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6)

법륜스님의 희망세상만들기_죽음에 대한 두려움

Buddhastudy 2016. 7. 10. 07:10


  

[질문] 제가 한 오십이 넘다 보니까 20, 30대에는 그런 생각 할 조차 여유가 없었는데 나이가 들다 보니까 이런 죽음에 대한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죽음의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을 할 수 있을까 많이 궁금합니다.

 

 

그거는 우리 인류역사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연구해 놓은 게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니까 고대로부터 인간이 일반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잘 살기위해서 재물을 많이 모으고, 지위가 높아지고, 인기를 얻고, 이런 목표로 우리가 사는데, 그런 목표를 달성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게 주로 누구에요? 왕이에요. 그죠? 왕은 더 이상 재물을 더 모을 수도 없고, 지위를 더 높일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죠? 그렇기 때문에 왕에게 큰 문제는 죽음에 대한 거요.

 

즉 아무리 내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높은 지위를 가지고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죠? 영원히 지속되려면 뭐해야 된다? 안 죽어야 되는 거요. 그런데 안 죽는 방법은 없단 말이오. 진시왕이 안 죽으려고 불로초를 구하고 해봤지만, 뭐 그래봤자 조금 더 살거나, 오히려 그런 노력에 의해서 더 빨리 죽거나, 이런 결론을 가져오는데, 그러니까 죽은 뒤에도 계속 이 영광을 누리고 싶다 이런 얘기죠. 그래서 발견된 게 뭐냐? 바로 좋은 데 간다는 거요.

 

사람이 자식을 어디 떠나보낼 때 자식과 헤어지는 건 섭섭하지만, 자식이 좋은데 갈 때 헤어지는 게 더 섭섭해요? 나쁜 데 갈 때 헤어지는 게 더 슬퍼요? 나쁜 데 가면 더 울고불고 야단이죠? 그죠? 그러니까 좋은데 간다. 이런 아이디어를 낸 거요. 실제로 좋은 데가 있는지 없는지는 놔두고. 좋은데 간다. 그래서 뭐다? 천국이라는 것도 나오고, 천당이라는 곳도 나오고, 천상이란 말도 나오고, 주로 이거는 하늘을 두고 얘기했어요. 실지론 하늘에 올라가보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나 옛날에는 어쨌든 저 하늘 위에 좋은 세상이 있다. 이런 생각을 해서, 거기에 간다 하니까 죽는 사람도 여기 더 있고 싶지만 좋은데 가니까 크게 덜 두렵고, 보내는 사람도 덜 슬프다. 이런 얘기에요.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 저 아래에 좋은 세상이 있다. 이걸 뭐라고 그래요? 용궁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거기 간다.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거기에 극락이다. 이런 말도 다 똑같은 거요.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간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티벳같은데는 조장, 죽으면 시체를 잘라서 바위위에 올려서 독수리가 먹고 하늘 높이 나르면 어디에 좀 더 가까워진다? 천국에 더 가까워진다.

바닷가에 사람의 시신을 돌을 메어서 수장을 합니다. ? 그래야 용궁에 더 가까워진다.

기독교인들은 부활한다. 그러니까 그대로 시체를 놔둬서 동굴 같은데, 이스라엘은 동굴 같은데 넣어놓죠.

인도 같은 데는 어떤 아이디어를 냈는지 좀 독특해요. 새로 태어난다. 이런 아이디어를 냈어요. 새로 태어난다는 말은 갔다 온다 이 말 아니오. 좋은데 같다. 하는 거 보다 이게 아이디어가 더 좋은 거 같아요. 새로 온다. 좀만 기다리면 온다. 그런데 이게 헌 옷을 입고 있다 보면 새 옷을 갈아입으면 되는데, 헌 옷 입던 거에 자꾸 마음이 쓰여서 새 옷을 안 갈아입으려고 애들 그런 경우 있잖아요. 그러니까 헌 옷을 불에 싹 태워버리는 거요. 흔적도 없이 해버리면 미련이 딱 끊어져서 바로 새로 태어나는 쪽으로 간다.

 

그러니까 이런 아이디어를 여럿 냈어요. 이 보다 더 많은 아이디어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아이디어를 하나 채용을 하면 되죠. 좋은 데는 빨리 가는 게 안 좋아요?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한국에서 여기 오는 것도 여러분들 좋은 곳이라고 왔어요? 나쁜 곳이라고 왔어요? 좋은 곳이라고 왔잖아. 그죠? 그러니까 한국에서 미국 가는 사람 부러워하잖아요. 슬퍼 안하고. 그런데 월남 전쟁을 간다든지 하면 다 슬퍼하잖아요. 그거는 나쁜 데 가기 때문에. 그래서 좋은 곳으로 간다하는 아이디어를 내어서 지금까지 인간이 낸 아이디어는 이게 제일 나은 거 같아요. 좋은 곳으로 간다. 그래서 종교 불문입니다.

 

불교에도 좋은 곳이라는 극락이라는 거 만들어놓고 하고, 기독교는 천당이라는 거 만들어 놓고 하고, 어떤 데는 천국이라고 만들어 놓고 하고, 또 인도에서는 천상이라고 만들어놓고 하고, 중국도 하늘나라 천국이다. 해서 옥황상제가 있다 해서 만들어 놓고, 거기가면 먹는 것도 충분하고 건강도 좋고 오래 살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거 다 이루어진다. 이런 얘기를 해 놨어요. 실제로 그런 게 있는지 없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아무것도 없다. 하는 거 보다는 그러려니 하고 사는 게 안 나아요?^^

 

그래서 자꾸 누가 있느냐 없느냐고 나보고 자꾸 물어요. 그래서 이럴 때는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의 효용성, 그런 얘기 없는 거 보다는 그런 얘기 듣는 게 위안이 되니까, 이게 인류가 계발한 아이디어에요. 다시 태어난다. 좋은데 간다. 괜찮잖아. 아이디어. 그러면 부처님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얘기했을까? 부처님은 방법이 전혀 달라요. 그러니까 우리가 얘기하는 극락 간다. 이거는 우리가 말하는 2600년 전에 태어나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은 아니에요. 종교화 된, 불교는 원래 종교가 아니었는데, 종교화된 불교에서 다른 종교처럼 이런 똑같이 아이디어를 내서 극락이다. 이렇게 아이디어를 낸 거고, 원래 부처님은 내 말씀은 이거에요.

 

우리가 생긴다. 사라진다. 이걸 생멸이라고 그래요. 나고 죽는다는 뭐다? 생사. 생기고 사라진다는 뭐다? 생멸이잖아. 그죠? 그런데 우리가 바닷가에 가서 이렇게 보면, 파도 하나하나를 보면 수도 없는 파도가 생기고 사라지고 생기고 사라지고 생기고 사라지고 이러죠.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런데 바다 전체를 한번 보세요. 파도가 생기고 사라지고 생기고 사라지고 수 없는 파도가 생기고 사라지는 데, 바다전체 입장에서 보면 생기고 사라진다기보다는 물결이 뭐한다? 물이 출렁거린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말 할 수 있어요? 없어요? . 다만 물이 출렁 거리는 거요.

 

생긴다 하지만 사실은 생긴다 할 것도 없고, 사라진다하지만 사실은 사라진다 할 것도 없어요. 그 중에 조그마한 눈으로 파도 하나만 보니 생긴다 사라진다 생긴다 사라진다하지, 전체 큰 눈으로 보면 생긴다 하지만 사실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자진다 하지만 사실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걸 뭐라고 그러냐? 불생, 생긴다하지만 생기는 거 아니다. 아니 불자를 써서, 불멸, 사리잔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존재자체는 본래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우리가 좁은 시각으로 어떤 사물을 보게 되면 우리 눈에 보이면 생겼다. 안보이면 사라졌다라고 하는, 이건 인식상의 문제라는 거요.

 

좀 어렵죠? 조금 더 설명을 해볼까? 그릇에다가 얼음으로 만든 구슬, 3개를 애한테 줬어요. 애가 그거 갖고 놀았어요. 3살짜리 애라면 그걸 갖고 놀다가 바깥에서 친구하고 또 놀다가 들어오니까 그릇에 얼음 구슬이 3개 있었는데 없어지고 물이 담겨있어요. 그러면 애가 뭐라고 그럴까요? “엄마, 내 구슬 없어졌어.” 이러겠죠. “그릇에 왜 물이 생겼어?” 이럴 거예요. 아이는 그렇게 사물을 볼 거예요. 왜냐하면 얼음과 물은 아이는 다르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어른은 어때요? 얼음과 물이 하나는 고체고 하나는 액체고 상태는 다르지만, 사실은 얼음이 녹아서 뭐가 되었다? 물이 되었고,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죠. 그러니 이거는 변한거지 생기거나 사라진 거는 아니잖아. 그죠?

 

그러니까 변했다. 전체를 보면 다만 변했다. 그러니까 실제는 변한 건데, 좁은 시각으로, 시간을 좁게 하거나 좁은 시각으로 보면 생기고 사라지는 거로 인식이 됩니다. 얼음이 생기고 물이 사라졌다. 물이 사라지고 얼음이 생겼다. 이렇게. 그래서 작은 눈, 좁은 눈, 즉 무지의 상태에서는 생멸이 있지만, 눈을 뜨면 지혜의 눈으로 보면, 생멸이 없다. 생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뭐할 뿐이다? 변화할 뿐이다. 이거요. 다만 변화할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존재라는 것은 뭐 할 뿐이다? 다만 변할 뿐이다. 어제 오늘 변하는 거나, 늙어가는 거나, 죽는 거나 태어나는 거나, 다만 변화할 뿐이다.

 

그러니까 자동차 부속을 해체시켜 놓으면 자동차가 없어진 거고, 조립해 놓으면 자동차가 생긴 거지. 그러나 사실은 그거는 조립했느냐? 해체했느냐의 그 관계가 변한 거 밖에 아니지. 뭔가 생긴 것도 아니고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불생불멸, 생긴 것도 아니고 사라진 것도 아니기 때문에 생겼다고 기뻐할 것도 없고, 사라졌다고 슬퍼할 일도 없다. 그래서 재행무상이다. 다만 변화할 뿐이다. 이런 얘기요. 이렇게 존재의 본질을 관조하기 때문에 이 죽음의 두려움이 없어지는 거요.

 

그러니까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어디 간다. 좋은데 간다. 어쩐다. 이런 생각 자체가 필요가 없는 거요. 왜냐하면 그런 아이디어는 다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나온 아이디어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건 독특한 거요. 그러나 종교로서의 불교는 역시 다른 종교처럼 좋은 세상이라는 아이디어, 극락이라는 아이디어를 내어서 누구나 다 거기 갈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위로를 하는 거고, 원래 부처님이 가르친 거는 불생불멸의 존재가 불생불멸임을, 즉 생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님을 깨달아서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하는 거요.

 

더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