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반야심경

법륜스님 반야심경 제23강 반야바라밀다의 진언

Buddhastudy 2017. 6. 22. 22:08


  

안녕하세요. , 오늘은 반야심경 23번째 강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지난 22회에 걸쳐서 반야심경 전체강의는 거의 마쳤습니다. 오늘은 맨 마지막, 진언에 대한 얘기만 남았는데요, 진언이라고 하는 말은 참말이다. 이런 얘기에요. 참말. 진짜 말이다. 참 말이다. 거짓말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진실한 말씀이다.

 

그런데 그게 진실하다는 정도에서 끝나는 게 아니고, 이 말은 너무나 진귀해서 어떤 기적을 불러온다. 아픈 사람이 병이 낫고, 괴로운 사람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고, 속박 받고 있던 사람이 그 속박에서 벗어난다. 최고의 기적은 해탈과 열반이죠. 이 말씀은 어리석은 중생이 깨달음을 얻어서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진언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인도말로는 다라니라고 하고요, 또 중국에서 의역을 했을 때는 뜻으로 번역했을 때는 주문이다.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우리가 천수경을 공부할 때 정구업진언이런 말이 있죠. 입을 깨끗이 하는 진언.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거짓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알게 모르게. 허황된 말도 많이 하게 되고. 그래서 입으로 지은 죄가 태산같이 크다. 그 입으로 지은 태산같이 큰 죄를 다 녹여버리는, 다 없애버리는, 그런 부처님의 진실한 말씀이다. 그게 입을 깨끗이 하는 진언이다. 이럴 때 쓰는 거란 말이오.

 

여기에서는 부처님의 모든 말씀, , 관자재보살로 시작이 된 반야심경의 전체의 말씀이 진리의 말씀이다. 우리 중생을 구제하는 말씀이다. , 어리석음에 빠져서 중생이 지금 괴로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중생이 이 어리석음에서 깨우치게 되면 이 모든 고통에서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니까 이 반야심경 전체가 진언입니다. 어느 한 자, 한 말씀, 버릴게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에서

더 엑기스를 뽑으면 어떻게 되느냐?

결국은 그 반야심경의 내용을 요약하면

중생이 해탈하는 길은

열반을 증득하는 길은 깨닫는 수밖에 없다.

깨달음을 이루어서

이 모든 고해에서 벗어나는 길 밖에 없다.

 

그런데도 중생은 어리석게,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해 질까? 지위가 높으면 행복해 질까? 인기를 얻으면 행복해 질까? 건강하면 행복해 질까? 자식이 잘되면 행복해 질까? 여러 다른 길을 헤맨다. 이 어리석음을 깨우쳐야 진정한 자유와 진정한 행복이 오는데. 그래서 이 반야심경에서는 깨우쳐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이 길만이 유일무이한 최고의 길이다. 과거의 모든 보살님이 이 길을 가셨고,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이 길을 가셨다. 그러니 오늘 우리 중생들도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의 뒤를 따라서 이 길을 가는 수밖에 없다.

 

이 가르침은 그 어떤 믿음보다도 즉, 깨우쳐서 해탈에 이르는 이것은 어떤 믿어서 기적을 일으키는 것보다도, 어떤 것을 많이 아는 것보다도, 어떤 것을 많이 행하는 것보다도, 어떤 증득하는 것보다도 이것이 가장 정확하고 최고의 길이다. 이 말씀에는 한 점 헛됨도 없다. 그 말씀은 진실하다. 이렇게 결론이 났단 말이오. 맨 끝에.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이제 마지막으로 결론적으로 우리들의 결심이 남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길을 가자. 이 길을 가자는 것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자. 이런 얘기에요. 우리 모두 이 길을 가서 우리 또한 깨달음을 이루자. 이게 결론이에요.

 

더 쉽게 요약하면 우리 모두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자. 이게 결론적인 말씀이다. 더 이상 이제 돈버는 데 너무 집착하지 말고 즉, 돈이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이것이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해결책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생활하는데 필요로 하는 것일 뿐이다. 얼마나 잘 먹냐? 얼마나 잘 입냐? 얼마나 큰 집에 사느냐? 이런 의식주,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이 행복을 담보해 주는 게 아니다. 진정으로 행복을 담보해 주는 것은 나의 무지를 깨우치는 데 있다. 그런데서 지금까지 우리가 살았던 삶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된다.

 

먹고 입고 자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한 것을 내려놓자. 내 주장이 옳다고 고집한 것, 그래서 짜증내고 화낸 것 이것도 내려놓자. 그 동안에 너무 어리석게 살았다. 환영을 쫓고, 거꾸로 살아가고, 그래서 이 탐진치 삼독을 버리자. 그리고 우리가 가야할 길은 오직 하나,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깨달음의 길로 가는 것, 이것이 수행자가 가야할 진정한 행복, 진정한 자유를 원하는 사람들이 가야할 길이다.

 

그래서 /아제아제 바라아제/ 이렇게 나온단 말이오. 인도의 원어는 /가테가테 파라가테/ 가테_가세. 가자. 이 말은 수행하자 이 말이에요. 가자_수행하자. 강조해서 가세가세, 가자가자. 어디로? 저 언덕으로 건너가자. 이 고통의 바다 윤회의 세계, 여기서만 계속 우리가 맴돌고 있다. 시소를 타듯이 오르락 내리락, 오르락 내리락. 복 좀 지어 천상에 태어났다고 입이 헤~ 벌어져서 좋아하다가 또 톡~ 내려가서 지옥에 떨어졌다고 괴롭다고 아우성을 치고, 이렇게 오르락 내리락, 오르락 내리락 하는 이 윤회의 쳇바퀴에서 벗어나자.

 

그래서 저 언덕을 훌쩍 뛰어넘어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세계 해탈의 세계로 건너가자. /바라아제/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바라아제는 파라가테인데 파라라는 것은 저 언덕이다. 저 언덕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세계, 열반의 세계, 해탈의 세계, 고통이 없는 세계, 자유의 세계, 기쁨의 세계, 정토의 세계, 이런 세상이오. 그럼 그의 상대에서 말해지는 이 언덕, 차아는 뭐냐? 그것은 어둠의 세계, 고통의 세계, 윤회의 세계, 중생의 세계, 예토, 이런 세계란 말이오. 그러니까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우리가 나아가자.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 깨달음의 세계로 가자.

우리의 인생의 목표를 열반에 두자.

인생의 목표를 해탈에 두자.

참자유를 증득하는데 두자.

 

이 돈 얻는데, 그저 집 사는데

여기에만 몰두하지 말고.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가치가 뭐요?”

잘 사는 거요?”

어떤 게 잘 사는 거냐?” 소비를 많이 해야 돼.

 

집도 크고, 음식도 많고, 옷도 많고, 신발도 많고, 차도 많고, 크고, 많고 좋아야 돼. 이것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발전, 발전했다. 그것은 많이 생산해서 많이 소비하는 게 잘사는 거다. 이런 얘기요.

 

결국 어린아이에게

너 소원이 뭐냐?” “공부 잘하는 거요.”

공부 잘해서 뭐할래?” “그래야 좋은 대학 가죠.”

좋은 대학 가서 뭐할래?” “그래야 좋은 직장 가죠.”

좋은 직장 가져서 뭐할래?” “그래야 돈 많이 벌죠.”

돈 많이 벌어서 뭐할래?” 이게 소비에요.

 

큰 집도 사야 되고, 좋은 옷도 입어야 되고,

맛있는 음식도 먹어야 되고, 해외여행도 가야되고,

 

이런 얘기는 결국은 소비가 많아야 된다.

소비 수준을 높여야 된다. 양도 질도 높여야 된다.

 

그러니까 소비하는 것,

많이 소비하는 것이 잘 사는 거다.

 

우리도 옆집과 비교하면서 어떤 게 잘 사는 거요? 많이 소비하는 거요. 많이 소비하려니까, 뭐가 있어야 됩니까? 많이 가져야 되겠죠. 그 소비물품을 구입할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된단 말이오. 옛날에는 많이 소비하려면 그 재화의 원천이 뭐요? 땅이잖아. 땅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돼. 거기서 생산물이 나오니까. 지위가 높은 것도 왜 그래요? 그 지위 자체도 하나의 중요한 것이지만, 지위가 높으면 뭐도 많다? 수입도 많아지죠. 그래서 결국은 소비를 많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선진국이 되었다하는 것은 소비수준이 많이 높아졌다. 소비를 담보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생산을 해내야 되겠죠. 그래서 핵심은 대량소비입니다. 이 대량소비를 담보하기 위해서는 대량생산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목적으로 생산해서는 대량생산을 못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기계화해서 대량생산을 한단 말이오. 대량생산을 하니까 원자재가 많이 쓰일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자원고갈에 이를 수밖에 없다. 필연적이에요. 자원이 고갈해 간다.

 

그런데 지구자원이라는 것이 무한하다고 생각했단 말이오. 왜냐하면 지구 자원이 재생되는 것이 우리가 쓰는 양보다 많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써도 지구자원이 재생되는 것 보다 더 적을 때는 지구 자원이 무한하다하는 말이 맞았어요. 그런데 워낙 우리가 많이 쓰다 보니까, 이 자연생태계에서 재생하는 것 보다 우리가 쓰는 게 더 많아지면 재고가 점점점점 줄어들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수십 억년간 쌓아온 재고가 우리가 최근 100년간에 지나치게 씀으로 해서 재고가 점점점점 줄어들어서 요즘 일부는 바닥이 날 지경에 이르렀어요. 그러면 자원부족이 일어나요. 더 가면 자원 고갈이 되는데, 자원부족이 일어나니까 결국은 원자재 값이 오를 수밖에 없겠죠.

 

옛날에는 이렇게 되면 전쟁을 해서 전복을 해서 그쪽사람은 못쓰게 하고 우리만 쓰면 되요. 이것이 1차 세계 대전, 2차 세계 대전, 이렇게 전쟁이 계속된 역사란 말이오. 그런데 오늘날은 그렇게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총칼대신 뭐로 합니까? 돈으로 한다. 값을 올리는 거요. 값을 올리면 돈 있는 사람은 사지만, 돈 없는 사람은 못 사게 되죠. 결국 물건 값이 올라갑니다. 옛날에는 물건 값을 올릴 필요가 없어요. 그렇게 못하니까 물건 값을 올려서 부유한 나라들은 살 수 있고, 가난한 나라는 결국 살 수가 없는, 이런 경향으로 가니까. 지금 석유도 부족하니까 석유 값이 폭등을 하고, 곡식도 부족하니까 곡식 값이 폭등하고, 철강도 값이 오르고, 석탄도 값이 오르고 다 이렇게 오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똑같이 우리 국민소득이 1인당 2만 불이라 하더라도 물건 값이 배로 올라버리면 실질 소득은 어떻게 되어버립니까? 만 불이 되어버리겠죠. 그런데 돈을 다 절반 내놔라. 그러면 사람들이 엄청난 저항을 하는데, 물건 값이 올라서 실질 소득이 절반이 되는 것은 사람들이 저항이 좀 적어요 그래도. 지금 이런 현상이 일어나니까, 여러분이 아우성인 것은 실질 소득이 줄어든다. 내 돈을 누가 가져간다. 이런 얘기에요. 그런데 이것은 필연적이에요.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유럽 국가들만 이런 식으로 재화를 독점했거든요.

 

그러다가 일본이나 아시아의 일부국가, 우리 같은 나라까지도 여기에 끼었단 말이오. 그래서 우리가 목에 힘주고 살았잖아요. 그런데 중국과 인도가 두 나라 합하면 인구가 25억이오. 지금까지 썼던 모든 나라와 맞먹는 나라요. 여기도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따라왔단 말이오. 이렇게 되니까 자원고갈현상이 일어나는 거요. 이것은 갈수록 심해집니다. 일부 주춤할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건이 부족하다하니까 겁을 내어서 매점매석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더 폭등했는데, 이게 조금 도로 떨어질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계속 올라갈 수밖에 없다. 이게 현실이에요. 결국은 그래서 자원고갈정도에 가면 어떻게 되겠어요? 돈 갖고 해결이 안 되면 이제 전쟁이 일어나겠죠. 으흠. 그 중간에는 가난한 사람들은 굶어죽든지, 이제 생존만 유지하든지, 잘 산다는 희망이 없어지면 엄청나게 상실감에 빠지겠죠. 그러면 자포자기 하게 되면 또 사회가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만 있는 게 아니고, 대량소비를 하게 되면 뭐가 생겨납니까? 대량으로 쓰레기가 생겨나죠. 그 쓰레기라는 것은 꼭 눈에 보이는 고체만 말하는 게 아니라, 액체도 그렇고, 기체도 그렇고, 많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환경오염이다.

 

우선 우리들의 먹거리가 오염이 되고, 공기가 오염이 되고, 그래서 우리 건강이 나빠지죠. 더 나아가서는 이것이 자연을 오염시키죠. 자연을 오염시키니까 자연에 있는 생명들이 죽게 되죠. 그러면 곡식의 소출이 떨어지죠. 그러니까 우리들이 사는 이 삶의 토대가 망가진다. 이 말이오.

 

여기서 내가 하나 더 가면 뭐요? 오존층이 파괴가 된다. 그래서 자외선이 우리에게 막 다가오니까, 피부암이라든지 이런 위험에 빠지게 되고, 지금처럼 온실가스의 증가로 인해서 온실효과가 나타나고 그래서 기온이 상승되고, 그러다보니까 기상이변이 일어나죠. 요즘은 특히 눈에 많이, 우리가 경험할 정도죠. 이게 미래의 일이 아니고 바로 닥칠 일이란 말이오.

 

그러니까 대형수제 화제 지진 가뭄 이런 게 막 일어난다는 거요. 그럼 이것이 또 농업생산을 저하시키는 요인이 되죠. 그러니까 기름 값이 올라서 트랙터 이용료도 오르고, 비료 값도 오르고 그래서 농업생산 원가가 오르는데 따라서 곡물 값이 올라야 되는데, 또 너도나도 많이 먹고 많이 갖다 버리니까 또 수요가 많아서 오르는데다가 이번에는 또 홍수피해 가뭄피해로 인해서 공급생산량이 떨어지니까 또 값이 오르니까 이 보통일이 아니죠. 우리는 어느 정도 수입이 있으니까 2~3배 오른다 해야 사는데 지장이 없는데, 하루 벌어서 겨우 먹고 사는 사람은 음식 값이 2~3배 올라버리면 세끼 먹던 거 두 끼 먹어야 되고, 두 끼 먹던 거 한 끼 먹어야 된다는 거요. 그러다 굶어 죽어야 된다.

 

이게 필연적이다. 그러니까 약한 고리에서 먼저 굶어죽는 사람이 생긴다. 그러니까 경제가 가장 곤궁한 북한 같은 데에서 지금 굶어 죽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북한만이 아니라 조금 더 있으면 지금 가난한 나라들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나올 거요. 지금은 식량파동으로 난리를 피우지 않습니까? 거기서 곡물 값이 더 오르면 굶어죽는 사람이 생겨나게 되죠. 그러나 아직은 우리는 그래도 그거 뭐 전체 생계비 중에 쌀값 좀 올랐다고, 밀가루 값 올랐다고, 라면 값 좀 올랐다고 지금 사는데 크게 지장이 없단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는 한족에는 많이 버리게 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음식이 없어서 굶어죽게 되고, 한쪽에서는 너무 먹고 살쪄서 살 빼는 데도 또 돈 들어야 되고, 한쪽에서는 영양실조 걸려서 그 영양 보충하는데 또 돈 들고, 이런 모순이 가중이 된다. 그런데 이런 모순이 이제는 우리 전체, 가난한 사람만의 위기가 아니고 부자를 포함한 사람까지의 위기로 닥쳐오게 된다. 그러나 순서로 보면 어느 쪽이 먼저 죽습니까?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같은 나라 안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죽고, 그래서 부자들은 , 우린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곧 뒤 따라 올 일이다.

 

지금 자연 환경을 파괴함으로 해서 미생물들이 먼저 죽고, 작은 물고기들, 벌레들이 먼저 죽고, 그 다음에 그다음이 죽고, 그다음이 죽고, 이렇게 올라올 동안에 인간은 까딱없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에게까지 미치게 된다. 이게 지금 우리들이 욕심을 중심으로 해서, 욕심을 채우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의 귀결이에요. 이 종말이, 이 마지막이 앞으로 10년 후에 올지, 20년 후에 올지, 100년 후에 올지 모르지만, 이것은 인연과보로 따지면 필연적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좀 바꾸어 나가자. 또 그 과정에서 갈등이 생지기 않을 수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그러한 생존에 토대가 허물어지는 종말이 오기 전에도 우리는 그 갈등 속에서 괴로워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경쟁이 치열해 지잖아요. 경쟁이 여러분들 살아오면서 요 한 30년 살아오셨는데, 철 들고 말이에요. 갈수록 경쟁이 치열합니까? 경쟁이 약해집니까? 요 몇 년 사이에 더 치열하죠. 왜 이럴까? 이것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쟁탈전에 점점 세게 붙는 경우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쟁도 치열해지고, 개인과 개인 사이의 경쟁도 치열해 집니다. 그러다 조금 더 가면 싸움으로 갈 수 밖에 없고, 이렇게 되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공생공영,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살고, 함께 번영을 누린다. 하는 것은 이것은 맞지가 않다. 이 말이오. 이것을 미리 우리가 깨닫고 여기에 대응을 하면 이 재장을 막을 수가 있고, 우리가 어리석어서 끝까지 가게 되면 결국은 공멸하는 쪽으로 가게 된다. 이것을 깨우쳐야 되요. 그럼 이것을 깨우치는 게 바로 반야란 말이오. 이런 것을 깨우치는 게.

 

부부지간에 내가 너무 나를 고집함으로 해서 결국은 부부의 갈등을 일으키고, 부부의 갈등이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고, 그래서 내 인생이 괴로워지는, 이것도 어리석음이지만, 크게는 오늘 인간이 살아가는 이 삶의 길, 방향, 이것도 어리석은 길이다. 이런 얘기요. 이런 것을 우리가 깨우쳐야 되요. 그러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이

혼자서 가만히 앉아서 명상만 하는 거다.

그래서 보지 않고 듣지 않아서 마음이 편안한 게 해탈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너무 적은 부분만 이해한 거요.

 

그럼 부처님이 중생을 구제한다. 중생의 병을 치유하는 대의사다 이런 얘기는 할 필요가 없는 거요. 그런 데에서 우리의 이런 어리석은 삶의 길에 대한 깨우침이 있어야 된다. 이것이 예를 들면 쥐가 쥐약을 먹는, 배고프니까 일시적으로는 좋지만 결국은 배가 아파서 죽게 되는, 물고기가 낚싯밥을 무는 것과 같다. 이게 전도몽상이란 말이오. 이러한 삶에서 우리가 깨어나야 된다. 깨어나서 우리가 먹는 것은 얼마만큼만 먹으면 된다? 건강을 유지하는 정도로 먹으면 되겠죠.

 

혓바닥에 집착에서 먹으면 안 된다.

맛에 집착하게 되면 결국 과소비를 하게 되고,

몸도 해치게 된다. 버리는 것도 많아지고.

 

예를 들어서 고기를 안 먹는 게 제일 좋습니다. ? 소가 옥수수를 먹고 보리를 먹어서 소고기를 생산하려면 곡류를 4Kg 제일 적어야, 많게는 8Kg 10Kg 먹어야 살이 1Kg 찐다. 그럼 내가 살코기 1Kg를 먹는 것은 곡류를 4Kg에서 8Kg 먹는 것과 같다. 그만큼 그게 과소비 하는 거요. 그런데 소를 한 마리 잡았다면 또 그것을 알뜰히 하나도 없이 다 먹으면 괜찮은데, 맛에 집착해서 갈비만 좋아한다. 등심만 좋아한다. 뭐만 좋아한다. 이렇게 먹고 나머지는 버린다. 그러니까 절반을 버려버린다.

 

그런데 고기 먹기를 즐겨서 고기는 많이 먹고, 그러니까 곡류는 더 많이 들겠죠. 그러니까 버리는 것은 많아지죠. 그러니까 이게 생산원가를 맞추고 하려면 어떻게 되겠어요? 버리는 소에 고기 찌꺼기들을 갈아서 사료에다 타 먹인다 이 말이오. 그러면 살도 빨리 찌고, 사료도 절약하고, 쓰레기도 적게 나오고, 생각은 다 잘한 거요. 나름대로. 그런데 그게 소가 소고기를 먹으니 여기에 이상이 안 생길 수가 없다. 이게 다 우리가 자초한 거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어리석다.

 

우리의 죄, 우리의 잘못을 돌아보고 문제를 근원적으로 보려고 안하고, 장사꾼은 어쨌든 팔아먹는 데만 신경을 쓰고, 소비자는 자기 건강 안 해치고 손해 안 보려고 싸운다. 결국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소고기를 안 먹든지, 소고기를 적게 먹어야 됩니다. 적게 먹으면 결국은 값이 떨어지고 떨어지면 먼데서 들여오거나 곡류를 먹여서는 수지타산을 못 맞추겠죠. 그렇게 되면 조금씩 풀 뜯어 먹이는 것만 해도 우리들이 먹는 게 충분해 진다. 이렇게 되면 이런 위험문제는 발생하지 않죠. 모든 게 이런 과욕이에요.

 

오늘날 우리가 이런 문명적 재앙을 입는 것도 다 이게 우리들의 과욕이다. 이게 어리석음이다. 그러니까 이런 어리석음을 우리가 깨우쳐야 되는 거요. 그러면 결국 내 건강도 좋고, 현재 있는 이웃들과 나눠가지게 되고, 그리고 미래의 우리 후손들이 쓸 자원을 남겨놓게 되고, 그러니까 나도 편안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아지고, 미래 우리 후손들도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진다. 이런 것을 깨우치고 알아야 된단 말이오.

 

우선 정신적으로 깨우쳐야 되잖아. 그래서 첫 번째가 깨우침이란 말이오. 그리고 이런 깨우침을, 이런 진리의 길을 주위사람들에게 전해야 된단 말이오. 이게 정법이란 말이오. 그런데 아직도 어리석어서 깨우치지 못한 사람을 깨우치는 게 정법이고, 거기에서 그 어리석음 속에서 희생되어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 있단 말이오. 음식도 없는 사람이 있다. 그럼 일단 음식을 나눠줘야 된다. 병이 들었는데 치료 못 받는 사람이 있다. 그럼 치료를 해줘야 된다. 아이들이 초등학교도 못 간다. 그러면 배울 기회를 줘야 된다. 이게 자비란 말이오.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을 감싸 안고 우리가 함께 나아가야 된다.

 

나만 깨우치고 나만 가면 되느냐가 아니다. 내가 깨우쳐서 내가 행복하고, 어리석은 자에게 이 깨우침을 전해줘야 그들을 깨닫게 해줘야 되고, 또 이 중생의 세계에서 뒤쳐진 사람, 고통 받는 사람은 깨닫기 이전에, 깨우쳐주기 이전에 뭐부터? 밥이 없는 사람 주린 사람은 먹게 해줘야 되고, 병든 사람은 치료해줘야 되고, 어린 아이는 최소한도 배우게 해줘야 되고, 외로운 자는 위로해줘야 되고. 이렇게 감싸 안아서 생존을 영위하도록 해주고, 그다음에 또 그들도 깨우치도록 해주고 이게 부처님의 삶이셨어요.

 

젊은 시절에는 온갖 것을 다 가지셨지만 행복하지 않았어. 그래서 행복을 찾아 모든 것을 버리고 용맹정진 하셔서 마침내 깨우침을 얻었고, 깨우치고 난 뒤에는 어리석은 자를 위해서 평생을 깨우치는 법을 전했고 그 과정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다 보살펴가면서 한평생을 살아가셨다. 그 가셨던 길을 우리도 따라가자. 지금 이런 얘기에요. 그래서 이 가르침을 다 듣고 보니 첫째가 뭐다? 깨달음의 길로 가자. 그래서 가세가세, 가자가자. 어디로? 저 언덕으로. 저 언덕이 바로 부처님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가세가세 저 언덕으로 건너가세.

 

그 다음에 /바라승아제/ 이렇게 되어있죠. 그대로 고치면 파라상가테에요. 파라_저 언덕, 가테_가자, 그러면 저 언덕에 가자. 저 언덕에 가자가 두 번이 아니에요. 앞에는 저 언덕에 가자이고, 두 번째는 파라상가테_저 언덕에 도달 하였다. 저 언덕에 도달하여. 이런 뜻이에요. 저 언덕으로 가자 이 말이고, 두 번째는 저 언덕에 도달하여, 저 언덕에 도달하여 뭐 해야 되겠어요? 깨달음을 이루어야 되겠죠. 그러니까 /모지사바하/ 보디스바하 깨달음을 이루세. 우리들의 궁극적이 목표가 깨달음을 이루는 게 목표요.

 

그래서 요약이 딱 되어 있단 말이오. 깨달음을 이루자. 이게 우리 인생의 목표다. 그러면 깨닫는다 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데, 깨닫는 것이 목표라고 하지만, 깨달으면 어떻게 된다고 그랬어요?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다고 했죠.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 오온이 모두 공함을 밝게 비추어 보시고, 즉 깨달음을 얻으시니 /도일체고액/. 마찬가지로 모든 보살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원리전도몽상하니 구경열반했다. , 모든 괴로움이 사라졌다. 행복해졌다. 여러분들이 깨달음을 이루면 거기는 바로 진정한 자유, 참자유와 참행복이 있다.

 

참자유라면 어떤 걸까?

내가 하고 싶은 데로 되는 게 참자유일까?

내가 원하는 대로 남편이 다 내말 듣고,

자식이 내 말 듣고, 세상이 내 원하는 대로 되고, 그렇지 않다.

 

참자유라는 것은 모양 없는 물처럼

그릇 따라 그 모양을 바꾸듯이

라고 하는 고집, 어떤 정형이 없어서,

어디를 가도 물이 스며들 듯이

이렇게 걸림 없이 되는 게 자유다.

 

산에 가면 산이 좋고,

바다에 가면 바다가 좋고,

집에 오면 집이 좋고,

돈이 없으면 수행하기 좋고,

돈이 있으면 베풀기 좋고.

 

지위가 높으면 포교하기 좋고,

지위가 낮으면 인욕하기 좋고 하심하기 좋고,

그 어떤 주어진 조건이든

다 이렇게 자신을 자유롭게 행복하게 하는

하나의 기회가 된다.

 

그래서 우리 유마거사님같은 경우는 몸이 아프니까 아이고 포교 못한다. 봉사도 못한다.” 그러지 않죠. 아픈 몸을 이용해서 그것을 도구로 써서 이 몸이라는 게 얼마나 무상하냐?” 하는 것을 보여주는 도구로 썼다. 이 말이오. 이렇게 뭐든지 다 쓸 수가 있다. 내가 설령 죽는다면 내 몸이 얼마나 무상한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된다.

 

뭐든지 다 중생을 이롭게 하는 그런 도구가 될 수가 있다. 여러분들이 가진 재능, 여러분들이 가진 육신, 하나도 버릴 게 없다. 다 이것으로 우리는 진리를 구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쓸 수가 있다. 이렇게 되면 삶이 자유로워진다.

 

그러니까 남편이 내 말을 안들을 때, “왜 내 말을 안 듣느냐?” 이것을 갖고 답답해하면 괴로움에 빠지고, 남편과 내가 같이 고집을 하는 내 모습을 보고, “, 내 고집하는 것을 놓으라고 저렇게 나를 테스트하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내가 한번 놓아보면 어때요? 그를 두고도 내가 어떻게 된다? 자유로워지겠죠. 이런 자유를 만끽한다. “, 일체가 마음이 짓는 거구나.”하는 것을 확인한다. 이렇게 내가 숙이게 되면 시간이 흐르면 그도 숙이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이겨서 상대를 제압하려는데, 져서 다시 이기는 길이 있구나.” 이렇게 또 공부를 하게 된다.

 

그러니까 어떤 주어진 일들이 다 자신의 수행에 소재가 된다. 이 말이오. 꼭 세상을 등지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아무도 없는 데서만 수행을 하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과제삼아서 우리가 수행을 해나갈 수 있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가세가세 저 언덕으로 건너가자 할 때 저 언덕은 이 세계가 아닌 저 세계, 죽어서 가는 어떤 세계나, 안 그러면 현재가 아닌 먼 미래, , 타방정토나 미래정토가 아니라 지금 내가 갈 수 있는 세계, 한 생각 돌이키면 내가 도달 할 수 있는 세계, 유심정토다.

 

그런 세계로 우리가 나아가자. 우리가 그런 세계에 도달해서 이런 수행방법으로 우리가 참자유를 얻자. 진정한 행복을 얻자. 그럼 참자유와 진정한 행복을 얻는데만 끝나는 게 아니에요. 바로 우리가 중생과 더불어, 함께 공생 공영하는 세계로 나아가자. 그러니까 이 몸과 이 재능을 이용을 해서 어리석은 자는 깨우치는데 쓰고, 배고픈 자에게는 내가 양식이 되고, 병든 자에게는 내가 양약이 되고, 이렇게 자신을 도구화한다. 이것을 우리가 중생에게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뭐한다? 보살이 화현을 한다. 이렇게 말해요.

 

나는 뭐 꼭 법사다. 나는 뭐다. 이렇게 정해져 있지 않아요. 여러분들이 화현을 하는 거요. 그러니까 부모가 필요한 어린아이에게는 나는 뭐로 화현한다? 그의 엄마로 화현을 한다. 아내가 필요한 남편에게는 나는 아내로 화현을 한다. 자식이 필요한 노인에게는 나는 자식으로 화현을 한다. 이렇게 이 세상에 여러 종류의 주어진 그런 환경에 따라서 우리는 역할을 하는 거요. 그래서 불보살을 뭐라고 그래요? 천백억 화신이다. 이렇게 말하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모습으로 화현을 한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나는 뭐다라고 정해져 있잖아요. 그런데 정해져있지 않다. 인연을 따라 몸을 나툰다.

 

한량없는 모습으로 몸을 나툰다. 가는 티끌 수만큼, 가는 티끌이 뭐요? 진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가는 티끌만큼 몸을 나투어서 중생을 구제하기도 하고, 천백 억 가지 수로 몸을 나투어서 중생을 구제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불자가 힘이 있는 거요. 그러니까 이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다 듣고 나서 딱 결론이 뭐요? , 이제 더 이상 말할 필요 없다. 어디로? 깨달음의 길로 가자. 깨우침의 길로 우리가 수행에 매진하자. 그리고 그는 정진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이 좋은 법을 이 세상에 널리 전하자. 그리고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를 하자. 이런 얘기에요.

 

그러니까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스바하/ 는 목소리를 줄여서 힘없이 읽어야 되겠어요? 목소리를 크게 힘 있게 읽어야 되겠어요? 힘 있게 읽어야 돼. 내용을 모르니까 그냥 입에 넣어서 궁시렁궁시렁 이렇게 마친다. 앞에 내용을 알고, “, 이러니까 결론적으로 결국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밖에 없구나.” 이렇게 되는 거란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