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4)

[즉문즉설] 제994회 아상과 현실 속의 나

Buddhastudy 2014. 11. 19. 21:22

"> 출처 YouTube

 

 

질문자가 택시를 탔을 때 자기는 그때 뭐라고 불려요? 가게 갔을 때는 뭐라고 불려요? 그러면 애 따라 학교 갔을 때는 뭐라고 불려요? 아내 만나면 뭐라고 불려요? 부모만나면 뭐라고 불려요? 절에 오면 뭐라고 불려요? 신도라고 불리죠. 이렇게 곳곳에 따라 자기가 늘 달리불리지 않습니까? 그죠? 이 가운데 어떤 게 진짜 자기요? 다라고. 갈 때마다 다르니까 다가 나라고 할 수 있어요? 그냥 갈 때마다 이래저래 나라고 불리기 때문에 그 어는 것도 나가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때그때 그 상황에서는 그것을 자기로 삼고 있잖아요. 그건 착각이에요? 진실이에요? .

 

그렇다면 자기가 지금 질문하는 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유추가 안 돼요? 뭐가 구체적으로 특히 받아들여야 되요? 이렇게 수도 없이 우리는 이것을 나로 삼고, 저것을 나로 삼고하고 있는데, 그 어떤 것도 나라고 할 것이 없기 때문에 무아라고 하는 거 아니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 무엇이 그 각각이 다 자기처럼 인식이 되잖아요. 현실에서는 내가 있는 거 같지만 자세히 보면 그건 착각이지, 그건 뭉게구름이 하늘에서 토끼모양 되었다가 배모양이 되었다가 코끼리 모양이 되었다 그러면 우리가 뱀이다. 코끼리다. 호랑이다. 이러지만 거기에는 뱀도 없고, 코끼리도 없고 호랑이도 없는 것처럼,

 

인연을 따라서 이리저리 불릴 뿐이지, 거기에는 아들이라고 하는 특징도 없고, 아버지라고 하는 특성도 없고, 손님이라고 하는 특성도 없단 말이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착각을 하고 살지. 그러니까 자기가 말하는 현실이라는 것은 착각속의 현실이고, 부처님이 말하는 것은 그 착각에서 깨어났을 때의 얘기니까, 그러면 우리의 고뇌라는 것은 착각에서 생기는 거니까, 착각해서 깨어나라고 얘기하는 거 아니오. 착각에서 깨어나는 것은 내가 손님이라는 착각을 갖고 있을 때, 손님인 네가 아니라는 걸 앎으로 해서 꿈에서 깨는 거거든요. 만약에 내가 꿈에서 강도에게 쫓겨요.

 

강도에게 쫒기면 첫째는 도망을 가잖아. 아무리 도망을 가도 따라온단 말이오. 그러면 내가 피하는 방법은 뭐요? 관세음보살한테 기도를 한단 말이오. “저 강도로부터 나를 좀 숨겨주십시오.” 그래서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서 강도로부터 나를 숨겨줬다. 이 말이오. 그러면 강도는 나쁜 놈이고 관세음보살은 좋은 사람 아니오. 그죠? 그러니까 꿈속에서는 나쁜 놈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어요. 도망갈 일도 있고, 숨을 곳도 있단 말이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도망을 가서 숨어서 해결을 했다. 하더라도 그런데 해결이 사실 아니에요. 완전한 해결은 뭐냐? 눈을 뜨는 거요. 눈을 딱 뜨면 어때요? 해결이 됐잖아. 그죠?

 

눈을 떠서 해결될 때는 어떤 해결이오? 강도가 있었어요? 없었어요? 관세음보살도 있었어요? 없었어요? 그러니까 근본적인 해결책은 눈을 뜨는 거지 꿈속에서 어디 숨는 게 아니란 말이오. 그럼 우리가 말하는 착각은 꿈과 같은 거란 말이오. 그러니까 현실에 안 맞는다는 것은 그게 , 눈떠라. 강도는 없다.” 이렇게 말하면 깨서는 강도가 없다는 말이 이해되지만 꿈속에는 강도가 도끼 들고 쫓아오는데 강도가 없다 그러면 이해가 되요? 안 돼요? 안 돼. 저렇게 쫓아오는데 자꾸 없다고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 얘기요. 그런데 그거는 눈을 뜨면 강도란 건 없는 거요.

 

눈을 감고 있는 한은 없다는 게 도저히 말도 안 되지만. 그러니까 여기서 핵심은 눈을 뜨는 거요.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거 아니오. 그러면 눈을 떠라.” 그런다고 눈이 금방 떠지는 건 아니죠. 우리가 꿈에서 눈 뜨려 할 때 잘 안 떠지는 건 사실이잖아. 그죠? 그래서 이게 꿈인 줄 알면 눈뜨는 쪽으로 마음이 가고, 꿈인 줄 모르면 도망가는 데 힘을 쏟게 되요. 강도가 쫓아오는데 꿈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도망가요? 눈 떠요? 눈 뜨는 쪽으로 노력을 하고, 이게 꿈이 꿈인 줄 모르면 도망가는 쪽으로 선택을 하고, 도망가면 아무리 도망을 가도 끝이 없는 거요. 여기 도망가면 저기 나타나고, 저기 도망가면 여기 나타나고 이러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조금 더 살펴보시면 아마 좋을 거요.

 

~ 조금만 기다리세요.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얘기 들어봤어요? 장님이 눈 감았다는 거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코끼리를 다리를 쭉~ 더듬어 봤어요. 그러니까 기둥같이 생겼어요. 그러면 이 장님은 코끼리의 일부를 만져보고 있는 거요? 코끼리 전혀 모르는 거요? 코끼리 만져봤죠? 그럼 자기 경험 속에서 코끼리는 어떻게 생겼어요? 기둥같이 생겼어요. 그래서 코끼리가 기둥같이 생겼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이거를 편견이라 그래요. 뭐라고? 편견. 또는 단견. 이래요. 그러니까 일부만 보는 거요. 일부만 보고 한 면만 보고 그걸 가지고 전체다이렇게 착각하는 거요. 그럼 이 사람은 안본게 아니오. 보기는 봤는데 일부만 본거요. 으흠.

 

그래서 전체를 코끼리는 기둥같이 생겼다. 그러면 전혀 안 맞아요. 이걸 갖다 무지라 그래요. 무지. 지혜가 없다. 무지. 무명, 밝음이 없다. 눈감았다. 이런 얘기요. 그런데 어떤 모양에는 이쪽면만 볼 때하고, 저쪽면도 같이 보면 이쪽면만 봤을 때하고, 틀려요. 그러니까 이쪽면만 볼게 아니라 저쪽면도 같이 본다. 안면만 볼게 아니라 뒷면도 같이 본다. 아래만 볼게 아니라 위도 같이 본다. 이러면 전체를 본다. 이걸 전모를 본다. 이래요. 전모를 본다. 통찰력이라 그래. 이 통찰력을 지혜라 그래. 지혜. 그럼 무지라는 것은 지혜가 없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도 다 눈뜨고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다 하는데, 우리는 어떤 한쪽면만 보고 있는 거요.

 

그걸 가지고 전체라고 자꾸 주장을 하는 거요. 그래서 무지다. 이래요. 그러면 스님이 도와주는 거는 이렇게 하는 걸 저렇게 하라는 게 아니고, 여러분들이 하는 걸 잘못됐다는 것도 아니고, 한쪽면만 보고 있는데 저쪽면도 보라는 얘기요. 그래서 제가 저쪽 면을 좀 보여주는 거요.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는 거요. 지난주에 제가 일요일 날 청년들을 데리고 경주, 역사 안내를 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야외에서 이런 김유신 장군 묘도 가고, 태종무열왕릉 묘도 가고, 거기서 역사 강의도 하고 이러려면 비가 오는 게 좋아요? 안 오는 게 좋아요? 안 오는 게 좋지. 그런데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주룩주룩 계속 내리는 거요.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 싫잖아. 그래서 내가 학생들한테 얘기했어요. “비 오니까 어때? 싫지?” “.” 그래. 그런데 이 봄비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누구요? ? 농부들은 이 봄비는 황금이에요. 이거 다 물 뿌려가지고 농사지으려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 거 아니오. 그죠? 그러데 하늘에서 촉촉이 충분히 이렇게 내려주면 이거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단 말이오. 그러니까 내 입장에서 볼 때는 잘못된 일이지만, 농부에서 볼 때는 좋은 일이에요. 그럼 우리가 농부 입장을 생각한다면 이거 싫어할 일이 아니다. 이런 얘기에요. 그런데 농부는 비를 맞고도 일을 하지 않습니까? 그죠?

 

그런데 비를 맞고도 일하는 사람이 있는데, 비를 맞고 노는 게 쉬워요? 비를 맞고 일하는 게 쉬워요? 노는 게 쉽죠. 그러면 비를 맞고 일하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가 지금 비를 맞고 놀러 다니는데 그게 무슨 특별한 어려움이 아니잖아요. 두 번째 노는데 뭐, 비맞아가면서 놀 일이 있겠나? 그러면 안 놀면 되잖아. 그죠? 그런데 농부는 비맞아가면서 일할게 뭐있겠나 하면서 안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비 맞고 놀아도 농부보다 낫고, 그것도 필요 없으면 안 놀아도 괜찮고, 그래서 이게 사실은 굉장히 나쁜 일이라지만 나쁜 일이 아니라는 거요. 두 번째 그날 경주에 벚꽃이 만발했기 때문에 만약에 비가 안 왔으면 경주시내 전체가 주차장이 되어 버려요. 조금 이동하는데 시간이 엄청나게 걸립니다.

 

그리고 모든 그런 관광지마다 사람이 북새통을 이루어요. 그런데 보통 벚꽃놀이 하거나, 봄놀이 놀러 온 사람이 일반적으로 비 맞고는 놀러나 와요? 안 나와요? 안 나오지. 그러니까 우리가 그 유적지에 갔을 때 사람이 있을까? 없을까? 주말인데도 없겠죠. 그러면 한가하게 구경하기가 좋아요? 안 좋아요? 좋지. 그러니까 어떤 이것이 꼭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거요. 그러면 한쪽면만 보면 아이고 비가 와서. 이거.” 이러지만 다른 면까지 같이 보는 사람은, 비 오는 거 같고 안 오면 오라는 건 아니에요. 안 오면 안 오는 데로 또 날씨가 화창해서 좋지만, 거기는 손님이 박닥박닥해서 나쁜 점이 있고,

 

비 오면 약간 우산을 써야 되고, 그런 게 있지만, 대신에 한가하게 특히 우리는 구경 온 게 아니라 역사 강의도 듣고 해야 되니 사람이 많으면 집중력이 떨어지잖아. 그죠? 그래서 이게 장단점이라고 할 수 있을지 어쨌든 양 측면이 있다는 거요. 양 측면이 있다. 그러니까 아까 저 할머니 보살한테 내가 얘기하는 거는 부모가 자식을 돌봐주는 게 좋은 점도 있고, 부모가 자식을 돌봐주는 게 거꾸로 나쁜 점도 있다. 자식이 부모 말을 잘 듣는 게 좋은 점도 있지만, 반드시 자식이 부모 말 들으면 좋다고 말할 수가 없다.

 

부처님이 출가할 때는 부모 말 들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안 들었기 때문에 천만 다행이지. 그런 점이 있다. 이 말이오. 그런데 평균적으로는 어떠냐? 어릴 때는 부모 말을 잘 듣고 부모가 돌봐주는 게 비교적 좋은 점이 많고, 20살 넘어서는 부모가 돌봐주거나 부모 말을 잘 들으면 평균적으로 나쁜 점이 더 많습니다. 내가 출가해서 절에 사는데, 여러분들이 볼 때는 스님은 가능하면 여자 안 만나고 공부에만 집중하는 게 좋아요? 스님이 된 뒤에도 맨날 여자만나고 밖으로 돌아다니는 게 좋아요? 그런데 우리 부모님이 볼 때는 저렇게 혼자 사는 게 좋아요? 여자 만나는 게 좋아요?

 

그런데 부모의 그런 바람, “아이고, 결혼하면 어떻고 애기라도 하나 낳아라.” 이거 바라면 엄마로서 아빠로서의 바람은 되지만 그것이 승려된 아들의 미래에는 큰 장애가 된다. 부모가 자식을 망치려고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자식걱정해서 한 게 실제로는 자식한테 나쁜 일이 된다는 거요. 그런데 우리는 자식 걱정만 할 줄 알지 그게 나쁜 일이 될 거라는 거는 생각 못해. 내가 순수하니까 다 좋은 일만 생길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한다는 거요. 어제도 우리가 고3자리 아이가 이 성적충동을 도저히 참기가 어려워서 하소연을 하는 그런 질문이 있었어요. 3인데.

 

그런데 일반적으로 보면 쓸데없다 이러지만, 개인적으로 이해가 되는 일인데, 그런 얘기를 엄마한테 할까? 안할까? 안하겠죠. 그러면 엄마는 애 공부한다고 힘들다고 보약을 더 지어먹일까? 안 먹일까? 먹이겠죠. 그럼 아이는 더 힘들어요? 안 힘들어요? 더 힘들지. 그러면 엄마는 아이를 위해서 했는데 아이는 결과적으로 더 힘들어진다는 거요. 그러니까 이런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사물의 한 면밖에 못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사물의 다른 면도 봐야 된다. 이런 얘기요. 그런데 우리는 순간순간 한 면만 보는 거요.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택시타면서 승객이고, 가게가면 손님이고 학교가면 학부형이고 너무 자연스럽게 생각했잖아.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엄마라고 착각하고 있잖아. 자기 엄마 아니오. , 만날 때만 잠시 뭐다? 엄마라는 이름이 불리고 남편 만나면 아내라고 잠시 불리지 자기 아내 아니오. 만약에 남편이 죽었는데 자기 아내요? 아내 아니오? 아니오. 그래도 자기는 아내라고 해서 나는 재혼을 할까? 혼자 살아야 될까? 고민하잖아. 그러니 자기는 그냥 더 이상은 아내 아니오. 부모님 돌아가시면 자긴 더 이상 자식이 아니에요. 애들 학교 끝나면 자긴 더 이상 학부형이 아니에요. 택시 안타면 승객이 아니에요. 절에 안다니면 불교신자가 아니에요. 그런데 교회 다니다가 절에 왔는데도 아직도 내가 교회 다니다 절에 와도 되나?” 이런 걱정 하는 거요.

 

그러니까 그거는 이미 지나간 꿈을 가지고 어제 밤에 꾼 꿈을 가지고 지금 걱정하는 거 하고 똑같아. 그래서 우리가 다른 면까지 같이 보는 눈을 트는 거요. 그러면 어때요? 하나만 보면 싫고 좋고가 강한데, 양면을 다 보면 어때요? 싫은 감정은 있지만 거기 크게 휩쓸리지 않고, 좋은 감정은 있지만 그렇게 크게 휩쓸리지 않는다. 그러면 마음이 감정기복이 들쑥날쑥하다가 감정기복이 조금 적어져서 잔잔해진다. 파도가 아주 심하게 치다가 고요한 파도가 치는 것과 같다. 이런 얘기요. 이게 지혜로워진다. 이렇게 말해요. 그러니까 이걸 깨닫는다, 깨닫는다는 거는 눈뜬다. 이렇게 표현하는 거는 안보이다가 본다는 것 보다는 한쪽만 보다가 다른 쪽도 본다. 그래요.

 

그러니까 나는 뭐다, 뭐다, 뭐다하지만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게 공이오. . 공이니까, 그 무엇도 아니니까 그 무엇도 뭐할 수 있다? 순간순간 될 수가 있다. 여러분 착한 사람이오? 나쁜 사람이오? 착한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에요. 그러나 순간순간은 착한 사람도 될 수 있고, 나쁜 사람도 될 수가 있는 거요. 내가 착한 사람이면 나쁜 사람이 될 수가 없고, 나쁜 사람이면 착한 사람이 될 수가 없어요. 난 착한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떤 여자 분이 와서 나하고 스님이 너무 좋으니까 나하고 연애합시다.” 그런데 내가 싫다고 안하면 그 여자 분은 이렇게 항변할 수가 있겠죠.

 

너를 좋아하는 이 한 여자의 마음도 이해 못하는 게 네가 무슨 일체중생을 구제한다고 그러냐?” 이럼 말이 되요? 안 돼요? 말이 되지. 그래서 한여 자를 위로하다가 보면 다른 사람으로부터도 비난을 받아요? 안 받아요? 비난을 받고, 그럼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펴서 비난 안 받으려 하다보면 한 여자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가 있겠지요. 그러니 법륜스님은 좋은 사람이오? 나쁜 사람이오? 이 사람이 좋다 그러면, 저 사람은 나쁘다 그러고, 저 사람이 좋다 그러면 이 사람은 나쁘다 그러고. 그래서 법륜스님은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오. 그래서 공이라 하는 거요. 그래서 이 사람이 볼 때는 좋게 느낄 때도 있고, 저 사람이 볼 때는 나쁘게 느낄 때도 있다.

 

오늘 이 법회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이런 인생문제를 얘기하니까, “, 참 종교얘기도 안하고 불교얘기도 안하고 쉽게 얘기해서 참 좋다.” 이런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에요. 또 어떤 사람은 어때요? 큰 스님 온다 그러니까 불교부처님 법문 들으러 갔더니 법문은 안하고 내 뭐, 애가 어떻고, 뭐 그런 얘기만 하더라. 무슨 중이 무슨 속인도 아니고 그런 얘기만 하노.” 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나? 없나? 있어요. 저 노보살 중에 틀림없이 나갈 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으흠. 그 다음에 또 저 보살님은 우리 아가 취직할 수 있나? 없나? 그것 물었는데, 그거는 얘기 안하고, 자꾸 뭐, 신경 끄라는 소리만 하고, 모르면 모른다 그러지 뭐, 말이 많노.”

 

또 이렇게 얘기하고. 그러니까 이 중에 그럼 누구 말이 맞느냐? 없어요. 사람은 다 자기 생각대로 사는 거요. 자기 생각대로. 그러니까 제가 여러분께 얘기해 주고 싶은 거는 부처님의 법은 이런 말, 저런 말이 아니라, 인간의 중생이라는 건 다 지 생각대로 사는 거다. 아시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칭찬해도 그 사람 지 기분이 좋다는 얘기고, 비난을 해도 그 사람 지 기분이 나쁘다는 얘기지, 실제론 나하곤 아무 관계가 없는 얘기에요. 인간 기분이라는 거는 좋으면, 돈을 잃어버리고도 기분 좋아하고, 기분이 나쁠 때는 가다 조금 넘어져도 돌을 발로차고 신경질 내고. 그런 거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우리가 조금 더 이것만 보다가 저거도 보고 이렇게 폭넓게 자꾸 이렇게 보면, 이제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좀 더 고요해진다. 근심걱정이 줄어든다. 그래서 없어져간다. 그거를 열반이다. 해탈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즉문즉답이 아니오. 인생에는 답이 없어요. 즉문즉설이라고 하는 거는 이렇게 우리가 이런 얘기를 하다보면 , 이렇게만 볼 수 없고, 저렇게도 볼 수 있네.”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거요. 그러니까 오늘 우리는 한 총각의 얘기를 들으면서, 총각이 겪는 괴로움은 이제까지 주로 여자들 입장만 들어봤는데, 남자들 얘기 들어보니까 남자들도 고민이 많아요? 안 많아요? 많아.

 

여자들이 자기 생각, 남자들이 술 먹고 뭐하고 여자 안 돌본다고 하는데도 남자 얘기 들어보면 여자 또 문제요. 또 애기 들어보면 엄마가 부모 때문에 다 저렇게 생기니까 부모도 다 반성해야 되겠죠. 부모 얘기 들어보면 다 애들 때문에 죽겠다 그래요. 그래서 이런 걸 우리가 같이 볼 수 있다면 훨씬 부모도 괴로움이 줄어들고 즉, 자녀를 이해하니까. 자녀도 부모를 이해하면 조금 괴로움이 줄어들고, 여자도 남자를 이해하고 남자도 여자를 이해하면 훨씬 줄어들게 된다는 거요. 그래서 이거는 부처님의 깨달음은 특별한 게 아니라, 전체를 보는 눈을 키워준다. 이걸 갖다 마음을 열어준다. 이렇게 말을 하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