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네, 오늘은 반야심경 21번째 강의 시간입니다. 지난번 시간에 반야사상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즉, 반야바라밀다 수행이 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수행법이다. 그것을 강조해서 관자재보살님만이 아니고, 모든 보살님들이 다 이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해서 깨달음의 길에 이르렀다. 보살들만이 아니고, 과거 현재 미래, 모든 부처님들도 다 이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닦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이 말은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반야바라밀다 수행이 가장 위대한 수행법이다. 최고의 수행법이다. 이런 얘기에요.
그래서 그 다음 문장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고지/ 그러므로 알아라. 그러므로, 이 말은 앞에 있는 얘기에요. 모든 보살이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해서 마침내 열반에 이르렀고, 모든 부처님들도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이런 까닭으로, 이 말이죠. 그러므로 알지어다.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시대신주/라는 것을 그대로 번역하면 ‘이것은’, ‘이것은’이라는 말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큰 신비한 주문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큰 신비한 주문이다. 그럼 어떤 것이 신비하냐? 이 세상에서 신비하다. 신비한 것은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말해요.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이것보다 더 좋은 게 없다. 그게 믿음입니다. 진실한 믿음은 하늘을 감동시켜서 우리 사람들이 생각도 못할 그런 기적을 불러온다. 그러니까 간절한 믿음, 진실한 믿음이 가져오는 그 어떤 기적보다도 더 큰 기적을 불러오는 가르침이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그 다음 것은 /시대명주/이 큰 밝은 주문이며, 가장 밝다. 밝은 게 뭐요? 사람들이 보통 말할 때, “야, 그 사람한테 물어보면 훤히 안다.” 훤히 안다. 안다는 것이 가장 잘 알 때, 훤히 안다. 아주 밝게 안다. 그러기 때문에 두 번째는 앎을 말합니다. 해를 말한다. 훤하게 아는 거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아는, 가장 밝게 알아서 이루어놓은 그 어떤 것보다도 깨달음보다 더 밝게 아는 것은 없다. 깨달음이야 말로 가장 밝게 아는 가르침이다.
그다음에 /시무상주/ 무상_이것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 가장 높다. 높다 낮다를 말할 때는 실천의 단계를 말할 때 높다 낮다는 말을 씁니다. 1단계, 2단계, 3단계, 5단계, 10단계, 이런 말을 쓰죠. 그래서 보살의 수행에도 52계위가 있거든요. 초발심보살이 첫 번째 시작해서 부처를 이룰 때까지 52위가 있단 말이오. 이것도 다 단계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실천을 통해서 수행을 통해서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렀다. 최고 높은 단계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확연히 깨쳐버리는 것 보다 더 높은 실천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궁극적으로 깨치는 것이 최고의 높은 단계의 실천이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 깨달아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깨쳐버리는 이 반야의 행은 실천 가운데 가장 높은 실천이다.
그 다음에 /시무등등주/ 무등등, 등등이라는 것은 같다는 뜻이에요. 무등등은 같지 않다. 비교할 것이 없다. 그리고 뭔가 얻었을 때, 뭔가 얻었다. 그랬을 때 비교하잖아요. 우리가 보통 돈이 많다 그럴 때 누가 더 많냐? 비교하죠. 신통을 얻었다. 그러면 누구 신통이 크냐? 뭘 얻었다 할 때는 그것을 비교해서 누가 더 큰가, 이것을 반드시 비교합니다. 바로 도를 증득했다. 어떤 도를 증득했다 할 때, 그럼 어느 도가 더 높나. 이렇게 비교를 한단 말이오. 깨달음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 즉, 비교할 것은 없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을 천상천하 무여불, 이런 말을 한단 말이오. 하늘위에 하늘 아래 신들과 인간계를 통털어서 부처님과 비교될 사람이 없다. 비교될만한 존재가 없다. 이 말은 부처님이 가장 위대한 분이다. 이런 얘기에요.
그것처럼 이 세상에 그 어떤 종교적인 체험, 수행적인 체험, 그래서 궁극적으로 도를 얻었다 하더라도 반야바라밀을 증득한 것보다 더 높다고 말할 수 있는, 비교할 수 있는 그런 도를 증득함은 없다. 그래서 여기 4가지를 말해놓습니다. 이 4가지는 반야바라밀다가 가장 위대하다 하는 것을 말하는 거요. 그래서 이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우리가 진리로 나아가는 데는 4가지가 필요하다. 이것을 한문으로 말해서 신해행증,
신_믿음, 우리가 수행을 하는데 진리로 나아가는데 첫째 믿음이 굳건해야 됩니다. 믿음이 기초가 되어야 된다. 신심이 있어야 된다. 굳건한 믿음이 있어야 된다. 두 번째가 믿음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믿음은 큰데 만약에 어리석으면 어떻게 되느냐? 그러면 맹신이 된다. 눈이 없는 믿음이 되어버린다. 큰 부작용이 생깁니다. 미신이 된다. 어리석은 믿음이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차가 성능은 좋은데, 만약에 길을 잘못 들거나 운전을 서툴게 되면 큰 사고를 불러일으켜요. 그래서 맹신이다. 미신이다. 하는 것은 올바른 앎이 없다. 그래서 올바른 앎이 있어야 됩니다. 첫째가 믿음이라면 둘째가
해_올바른 앎. 어떤 종교에서는 믿음만 중요시하지 앎을 중요시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맹신이나 미신에 떨어진다. 그런데 또 반대로 앎만 중요시 하지 믿음이 없다 그러면 지식이 되어버리고 철학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알음알이다. 알기만 많이 안다. 믿음은 부족하고, 실천도 부족하고. 그러기 때문에 이 신해가 믿음과 이해가 함께 이루어져야 그것이 바른 믿음이고 바른 앎이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어.
행_실천. 국건한 믿음, 올바른 앎, 이것만 갖고 안 돼요. 그것을 실제로 행해야 돼. 자기가 경험을 해봐야 돼. 실천을 해야 된다. 실천 없는 앎이라는 것은 그것은 소위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사람이라 하지만 그것은 죽은 거와 같은 거요. 시신에 불과하듯이. 그래서 실천이 있어야 됩니다.
증_그런데 부지런히 실천을 하는데 부지런히 행하기는 하는데, 그것을 통해서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한다면, 실제로 자기가 그 이익을 얻지 못한다면, 일은 열심히 하는데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의미가 떨어진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자기가 진지를 증득해야 된다.
그래서 이 4가지를 신-해-행-증, 굳건한 믿음-올바른 이해-바른 실천-스스로 경험해서 체득해야 된다. 이래야 이게 참으로 진리라고 말할 수가 있다.
여기에 두 번째는 주에요. /주/ 이 주가 무슨 말이냐? 주. 원래 인도말은 다라니입니다. 다라니. 범어에 다라니에요. 이 다라니를 중국에서 번역을 할 때, 이 번역이 어렵기 때문에 그냥 인도말로 다라니, 이렇게 그냥 쓰기도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다라니라고 그냥 쓰죠? 그런데 이것을 중국말로 번역할 때는 직역을 한 게 있고 약간 의역을 한 게 있습니다.
그 다라니를 소리 내어서 그대로 음역을 하면 다라니가 되고, 그것을 직역하면 진언이 됩니다. 다라니라는 말은 진실한 말씀이란 뜻이에요. 우리가 사람이 하는 말에도 진실한 말, 정말 엑기스 같은 그런 말이 있고, 허풍, 거짓, 쓸데없는 말도 있잖아. 그죠. 그래서 말이 많다고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오. 곧고 중요한 진실한 말이 중요하잖아요. 그 진실한 말, 즉, 부처님의 말씀은 우리를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우리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모든 번뇌를 여의게 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부처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 그 어떤 말씀보다도 진실하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뭐라고 한다? 진언이다. 다라니라고 말해요.
자, 그러면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라는 것이 왜 갑자기 이런 말이 나왔을까? 반야심경 읽다가. 사실 좀 해석하기 어려운 얘기에요. 이것은 반야바라밀다가 참으로 위대한 수행법이다.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것은 그 어떤 믿음보다도 더 신비하고, 어떤 앎보다도 더 밝은 앎이고, 어떤 실천보다도 더 높은 실천이고, 어떤 체험보다도 비교할 바 없는 최고의 체험이다. 뭐가 그렇다는 거요? 반야바라밀다가. 깨달음이라는 것이. 그래서 신해행증을 등장시켜서 말을 하다보니까, 이렇게 신비하다. 밝다. 높다. 비교할 바 없다. 이렇게 나온 거요.
그리고 이 주는 어떤 그런 이상한 주문이라는 개념보다는 여기서는 부처님의 참으로 진실한 말씀이다. 이 진실한 말씀이라는 것은 우리를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게 하는 말씀이다. 꿈에서 깨버리게 하는 그런 말씀이다. 이런 뜻이에요.
자, 이렇게 대강의 내용으로 설명해 두고, 다시 돌아와서 왜 기적이 일어나려면 간절한 마음, 진실한 마음만이 기적을 불러오는가. 이런 문제요. 우리 옛말에도 사람이 너무 지극하게, 간절하게 기도하면 천지신명이 감응을 한다. 이런 말 들어보셨죠. 적어도 내가 어떤 소원이 있고, 이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내 힘이나 능력으로 도저히 불가능하다. 나아가서는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병이 났는데 의사가 치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거요.
큰 자연, 재난이 일어난다. 사람이 막을 수가 없다. 이럴 때 우리가 “아, 저 굶어죽는 동포를 살리자.” 이러는데 호소해도 해결이 안 된다. 이럴 때 우리가 말하는 기적이 일어나야 된다. 기적이. 이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도록. 이럴 때 우리가 말하는 기도가 필요하죠. 기도. 이런 기적이 일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첫째 마음이 간절해야 된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기도를 해보면 마음이 그렇게 간절 안하죠. “우리 아들 대학시험에 걸렸으면 좋겠다. 좋은 대학에 갔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은 있지만, 108배하면 갈 수 있다하면 가지만, 하루에 3천배하면 갈 수 있다. 하면 “아이고, 다리아파 도저히 못하겠다.” 그러면 이것은 “진짜 간절한 것은 아니다. 그거 되면 좋지만, 안 되도 살 수 있다.” 이런 얘기요.
이렇게 우리들의 마음은 간절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가 진짜 되려면 욕심은 간절해 질 수가 없습니다. 욕심을 얻기 위해서 즉, 복권을 사서 당첨을 되게 해 달라하고 기도할 때는 그렇게 해서 좀 편하게 살고자 당첨되려고 하는 거 아니오. 그런데 죽을 고생해 가면서는 그거 하려는 생각이 없다. 이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욕심으로 하면 안 된다 하는 이유가 욕심으로 하면 올바르지도 않고, 두 번째는 욕심은 정말 간절해지지가 어렵다. 이런 얘기요. 여러분들 해보시면 알 거에요.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죽기 살기로는 하기는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간절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되면 좋지만 안 되도 그만인 거요.
그런데 옛날에 천지신명이 감동을 한 얘기, 옛날 얘기를 한번 들어봅시다. 부모가 병이 났다. 어떤 약도 효험이 없다. 그러면 대부분 포기합니다. 명의가 와서 진찰을 하고, 그리고 온갖 약을 처방해도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란 말이냐. 옛날에는 이 부모가 병나면 그것을 간호해야할 책임이 첫째한테 있습니다. 자식 중에 그죠? 부모가 병이 나면 책임은 자녀한테 있고, 자녀가운데에서도 첫째한테 있다. 첫째가 능력이 없으면 둘째한테 있다. 셋째나 막내는 책임을 안 져도 된다는 얘기요.
그런데 옛날얘기 보면 부모가 병이 나서 도저히 치료를 못할 때 가족이 다 포기했는데 막내아들이라든지 아니면 막내딸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면 딸이 더 책임이 없는 사람이오. 그런 셋째 딸이, 또는 막내딸이 그 부모 약을 구하기 위해서 살려달라고 매달리니까 의사가 뭐라고 그럽니까? “백년 묵은 산삼을 구하면 살릴 수 있다.”라든지, 안 그러면 “눈 속에서 꽃이 피는 그런 약초를 구하면 살릴 수 있다.” 그것은 사실 불가능한 거란 말이오. 그런데 막내딸이, 또는 막내아들이 계곡을 넘고 산을 넘고 눈 속에서 다니다가 결국은 눈 속에 꽃이 피는 것을 구한다든지, 백년 묵은 산삼을 구해오죠. 이럴 때 꿈에 누가 나타납니까? 산신령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구한단 말이오.
이런 얘기들이 왜 생기느냐? 마땅히 자기가 해야 할 사람이 하는 것은 그것은 기적을 불러오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막내딸이라든지 막내아들이라든지 이런 것은 사실은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오직 부모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할 때,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 이게 바로 천지신명이 감동을 했다. 이런 얘기죠. 기적은 이런데서 일어나는 거요.
그러니까 이렇게 간절해지면 어떠냐?
욕심이라는 게 다 없어져버립니다.
‘나다’ 하는 것도 없어져버려요.
그리고 이러면 될까? 안 될까? 하는
못 믿는 마음, 불확실한 마음도 없어집니다.
다른 사람은 안 되지만 이 사람은 되어야 되는 거요. 될 수밖에 없는 거요. 안 될 수 있다. 이런 생각 안하는 거요. 이게 바로 간절함이다.
그래서 우리가 옛날에 기도할 때는 첫째 음식을 좀 삼가죠. 음식을 삼가는 이유가 어디 있어요? 먹을 다 먹고, 잘 거 다 자고, 부부관계 할 거 다하고 그런다고 안 된다는 게 아니라 그것은 그만큼 간절하지가 않다. 정말 간절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먹을 것을 금하는 거요. 금식을 한다든지 아니면 육식을 금한다든지, 그리고 두 번째는 목욕을 하죠. 그것도 겨울에. 추운데서 하잖아. 그죠. 그게 몸에 때가 있다고 안 되겠어요? 그러나 그 정성을 말하는 거요. 그리고 세 번째 뭘 합니까? 그 기도하는 기간 동안에는 결혼한 사람도 부부 한방에 안 잔다. 이런 얘기 있잖아요. 이런 것들을 다 뭘 말해요? 그만큼 정성을 얻는다. 그만큼 간절하다. 그리고 아주 높은 산꼭대기까지 가죠. 이런 거 다 간절함을 말하는 거요. 그 산에 가면 기도가 성취된다든지, 목욕을 하면 된다든지, 부부가 한방에 된다든지 사실,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이런 것 자체가 우리의 일상성에서 벗어난다. 이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놔버리는 거요. 모든 욕구를 놔버린다. 이 말은 사실은 자기 까르마에서 부터 해방되는 거요. 이렇게 간절해져야 되는 거요. 그래야 순수의식, 욕심으로 일어나는 이런 번뇌의식이 아니고, 저 마음 깊이로부터 있던 아주 순수한, 의식이 일어나는 거요. 이것을 신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의 소리라고 그래요. 신의 소리다. 또는 하느님의 계시다. 거기에서 신령님이 나타났다. 이런 얘기가 나오는 이유도 그겁니다.
아주 우리의 마음 깊숙이 있는 선의지, 아주 순수한 의식이 위로 올라오는. 이 순수한 의식이 올라오려면 이 잡다한 번뇌가 다 사라져야 됩니다. 욕심이 다 사라져야 됩니다. 불평과 불만, 미움, 이런 거 다 사라져야 저 아래 깊은 곳으로부터 마음의 깊은 곳으로부터 순수의식이 올라온단 말이오. 그래서 옛날에 사람들은 이것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잘 모르니까 “신령님이 도와주셨다. 천지신명이 감응을 했다. 하나님의 계시다.” 이런 말을 했지만, 사실은 이것은 자기의 순수의식입니다. 여기로부터 올라온다.
왜 무당 굿할 때 도끼날 위해서 맨발로 펄쩍펄쩍 뛰어도 몸이 하나도 안 다치지 않습니까? 그것도 무의식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신명이 났다. 신명이 나는 것은 무의식의 세계에 들어가야 신명이 나는 거요. 이 의식을 가지고는 신명나게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생각하듯이 일반 몸하고 다릅니다. 몸에서부터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는 거요.
우리 부처님께서 늙고, 병든 몸을 이끄시고 북쪽으로 이동하는 중에 너무너무 가뭄이 들어서 걸식을 할 수가 없었단 말이오. 그런데 대장장이 아들 춘다, 이 대장장이라는 것은 천민을 말합니다. 이 대장장이 아들 춘다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감동해서 부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부처님의 일행을. 그래서 나름대로 음식을 마련해서 부처님께 드렸단 말이오. 그때 초대를 받았을 때 부처님이 승낙을 하셨는데, 그때 아난다가 “부처님, 왜 승낙을 하셨습니까? 춘다는 가난한 이고, 그는 절대로 대중을 위해서 공양을 할 수 있는 그런 형편이 안 됩니다.” 이렇게 반대를 했단 말이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야 걱정마라. 춘다는 능히 공양을 준비할 거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정말 춘다가 음식을 준비해 놨어요. 대중이 다 깜짝 놀랐어요. 이거 자체도 사실은 기적이죠. 할 수 없는 사람이 했단 말이오. 대중이 다 음식을 받는데, 그 음식 가운데 하나인 '스카라 맛다바라는 음식을 받으신 뒤에 춘다보고 “이 음식은 다른 비구들에게는 주지마라. 이 음식은 보통사람들은 소화하기 어렵단다.” 그러면서 “그 음식은 땅을 파고 묻어라. 누구도 먹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춘다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 그래서 그 공양을 접대 받고 부처님이 춘다를 위해서 설법을 해주고 부처님께서 갑자기 배가 많이 아프셨다.
“아난다여 일어나라. 함께 가자.” 이러면서 대중을 끌고 길을 떠났는데, 몹시 아픈 표정이셨단 말이오. 일정한 거리를 가시다가 “아난다여 좀 쉬어가자.” 그러면서 설사를 하셨는데, 피가 섞인 설사를 했단 말이오. 요즘말로하면 피똥을 싼 거요. 그리고도 조금 가다가 또 쉬시고, 그러니까 설사하면 목이 얼마나 마릅니까? “아난다여 물이 좀 다오. 목이 마르단다.” 이렇게 하시면서 북쪽으로 올라가시다가 그 카구다 강가에 이르러서 거기서 목욕을 하시고, 누워있었는데, 이때 행진을 하는 중에 부처님이 거의 죽을 정도로 육체적 고통을 감내하고 계시니까 대중들 사이에서는 쑥덕거릴 거 아니겠어요.
“춘다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지만, 아무런 공덕이 없다.” 이 참 점잖은 표현이죠.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너 이 나쁜 놈, 네가 음식을 잘못 올려서 결국 부처님이 병나서 돌아가시게 되었다. 이게 다 네 책임이다. 부처님을 돌아가시게 했으니 마땅히 천벌을 받을 거다.” 이렇게 얘기해야 정상이죠. 내가 있었으면 그렇게 얘기했을 텐데, 그런데 그 당시에 부처님 제자들은 다 수행자니까, “춘다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지만, 아무런 공덕이 없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있어요. 춘다가 얼마나 괴롭겠어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육체적 통증을 겪고 괴로워 하시면서도 춘다의 괴로움을 염려하신 거요. 그래서 자리를 깔고 앉은 상태에서 아난다에게 물었어요. “춘다는 어떤가?” “춘다는 심히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올린 공양 때문에 부처님이 병이 났다 해서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중들도 춘다에 대해서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춘다를 이리 오게 하라.” 그래서 춘다가 옆에 앉은 자리에서 부처님께서 이렇게 아난다에게 묻죠.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에게 공양을 올릴 때, 가장 큰 공덕이 있는 공양이 뭐냐?” 그러니까 춘다가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입니다.” “그렇다. 그럼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공양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여래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정각을 누리기 직전에 먹은 마지막 공양이다.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기 직전에 얻어 드신 마지막 공양은 누구의 공양이에요? 수자타의 공양이에요? 밀크라이스. 너무나 유명하죠. 수자타의 공양이다. 또 하나 그와 같은 공양이 있다. 그것은 여래가 열반에 들기 직전에 얻어먹은 춘다의 공양이다.”
부처님의 말씀 한번 만에 부처님께 음식을 잘못 올려서 부처님이 춘다의 음식을 먹고 돌아가셨다 해서 춘다는 부처님이 열반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최후로 올린 공양자다. 이렇게 되죠. 사실은 춘다가 올린 공양을 먹고 돌아가셨으니까 춘다가 최후의 공양자 일 수 밖에 없잖아. 이 말씀 한마디로 춘다는 기독교의 가롯 유다 같은 사람이 아니고, 수자타와 같은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 세상에 독이든 음식, 또는 독성이 있는 음식을 미리 알고 안 먹었다. 이런 기적을 행한 사람 많죠? 그럼 먹었더라도 또 아무렇지도 않다. 이런 사람도 많다. 먹어서 배탈이 났지만 토해버렸더니 아무렇지도 않더라. 이런 사람은 역사상에 무수히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음식을 드시고 돌아가시면서도 그 음식을 올린자의 마음고통과 그를 비난하는 주위사람들을 염려하셔서 이렇게 춘다는 여래가 열반에 들기 전에 최후로 공양을 올린자로서 가장 위대한 공양을 올린다자.
그러니까 춘다의 얼굴이 밝아지고 미소가 뜨고, 대중들이 춘다에 대해서 의심하던 것이 싹 없어져버렸다. 그래서 오늘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춘다의 공양을 찬미한다. 그러면 이런 마음을 일으키는 그 부처님의 마음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하기 어려운 거요. 오히려 기적을 행했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날 과학으로 이런 문제는 해결 할 수 있겠죠. 음식의 독성 검사하는 것으로 미리 안다든지, 또 음식이 뱃속에 들어갔다 해서 약물로 치료한다든지, 옛날의 기적은 과학으로 대처할 수 있지만, 이 부처님의 마음은 과학기술이 발전한다 해서 대처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게 바로 부처님의 대자대비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가까이 있었던 제자들이 이런 경험을 한 제자들이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에도 한분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거요. 수행의 위대함이 어떠한지를 알기 때문에.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몇 백 년이 지나도 그 말씀이 위력이 있다. 그게 단순한 말씀이 아니다. 그 말씀 속에는 이런 신비한 힘이 그 속에 들어 있어. 그건 정말 진실한 말씀이오. 진언이란 말이오. 허튼 소리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26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경전을 읽으면서 감동을 한다. 뭐라고 마음을 형언할 수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이 몸이 비록 지옥에 떨어진다 한들, 부처님의 법문을 들을 수만 있다면 나는 지옥도 마다하지 않겠으며, 내가 비록 천상에 가서 온갖 즐거움을 누린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다면 나는 천상도 마다하겠다.” 이런 마음에서 뭔가 일어나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믿음이 일어나는 거요. 마음이라는 게 이렇게 중요한 거요.
그런데 이 기적을 일으키는 순수의식, 선의지, 이 좋은 마음에 오히려 뭐가 끼어든다? 탐심, 진심, 치심이라고 하는 독성이 3개가 뛰어들어서 이 마음이 독심이 되어버렸다. 물은 원래 깨끗한 감로수였는데, 거기에 독이 들어가서 독약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듯이, 이 삼독심은 우리를 괴로움에 빠뜨린다. 고통 속에 빠뜨린다. 자, 그런데서
3독심에 물들게 되면
믿지도 못하고,
이해도 잘 못하고,
실천도 안하고,
그러니 물론 체험은 없겠죠.
그저 어리석어서
쥐가 쥐약을 먹듯이,
순간적인 그 쾌락에 빠져서
결국 고통을 자초한다.
그래서 괴롭다고 아우성치지만, 결국은 이거 다 자업자득이다. 네가 어리석어서 네가 행한 바보 같은 행함 뒤에 따르는 과보다. 그런데 누구를 탓하겠느냐? 그러니까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어리석음, 그것을 제해야 된다.
자, 다시 돌아와서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깊은 믿음. 흔들리지 않는 믿음, 반석 같은 믿음. 대지와 같은 믿음. 이런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반석 같은 대지와 같은 믿음이 일어나려면 마음이 간절해야 됩니다. 간절해야 순수의식의 상태로 들어갈 수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먹을 것 다 먹고, 입을 거 다 입고, 잘 거 다 자고, 놀 거 다 놀고, 그러면서 우리가 그런 순수의식 세계로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20세기의 성자라고 하는 마트마하 간디도 보면 그 막강한 해가지지 않는 대형제국과 싸워서 이긴다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은 절망에 빠졌겠어요.
거기다가 대중은 어떤 손쉬운 기적을 자꾸 요구하잖아요. 힘이 모자라는데도 이기기를 자꾸 원한다는 거요. 문제가 빨리 해결되기를 원한단 말이오. 그게 안 되면 대중은 또 떨어져 나가버리죠. 또 대중은 성격이 조급하니까 과격해지기가 쉽죠. 그러면 큰 힘을 가진 자와 대결하는데, 작은 힘을 가진 자가 힘으로 대결해서 이길 수가 없단 말이오. 그때는 큰 힘을 가진 자에게 감동을 줘야 된다. 힘으로 이길게 아니라 마음을 바꿔야 된다. 다시 말하면 인도인들이 하는 것이 영국 사람들이 감동을 해버려야 된다. 그래서 영국에서 반대자가 생겨야 된단 말이오. 그래야 이게 일어나는 거요.
그런데 영국 사람들이 인도사람을 미워하고 이러면 해결이 안 된다. 힘 가진 자가 힘 약한 자를 미워하니 해결 안 돼요. 그런데서 얼마나 고뇌가 많았겠어요. 그럴 때마다 지하에 내려가서 일주일씩 금식을 하거나 열흘간 금식을 하면서 기도를 했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 부처님 이거 해결해주세요.” 이런 게 아니라,
자기의 조급함, 이런 것을 다 뗠쳐내고
자기의 무지를 떨쳐내고
순수의식의 세계로 들어가서
믿음을 굳건히 하는 거요.
“이런 일을 하다보면 될까? 안 될까?” 번뇌가 얼마나 일어나겠어요. 부처님도 6년 고행하실 때 그런 번뇌가 많이 일어났죠. 그게 마왕 마라의 유혹이라고 표시되어 있죠. “열반이란 없어. 열반이란 없어. 열반이란 본래 없는 거야. 그런 말만 있는 거야. 네가 이 숲속에서 혼자 고행하다 죽어버리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 그러니 고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래서 신을 찬미하고 제사를 지내면 너에게 전륜성왕의 부귀가 도래하리라.” 이런 식의 유혹을 끝없이 하죠.
이게 그 정진하다가 결국은 그 장벽을 못 넘어가니까, 거기서 온갖 번뇌가 일어나는 거요. 이럴 때 부처님께서 다시 마음을 다잡으시고, 마왕아 물러가거라. 그러니까 “너의 군대가 어떤 거다. 그것을 쳐부수는 나의 군대는 어떤 거다.” 이런 속에 믿음이 나오고, 진실이 나오고, 지혜가 나오죠. 그런 얘기를 하시죠. 그래서 여기 믿음이 중요한 겁니다.
여러분들이 욕심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기도를 해서 일이 성취가 안 되면 “아이고, 기도해봐야 소용도 없더라. 뭐.” 딴 사람이 와서 “야, 그거하지 말고 굿을 한번 해봐라. 다른 종교를 한번 믿어봐라. 그러면 될 거다.”하면 가버린단 말이오. 이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얕은 믿음이에요. 그래서 간절한 믿음, 간절한 마음, 이것이 굳건한 믿음을 가져오고, 이것이 기적을 가져온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기도를 하려면 이렇게 해라 이 말이오. 그런데 이렇게 가져오는 그것이 여기에서 뭐에요? 신비라는 말로 표시 된 거요. 믿음은 뭘 가져온다? 기적을 가져온다.
깊은 믿음은 신비함을 가져온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한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게 뭐다? 깨달음이다. 깨달음. 그래서 이 반야바라밀다는 그 어떤 믿음, 그 믿음으로 해서 가져오는 그 어떤 기적보다도 더 깊은 믿음에 속하고 더 큰 기적을 가져오는 거다. 그래서 그것을 뭐라고 했다. /시대신주/ 이렇게 표현한 거요.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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