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반야심경

법륜스님 반야심경 제24강 반야심경 총정리1

Buddhastudy 2017. 6. 26. 21:23


  

안녕하세요. 오늘은 반야심경 24번째 강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이번 시간부터는 여러분의 질문을 받아서 복습하는 그런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기본토대, 업식이 없다면 모든 사람이 똑같은 정보가 들어오면 똑같이 반응을 해야 되는데 반응이 다르다. 이것은 각자가 자기 업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 토대가 없다면 외부에 동일한 정보가 들어오면 동일하게 반응을 할 것이고, 다른 정보가 들으면 달리 반응 한다고 하신 말씀에 대한 의문점이 있습니다. 토대가 없다는 것은 업식이 없다는 것인데요, 그래서 토대가 없다면 업식이 없어서 여러 가지 다른 정보들이 들어와도 반응 자체가 없지 않을까요? 스님께서 말씀하신 반응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싶습니다.//

 

,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다섯 사람이 다섯 다른 사람이 똑같은 곳에 가서 똑같은 것을 보고, 똑같은 것을 듣는데, 여러분들의 느낌이나 생각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르다. 정보가 똑같이 들어왔는데 거기에 따른 반응이 서로 다르다. 왜 다를까? 이런 문제에요. 왜 똑같은 것을 봤는데 사람마다 이렇게 다를까?

 

우리 임진왜란 때 일본에다가 임진 일어나기 전에 사신 두 사람을 보냈는데 갔다 와서 전혀 다른 얘기를 했죠. 이런 문제만이 아니에요. 부부지간에도 똑같은 것을 두고 서로 다르다고 그래요. 그럼 이때 개인이 사람마다 각자 그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우선 이렇게 보통 말해요. 그럼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할 때 사람이 다르다는 게 구체적으로 뭐냐?

 

그게 사람의 마음이 달라서 그렇다. 또 이렇게 말하는데, 그것을 정확하게 불교용어로 말하면 사람마다 업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업식이 다르다. 이것을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면 어떠냐? 똑같은 벽을 보는데 사람마다 벽색깔이 다르다고 말한단 말이오. 왜 다르냐? 왜 똑같이 봤으면 똑같이 나와야지 왜 다르냐? 봤더니 사람이 다 안경을 끼고 있는데, 그 안경에 색깔이 다 조금씩 들어 있다. 그래서 똑같은 색을 보는데, 그 안경색깔을 통과해서 자신의 눈에 비치다 보니까 보는 사람마다 색깔이 달리 보였다.

 

그때 이 안경에 약간씩 달리 들어있는 그 색깔을 업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그래서 사람마다 느낌도 다르고, 평가도 다르고 판단도 다르고 다 다릅니다. 첫째 이게 하나 있고, 그러니까 아무 욕심이 없어도 이런 일이 생긴다. 순수해도 이렇다.

 

거기다 두 번째가 사람이 자기 욕심이 있다하면 그 욕심으로 인해서 또 사물이 달리 보입니다. 여러분들이 욕심 없을 때하고 욕심 있을 때하고 달리 보입니다. 여러분이 두려울 때하고 두렵지 않을 때하고, 기분이 나쁜 때하고 기분이 좋을 때하고 똑같은 소리인데도 달리 반응이 된다 이 말이오. 이런 식으로 작용해서 또 달리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각각의 자기 업식을 가지고 있다. 지금 현재 이전에 여러분이 있다.

 

그럼 이 업식을 어떻게 보느냐? 이것은 선천적인 것이다. 전생으로부터 왔다. 이게 나의 본질이다. 이러면 이것을 자아라고 그래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 업식이라고 하는 것은 형성되어진 거다. 이런 얘기요. 형성 되어진 거다. 현재는 이게 전생으로부터 왔든, 이것이 본래 라고 하든, 형성되어졌다고 하든, 현재 작용은 같아요? 안 같아요? 같아요. 그런데 이 업식이 형성되어진 거다. 형성되어졌다는 거 하고 본래부터 있었던 거다. 전생으로부터 왔다. 태어날 때 원래 이렇게 생겼다. 전생으로부터 왔다 이것은 현재 내가 바꿀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다른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되는데, 그러나 형성되어졌다. 이 말이오. 형성되어졌다. 형성되어졌다는 말은 이것은 변화가 가능한 거요? 가능 안한 거요? 변화가 가능 한 거요. 여기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형성 되어졌다는 것은 맨 처음에는 그것이 없었다는 얘기가 되겠죠. 그죠? 그런데 없었다고 할 때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요? 예를 들면 담배 피우는 업식이라면 담배 피우는 업식이 없었다는 거요? 담배피우는 업식이 없었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면 그때는 딴 업식은 있었지만, 담배 피우는 업식은 없었고, 지금은 또 그때 있었던 업식 중에 없어진 것도 있고, 또 담배 피우는 업식은 있겠죠. 담배를 끊으면 그것은 없어지지만, 또 딴 게 업식이 있겠죠. 이 업식이라는 것은 수천, 수십만, 수백만 가지로 뭉쳐진 거란 말이오.

 

그러니까 만약에 이게 다 없어졌다면 반응이라는 것이 없겠죠. 그러나 이것은 있어요. 이것은 있다. 이 말이오. 있는데 이게 변해가고 있는 거요. 형성되어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거요. 그러기 때문에 이 반응이 우리들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것은 어떻게 해야 된다? 소멸시켜야 된다. 그럼 이 반응이 다 고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잖아. 그죠? 예를 들면 내가 어떤 사물을 볼 수 있는 능력, 그거 굳이 없앨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지. “저런 나쁜 놈이다.” 보는 이런 분별 업식은 없애는 게 좋다. 그게 나한테 행복하다.

 

그런데서 우리가 고통을 가져오는 업식을 없애야 된다. 업장소멸이에요.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어릴 때 받은 이런 저런 상처, 지금은 상처 안 받는데 옛날에 상처를 받아서 여러분들이 업식으로 형성되어 있으면 지금도 약간만 자극이 오면 격렬하게 반응을 하죠. 없는 사람이 반응하는 거 하고, 없는 사람이 반응하는 거 하고 천지 차이에오. 여러분들이 학벌에 대한 열등의식이 없다 하는 사람하고 학벌에 대해서 열등의식이 있는 사람은 학교얘기를 하게 되면 아주 격렬하게 반응을 합니다. 있는 사람은 반응하는데 없는 사람은 반응을 안 해요.

 

이 방에서 법문을 듣는 데도, “법당에서 담배 피우지 마세요.” 이럴 때, 담배 업식이 없는 사람은 그게 아무 자극이 안 되죠.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자기를 압박하는 것처럼 느낀다. 자기를 비판하는 것처럼 느낀다. 제가 담배를 꺼내서 법문을 많이 하잖아. 업식 설명을 하려고. 그럼 거사님들 얘기 들어보면 스님은 꼭 법문을 할 때 나를 꼬집어서 나를 못살게 군다.” 이렇게 듣는단 말이오. 거기에 반응을 한다는 거요. 딴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한다. 이 말이오.

 

그래서 아무 반응이 없다. 업식이 없다는 얘기인데, 이론상으로는 그렇게 될 수는 있지만, 현실의 인간은 어떤 업식이 있든 업식은 있겠죠. 여기에 우리가 말하는 고통을 가져오는 이 반응은 소멸하면 우리가 고통이 안 온다는 얘기요. 사람이 서로 달라도 고통은 안 올수가 있겠죠.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이것 때문에 저 벽 색깔에 대해서 견해가 다르다 하는 것을 알면 이 다른 사람과 다툴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겠지. “, 저 사람입장에서는 저렇게 보이구나. 저 사람 견해는 저렇구나.” 이렇게 내가 이해가 된다. 이 말이오. 내가 이해가 되면 누가 안 괴로워져요? 내가 안 괴로워지고, 그게 이해가 안 되고 저 사람은 도대체 눈을 가지고 있나? 안 가지고 있나? 눈이 삐었나?” 이렇게 이해를 못하게 되면 내가 그 사람 말을 들으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속이 터질라 그런단 말이오. 숨이 막힌다 이 말이오.

 

여러분들도 남편이나 아내하고 얘기할 때 숨 막힐 때가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저도 요즘 숨 막힐 때가 있어요. 그럼 이것은 내가 상대의 이해 부족이에요. 그럼 누가 괴로워진다? 내가 괴로워지는 거요. 그러니까 이게 업식이 다르기 때문에 느낌도 다르고, 견해도 다르고 그런 거요. 그러니까 우리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더라도 내가 첫째 괴롭지 않고 갈등이 안 생길 수 있다. 그럼 그냥 내버려둬도 되고, 그러면 색깔을 통일시킬 수도 있어요? 없어요? 있죠. 통일 시킬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가 싸워가면서 갈등을 일으켜가면서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가고자하면 내가 괴롭고 힘들어요. 그런데 갈등 없이 괴로움 없이도 그렇게 해볼 수는 있다. 그냥 놔둘 수도 있고 해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의지문제에요. 놔두는 게 좋다. 그게 수행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그러면 대승불교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대승불교는 어느 쪽으로 나아가는 원력이 있단 말이오. 그런데 그것을 괴로워하면서 끌고 가면 세속이 되고, 괴로움 없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된다.

 

만약에 인도에 가난한 아이가 있다. 이것을 돕자 할 때 아내는 돕자 하는데 남편은 돕지 말자하고 반대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그럼 이것은 견해가 다른 거요. 견해가 다르면 내가 고집하면, “내가 좋은 일 하자는데 당신은 왜 안하느냐?” 이렇게 해서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집하게 되면 내가 괴로워진다. 그런데 견해가 다르구나.” “입장이 다르구나.” 하는 것을 내가 이해하면 그럴 수도 있다. 나도 또 옛날에 그런 적도 있지 않습니까? 이해를 하면 안 괴롭다.

 

그럼 그것으로 상대가 하지말자니까 존중해서 그래. 안하자. 알았습니다. 그만둡시다.” 이럴 수도 있지만, 또 상대를 설득해서 돕도록 할 수도 있겠죠. ? 견해나 생각은 바뀔 수가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저 인간은 안만 얘기해도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바뀔 수가 있는 거요. 우리는 꾸준히 설득할 수가 있다. 여기에는 원력이 따라야 돼. 그런데 한두 번 해서 안 된다고 좌절하고 괴로워하면 욕심이고, 자기 견해 고집이고, 괴롭지 않으면서도 꾸준히 그것을 변경해서 나아가고자 하면 그것은 원력이 된다. 이 말이오. 그래서 이 업식이 다르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태어났을 때 다섯 명의 일란성쌍둥이를 만든다. 요즘은 과학적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수정란을 다섯 개로 나누어서 다섯 개의 여성의 자궁에 넣어서 애를 낳으면 똑같습니다. 유전인자가 똑같은 아이를 하나는 미국에서 키우고, 하나는 일본에서 키우고, 하나는 한국에서 키우고, 하나는 중국에서 키우고, 하나는 인도에서 키우면 같은 아이일까요? 다른 아이일까? 다른 아이입니다. 하나는 돼지우리에서 키우고, 하나는 늑대우리에서 키우고 완전히 다른 아이입니다. 이것은 뭐가 다르다? 업식이 다르다. 모양은 같지만 업식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아이에요.

 

그럴 때 모양은 동물로서의 인간이고, 업식은 인류로서의 인간이에요. 그런데 업식이 어느 나라에서 자라든 그것은 인류인데, 업식이 만약에 돼지우리에서 자랐다 그러면 업식이 인간이 아니에요. 그러면 생물학적으로는 인간 종인데, 인류로서의 인간은 아니에요. 이것은 인간이 갖는 특징을 정신적으로 하나도 안 가지고 있어요. ? 그 업식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어차피 우리는 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종입니까? 아닙니까? 인간종이지. 그럼 여기에서 우리가 인류로서의 인간성, 이게 부모로부터 받는 거요. 부모 품에 안겨서 키우면서. 크면서. 그런데 각자 부모의 업식이 다르기 때문에 달라지는 거요.

 

그러면 개새끼하고 아기를 똑같이 사람 품에 키워도 같을까? 다를까? 다르겠지. 그럼 똑같이 받았는데 왜 다를까? 그것은 생물종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토대가 다르기 때문에 생물종, 그러니까 하드웨드가 달라서 그런 거요. 그러니까 같은 컴퓨터인데 프로그램에 따라 작용이 다르고, 이것은 컴퓨터 종이 다른 거요. 그래서 또 달라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같은 아이를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랐다고 하더라도 달라요. 첫째 같은 집 자식이라도 그게 아이마다 유전자가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서 얼굴모양이 달라요. 엄마 아빠를 반반 닮는데, 한 아이는 아빠 코 닮고, 눈은 엄마 닮는 거 하고, 한 아이는 거꾸로, 반대로 닮으면 얼굴이 같아요?달라요? 달라지는 거요. 그래서 형제라도 다른 거요.

 

또 아까도 말했지만 이 까르마는 항상 그대로 있습니까? 바뀝니까? 바뀐다 그러죠. 그러면 첫아이 키울 때하고 두 번째 아이 키울 때하고 엄마 아빠 주위환경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달라요. 그래서 성격도 달라지는 거요. 또 아까처럼 개하고 사람하고 똑같은 환경에서도 그 토대가 다르기 때문에 다르듯이, 같은 집에서 똑같이 애를 키웠다 하더라도 생물학적인 유전자 토대가 다르면 거기에 담기는 프로그램이 같이 주어져도 또 조금 달라지는 거요. 그래서 다 조금씩 조금씩 다른 거요.

 

그런데 일란성 쌍둥이를 한 집에서 키웠을 때 성격의 공통성이 많겠느냐? 다른 집에서 태어난 두 아이를 한집에 가져와서 얼굴은 안 닮았지만 쌍둥이처럼 똑같이 키웠을 때 성격적 공통성이 많겠어요? 고 둘이 다릅니다. 그러나 공통점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종이라고 하면 거의 비슷합니다. 여기 프로그램을 어떻게 까느냐가 핵심인 거요. 그러니까 천재가 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은 유전인자적인 것은 아주 요소가 적고, 프로그램의 문제요.

 

그래서 우리가 수행을 해서

이 업식을 수정을 좀 하자.

수정을 좀 하면

여러분들이 훨씬 훌륭한 인격이 된다.

 

수행한다고 갑자기 몸매가 코가 커지고 이런 것은 아니에요.

이것은 인류로서의 인간은 우리들의 마음이지,

육신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몸도 마음을 따르기 때문에

몸이 또 편안해지면

옛날에 굉장히 못나보이던 사람도 인상이 좋아집니다.

또 얼굴이 아주 예뻤는데도

사람 마음이 못되면 나중에 형상이 바뀝니다.

이렇게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부부도 같이 오래 살면 닮는다. 이런 말이 있죠. 뭐가 닮으니까? 마음이 성격이 닮으니까 얼굴도 닮아간다. 이런 얘기에요. 그래서 수행정진을 해야 된다. 이런 얘기인데, 조금 정확하게 못들은 것 같아서, 제가 설명을 자세하게도 못했고.

 

 

질문2)

여섯 가지 감각기관, 육근에는 안이비설신의가 있는데요, 여기에서 의도 감각기관인지요. 육식의 의식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

 

12처설에는 주관과 객관을 크게 나눕니다. 저 인식대상,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대상을 육경이라 그러고, 그다음에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주체, 인식기관을 육근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육근에는 눈-_, _, 이런 식으로 해서 안, , , , , . 이렇게 6개가 있고, 그 대상으로는 빛깔, 모양 하는 색, 소리 성, 그래서 색, , , , , . 이렇게 6가지를 나눈다. 그럴 때에는 이 인식기관이라고 하는 것은 꼭 눈만을 말하는 게 아니고, 인식기관인 동시에 이것은 인식 주체까지 포함이 됩니다.

 

눈만을 말하는 게 아니고, 보는 작용도 포함이 된다. 이렇게 나눌 때는. 그런데 어쨌든 너무 눈이라고 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면 똑같은 것을 똑같이 보면 똑같이 작용, 보는 작용이 일어나야 되잖아. 그런데 실제로는 보는 작용이 좀 달라지죠. 그래서 이것을 더 자세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앞에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업식, 식이 있단 말이오. 이 인식하는 주체를 식이라고 그래서 또 별도로 나누어서 이것을 6가지로 다시 나누었어요.

 

보는 작용은 안식, 듣는 작용은 이식, 생각하는 작용은 의식. 이렇게 또 나누었단 말이오. 이렇게 해서 설명하면 이게 18계설이 됩니다. 그러니까

 

12처설에서의 의는

의근과 의식까지도 포함하는 의근을 말하는 것이고,

18계설에서의 의와 의식은 딱 분리됩니다.

이때 의는 의근만을 말하고,

이때 의식은 분별작용을 말하는 거요.

 

그래서 우리가 의라고 하는 것은 18계설에서 의라고 할 때는 생각하는 작용은 어디서 합니까? 심장이 합니까? 혀가 합니까? 어디에서 합니까? 머리에서 하지. 다른 말로하면 뇌에서 하죠. 그래서 의라고 할 때는 의근이라고 할 때는 뇌, 또는 쉽게 말해서 머리. , 눈 귀 코 혀 몸 머리 이렇게 보통 얘기할 수 있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뇌. 또는 뇌수.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그리고 의식이라고 말할 때는 보면서 보는 작용을 하듯이, 들으면서 듣는 작용을 하듯이, 생각하는 작용을 하는 게 뭐다? 의식이에요. 의식이다. 그러니까

 

의근으로서의 의는

머리 뇌를 말한다면

그것의 작용이 의식이다. 이 말이에요.

우리가 말하는 의식이 있다 없다는 생각하는 작용을 말하는 거다.

 

그러나 12처설에서의 의라고 할 때는 머리+의식까지도 거기 일부가 포함이 된다. 왜냐하면 거기는 식을 별도로 분류를 안 하기 때문에. 요런 부족함 때문에 12처설에서 다시 뭐가 나왔다? 18계설이 나오게 되었다.

 

 

 

질문3)

알아차림이 있어야 사라진다는 말씀에 대하여 알아차림이 있음으로 사라짐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는지요. 알아차림이 있어야 사라진다는 말씀 그 자체만 들으면 알아차림이 없으면 사라지지 않는다고 이해할 것 같습니다. 수라고 하는 것은 일어났다 사라지고,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므로 알아차림이 없을 때도 수는 일어났다 사라진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알아차림이 있으므로 사라짐이 관찰되고, 맹목적으로 반응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 분이 질문하신 것은 맞는 얘깁니다. 수의 한에서 말을 한다면요. 그러나 알아차리면 사라진다.’ 하는 작용도 함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들의 느낌은 항상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진다. 우리가 알아차려도 일어나고 사라지고. 알아차리지 못해도 일어나고 사라진다. 알아차림이 있다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짐을 안다는 얘기고, 알아차림이 없다는 것은 이것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모른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은 곧 무상을 말하는 거죠. 무상의 원리를 아는 거고, 알아차림이 없다면 무상의 원리를 모르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스님께서 알아차리면 사라진다가 아니고,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린다고 표현을 하는 게 더 정확한 말이 맞지 않느냐? 이 말은 맞습니다. 그러면 스님이 여기에서 알아차리면 사라진다는 말은 왜 썼는가? 이런 요인도 있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니까 알아차리면 사라진다하는 것만 말을 하다보니까 지금 이 분이 질문했는데, 이 분 질문이 맞습니다.

 

그러면 내가 화가 났다 이 말이에요. 내가 화가 났는데 내가 화난 줄을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화가 오랫동안 지속이 된다. 그런데 내가 화났을 때 , 내가 화났구나.”하고 알아차리면 화남이 사라진다. 그런데 화가 났구나하고 알아차렸는데도 화가 안 사라지고 유지될 때도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그럼 이것은 화가 났다는 사실만 알아차리면 화가 사라질 때도 있고, 세게 화가 나면 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려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화가 일어나는 원인은 내가 옳다할 때 화가 납니까? 내가 잘못했다할 때 화가 납니까? 옳다 할 때 화가 나죠. 화가 대게 났다는 것은 내가 옳다는 것의 강도가 굉장히 강하다. 상대편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굉장히 강할 때 화가 크게 일어난단 말이오. 그렇습니까? 상대가 진짜 잘못했다하면 화가 눈에 안 보일정도로 일어납니다. 그런데 조금 잘못했다 싶으면 화가 조금 짜증정도 나는 거요.

 

그렇기 때문에 이때, 부처님의 본래 법에는 옳고 그름이 없죠. 내가 지금 옳다고 한 생각을 일으키고, 거기에 뭐 되어 있다? 사로잡혀 있다. 거기에 확 쏠려서 100% 옳다는데 쏠려버렸다. 그때 내가 , 내가 옳다는데 사로잡혀 있구나.”하는 사실을 확연히 알아차려 버리면 확 없어져버려요. 그런데 내가 옳다는 사실에 사로잡혀 있구나.”라고 내가 옳을 뿐이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다는 것은 모른다. 내가 옳다는 생각에 주장을 하니까 저거 틀렸다고 하니까 화가 불같이 일어나는데, 이것도 사로잡혔다는 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없어집니다.

 

그런데 확 사로잡혔을 때는 내가 사로잡혔다는 생각이 들까요? 안 들까요? 안 듭니다. 내문제다 이 생각은 전혀 안 든다. 너의 문제지, 내 문제다 이런 생각 전혀 안 든다 이 말이오. 그래서 이렇게 정확하게 알아차려 버리면 사라집니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그것이 지속이 된다. 마음에서 그렇다.

 

그럼 두 번째 여기서 이분이 질문한 것은 수에요. 수라고 하는 것은 느낌인데, 느낌은 지속되지 않습니다. 느낌은 일어났다 사라지고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느낌은 알아차린다고 사라지고 안 알아차리면 안 사라지고 이런 것은 아니에요. 그 자체는 알아차리든 알아차리지 않든 순간순간 일어나고, 순간순간 사라진다.

 

그런데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리면 어떠냐?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기만 할 뿐이다. 알아차린다고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니에요. 알아차리면 어떻게 된다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에요.

 

그런데 알아차리지 못하면 이때는 어떤 현상이 생기느냐? 부싯돌을 두드렸을 때 불빛이 번적 일어나서 저절로 꺼지죠. 그런데 옆에 소음이 있으면 어떠냐? 옮겨 붙습니다. 이때는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떻게 되느냐? 이게 수에서 애로 옮겨 가버립니다. 즉 좋은 느낌이 들고 알아차리면 느낌이 있다가 그냥 사라지고, 느낌이 있다가 그냥 사라지는데, 좋은 느낌을 알아차림이 없으면 어떠냐? 좋은 느낌이 곧 좋아함으로 갈애로 옮겨가 버립니다. 욕으로 올라가버린다. 이 말이오. 하고 싶은 것으로, 갖고 싶은 것으로 옮겨가버린다. 그렇게 되면 이게 커져가는 거요. 그러니까 불꽃이 커져간다.

 

그래서 알아차리면 옮겨 붙지 않는다.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리면 다만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다. 이 업식에 있으니까 업식에 반응할 거 아니오. 그 반응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반응할 뿐이지 갈애로 옮겨가지 않는데, 애욕으로 옮겨가지 않는데, 혐오로 옮겨가지 않는데, 알아차림이 없으면 이게 옮겨 붙어버려. 맹목적 충동이라고 그래. 맹목적으로 충동을 해서 옆으로 나아가버려요. 그렇게 되면 욕구가 일어나고 욕구가 일어나면 그것을 가지려고 하는 행위로 가게 돼. . 그렇게 행위로 옮겨가게 되면 열매가 맺히는 거요. 즉 새로운 업이 형성이 된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여기에는 다시 수는 관찰하면, 그 자체는 일어나고 사라지는데,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림이 없으면 갈애로 옮겨가고 수로 반연해서 애로 가고, 알아차림이 있으면 애로 옮겨가지 않는다. 또 다시 애도 그것을 알아차리면 우리가 거기서 멈출 수가 있는데, 알아차림이 없으면 그것이 계속 커져나간다. , 요렇게 정리를 하겠습니다.

 

 

질문4)

깨어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있을 때 가능하지 않는가요? 그런 그 주체는 있는 것이 아닌가요?//

 

, 알아차린다할 때는 알아차리는 주체가 있죠.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로봇나 안 그러면 여러분이 갖고 있는 센스 기계 같은 거 있잖아. 그죠? 그거 알아차려요? 못 알아차려요? 알아차리지. 그런데 알아차림의 실체가 있을까요? 그 알아차리는 실체는 프로그램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그 센스에 내장되어 있는 프로그램이 그것을 감지하는 거요. 기계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져야 되지만 프로그램이 없으면 감지를 못합니다. 육신이 있다 해도 육신 갖고는 감지가 안 돼요. 프로그램이 있어야 되요. 업식이 있어야 된다, 이 말이오. 정신작용이. 프로그램이 있어야 그것을 감지하는 거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코드 뽑아버리면 감지 되요? 안 돼요? 안 되지. 그러니까 코드를 뽑아버려도 감지가 안 되고 즉, 기계가 작동을 안 하면 감지가 안 돼요. , 우리가 육신이 죽어버리면 감지가 안 돼요. 반대로 육신이 있다 하더라도 그 프로그램을, 그 센서기 안에 있는 소프트웨어를 빼버리면 기계가 감지합니까? 못합니까? 못하죠.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이 감지하는 주체는 있어요. 센서라고, 센서에 어떤 주체는 있는데, 그 주체라는 게 자아는 아니다. 하나의 프로그램이지. 업식이다. 이 말이오. 업식은 불변하는 자아가 아니라고 그랬죠. 그것은 하나의 형성되어진 거죠. 그래서 그 상황에서 그렇게 작용하는 것은 있어요. 그러나 그 작용하는 것이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다.

 

 

질문5)

지금 깨어 있다는 꿈을 꿀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가끔하게 됩니다. 어떻게 깨달은 줄 알 수 있나요?//

 

아주 좋은 질문이에요. 우리는 지금 깨어있지 못하면서도 깨어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죠. 깨어있지 못한 상태에서도 우린 마치 깨어있는 것처럼 지금 착각하고 있어요. 그러면 내가 깨어있다 할 때도 그게 깨어있는 건지 못 깨어 있는 건지 그것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이런 질문이에요.

 

여러분들이 깨어 있지 않는 상태, 예를 든다면 눈을 감고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태양을 생각하고, 전깃불을 생각하고, 촛불을 생각해도 실제로 밝아집니까? 안 밝아집니까? 안 밝아집니다. 그런데 눈을 뜨면 촛불이면 촛불만큼 밝아집니다. 태양이면 태양만큼 밝아집니다. 눈을 뜨면.

 

그런 것처럼 우리가 자기 마음을 보면 이 생각으로 깨달음을 아무리 생각을 해도 여러분들이 부처님 경전을 읽고, 그 다음에 육조단경을 읽고, 선가귀감을 읽고 , 불교가 이런 거구나. 이런 거구나.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이렇게 아무리 생각해도 여러분들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고뇌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이 훤하게 밝아지지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조금 기분은 좋지.

 

그런데 깨달음의 장 같은데서 뭔가 이렇게 꽉 막혀 있다가 한 껍질이 탁 벗겨지면, 남편 술 먹고 오는 것, 바람피우는 것, 애 공부 안하는 것, 이거 갖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이것을 놔놓고 내가 어떻게 외면한다고 안 괴로울 수 있냐?” 이러다가 어느 순간에 탁! 한 꺼풀 벗겨지면 그게 아무문제도 안됩니다. 그냥 길가다가 소나무도 보고, 감나무도 보고, 대추나무 보듯이 그냥 컴퓨터하면 컴퓨터 하는 거고, 술 먹으면 술 먹는 거고, 그냥 일상처럼 보이면서 내 마음속에 있던 이런 어떤 마음의 무거운 짐이라 할까 그런 것도 없어지고, 어두움이라고 할까 이런 것도 없어지고, 아주 가뿐하고 기분이 좋은 거요.

 

그러니까 내가 이 깨어났냐? 안 깨어났냐? 라는 것은 수행자는 자기 점검이 됩니다. 그것을 항상 완전히이런 말을 자꾸 붙이니까 어때요? 이게 어려워지는데, 이것은 여러분들이 오해가 탁 풀렸을 때 마음이 좀 시원합니까? 안 시원합니까? 답답하던 게 시원한 거와 똑같아. 뭔가 가려 있던 게 벗겨지면, 눈을 뜨면 환히 보이듯이 이렇게 확 좋아집니다.

 

그런데 눈을 떠서 밝더라도 눈 감아버리면 어두워지겠죠. 다시 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다시 어두워지겠지. 그런데 한번 눈뜨면 영원히 눈을 안 감는다. 이런 생각을 자꾸 하시면 안 돼요. 눈이라는 것은 감기기도 하고 뜨이기도 하는 건데, 눈을 떠본 사람은 어두우면 어떻게 하면 된다? 불 켜는 행동만 하지 않고, 눈뜨는 것도 같이 겸하겠죠. 눈을 떴는데도 어두우면 어떤다? 불 켜지만 가끔은 불을 켜놨는데도 자기가 눈 감고 자꾸 어둡다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한번 눈떠 본 사람은 자기를 향해 돌이킬 줄 알기 때문에 괴로워하다가도 , 내가 또 사로잡힌 줄도 모른다.” 옛날에 그랬잖아. 그래서 금방 확 돌이켜 버리죠.

 

자기도 모르게 사로잡혔다.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가 확 눈을 떠버린다. 같은 악몽을 반복해서 몇 번 꾸다보면 , 꿈속에서도 꿈일지 모른다.” 이런 생각해서 눈떠본 경험 있어요? 잘 안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런 것처럼 도망가다가 , 꿈일지도 모른다.”해서 눈뜨는 쪽으로 확 바뀌어 버리는 거요. 그래서 수행정진을 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고 자기가 눈을 감은 경우가 있을 때 촛불을 켜려고 하다가 눈을 떠버리는 쪽으로 마음을 바꿀 수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정진을 하게 되면 여러분들이 자기의 기쁨을 늘 간직할 수가 있다. 지금까지는 늘 전깃불 켜고, 촛불 켜고, 그것만 해결책인 줄 알았는데, 내가 눈감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는 한 생각을 돌이켜서 눈을 떴을 때, 상대를 그냥 두고도 여러분들이 행복할 수가 있다.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그래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면 알죠. 남한테 물을 것도 없고.

 

그런데 가끔은 꿈속에서 깼다는 꿈을 꾸듯이, 그것처럼 우리가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깼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버리면 자기는 어떻게 되었다. 깨달았다가 착각을 하겠죠. 깨달았다는 착각을 하는 것이 중생의 병 가운데 가장 무서운 병이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중생은 깨달을 수가 있지만, 깨달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버리면 깨달을 생각을 내기가 정말 어려워진다. 이렇게 디면 이게 사도, 외도가 되는 거요.

 

이 세상에는 깨달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자기도 모르게 깨달은 자아 행세를 하는 경우가 있다. 처음부터 자기를 속이고 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거짓말쟁이가 하는 거고, 자기까지도 속아버리는 자가 그렇게 되면 사이비교주가 되거나 혹세무민하거나 그래서 자기도 어리석음에 빠지고 남도 어리석음에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을 제일 유의해야 돼.

 

그래서 깨달음을 거짓으로 깨달았다고 하지마라.’ 원래 거짓말 하지 말라는 거기서 나온 말입니다. 세상적인 거짓말에서 나온 게 아니고. 수행자가 눈을 뜨지 못했으면서 깨달은 척 하는 그런 거짓말을 하지마라. 이것은 자기를 엄청나게 해치는 행위다. 이런 얘기요. , 여기까지 하고 또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