 아파서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주는 게 수행이지 앉아있는 것만 수행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단 말이오. 이게 이제 병든 비구를 치료하다. 대만에 혹시 자재공덕회라고 하는 단체가 있다는 말 들어봤어요? 으흠.

 

아주 자원봉사 조직이 4백만 명이나 조직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대만에서는 누가 총통 나오려면 그 부인은 요즘 말하면 대통령후보 부인은 다 자재공덕회 가입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 봉사하는데 가서 좀 한 다리 끼어서 같이 봉사를 해야 총통이 될 수 있지. 안 그러면 어림도 없다 할 만큼 조직이 그만큼 세요. 으흠. 무료 병원도 운영하고 많은 보시금과 봉사자를 가지고 이렇게 사회사업을 많이 한단 말이오. 그런데 거기에 부처님이 그 본관에 가면 벽에 모자이크로 큰 부처님을 그려놨는데 그게 뭐냐 하면, 부처님이 병든 비구를 구호하는 병든 비구를 간호하는 그 상이 부처님의 상이야.

 

이렇게 앉아있는 명상이 아니고, 그들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부처님은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로서의 부처님이 그 불상의 모습입니다. 으흠. 그러니까 우리가 옆에 사람이 죽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말고 내 공부만 해라. 이 말은 공부에 그만큼 집중하라는 얘기고, 그런데 그 공부에 집중하라는 것이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무관심으로 가니까 다시 옆에 환자가 병들어 있을 때는 그 사람을 돕는 것이 뭐다? 수행이다. 이렇게 말했단 말이오. 이 여러분들이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자비심이 아니고 여러분들의 욕심과 집착이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보면, 공부를 잘하니, 못하니, 쟤는 계율을 지키느니 안 지키느니 이렇게 같이 수행하는 사람한테 일일이 따지는 거는 뭐냐 하면 이거는 분별심이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분별심을 끊어야 돼. 그러고 자기 마음에 집중해야 돼. 그런데 옆에 병들어있는데도 관심을 안 갖고 있으면 무관심에 속한다. 이건 무자비에 속하는 거요. 그러니까 이웃이 병들어 있을 때 관심을 갖고 그를 치료하는 것은 자비심에 속합니다. 으흠.

 

그러니 처음에는 너무 집착이 많았고, 지금은 집착을 끊어라 했더니 어디로 가버렸다? 무관심으로 가버렸다. 무자비로 가버렸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남편이 얼마나 냉정한 사람으로 봤으면 좀 쳐다봐 달라 그런 소리를 했겠어. 그럴 때는 애정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자비심이 좀 필요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어요. 그런 공부를 좀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