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반야심경 22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문장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입니다. /고지/ 이러이러한 까닭으로 마땅히 알지어다. /반야바라밀다/는 반야바라밀다를 행한다고 하는 것은 /시대신주/며, 가장 신비한 부문이며, 지난번 시간에 말씀을 드렸죠? 어떤 종교적인 행위, 종교적인 믿음보다도, 더한 믿음에 속한다. 무엇이? 깨달음이. 그러니까 최고의 믿음. 깊은 믿음보다도 더한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게 뭐라고? 깨달음이다.
다시 비유해서 말한다면 강도에 쫓기던 사람이 어떤 큰 존재가 와서 자신을 보호해줬을 때 그게 기적이 일어난 건데, 이것이 우리가 종교적인 행위로 얻는 기적이라면 깨달음이라는 것은 눈을 떠버리는 거다. 눈을 뜨니 “꿈이구나!”하는 것을 알아버리는 거요. 그러기 때문에 그 꿈속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기적도 꿈 깨는 거 보다 더한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이 반야바라밀다가 어떤 것인지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거요.
그 다음에 두 번째 /시대명주/인데,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이 알아야 됩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이런 말이 있죠? 모르면 참 어렵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다가도 갑자기 안가면 아는 사람은 금방 뭘 이렇게 이렇게 다그닥 다그닥 고쳐버리면 되는데, 모르는 사람은 한 시간 두 시간 서 있어도 안 되고, 차를 발로 차도 안 되고 그렇습니다. 라이오가 고장이 났다. 그러면 모르는 사람은 뭐 어떻게 해도 안 됩니다. 그런데 아는 사람은 분해해보고 선이 하나 끊어졌다든지 금방 되어버린다.
우리가 몸이 아파서 고생하다가 병원에 가서 전문가가 진찰을 해보더니 약을 주거나 뭘 하면 딱 나아버린다. 그러니까 모르면 고생이오. 모르면. 그런데 알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 신비하다 하는 것은 모를 때 일어나는 심리적인 현상이다. 알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원시인들이 텔레비전 보면 신비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하겠죠. 저 작은 통속에 어떻게 저렇게 많은 사람이 있을까? 또 요즘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핸드폰 같은 것, 얼마나 신비하겠어요? 아마 신이라고 엎드려 절할 거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이런 작동이 일어나는 줄 아니까, 그것을 보고 신비하다. 이런 사람 없잖아요. 모르는데서 신비함이 일어나는 거요. 알면 신비한 게 없습니다. 그래서 아는 게 중요한 거요.
그런데 알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됩니다. 지식을 많이 쌓아야 된다. 온갖 걸 다 공부를 하게 되면 온갖 걸 다 알게 되죠. 그래서 우리가 뭘 모르면 “어, 그 사람한테 가서 물어봐라. 그 사람 박사다.” 그 사람한테 가서 물어보면 모르는 게 없다.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럴 때 훤하다. 이 훤하다. 밝다. 왜 이런 말을 쓸까? 아는 것을.
우리가 아는 데는 우선 5가지 방식이 있어요.
첫째가 접촉해 보고 아는 게 있어요. 접촉해 보고. 촉각이죠.
두 번째는 맛을 보고 아는 게 있어요. 미각이에요.
냄새를 맡아보고 아는 게 있어요. 후각이죠.
소리를 듣고 아는 게 있어요. 청각이죠.
눈으로 보고 아는 게 있어요. 시각이에요.
그런데 이 보고 아는 게 얼마나 중요하냐하면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백번 듣는 것 보다 한번 보는 게 낫다. 그런데 백번냄새 맡는 거 보다 한번 설명을 더 듣는 게 나을 거고, 백번 맛보는 거 보다 한번 냄새 맡는 게 나을 거고,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이 감각이 발전해 가는데 가장 원시적인 동물은 벌레 같으면 뭐로 압니까? 촉각으로 압니다. 구더기가 이렇게 기어 오는데, 제가 손을 막아요. 눈이 있으면 보고 옆으로 가버릴 텐데 끝까지 옵니다. 끝까지 와서 벽에 부딪혀야 돌아갑니다. 부딪혀야 아는 거요.
그다음에 물고기들은 맛을 봐야 알죠. 그 다음에 짐승에게 오면 냄새를 맡아야 알죠.
그다음에 소리를 들어야 알지 않습니까? 그래서 개는 냄새를 맡거나 소리를 듣는 게 아주 뛰어나죠. 그래서 다 구분한단 말이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합해도 보는 거 하고는 비교가 안 됩니다. 이것은 불을 꺼놓고 깜깜한 밤에 뭘 더듬어서 찾는 거 같은 거요. 불을 탁 켜버리면 한눈에 쫙 다 보인단 말이오. 그래서 사람은 시각이 가장 발달한 겁니다. 가장 고등생물이에요. 그러니까 밑으로 내려가면서 청각이 그 다음에 후각이, 미각이, 촉각이 이렇게 되는 거요. 그래서 눈도 한번 보세요. 눈이 제일 위에 있지. 아무리 기형아도 귀가 제일 위에 간 사람은 없습니다. 어쨌든 코는 귀 밑에 있습니다. 그리고 입이고.
물고기든 뭐든 아무리 이상하게 붙어서 이 순서가 어긋나는 것은 없습니다. 입이 눈 위에 붙었다. 이런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생물의 진화 과정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눈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정보가 제일 많고 제일 정확합니다. 그러다보니까 다른 것은 눈에 눌려서, 눈이 워낙 정확하게 알아버리니까 딴 것은 기능이 좀 감퇴합니다. 촉각은 고체죠. 미각은 액체죠. 후각은 기체죠. 청각은 장파죠. 시각은 초단파죠. 다 다릅니다. 이렇게 우리의 몸이 감각을 하는 대도 대상이 다 달라요.
그런데 우리는 이 파로서 모든 것을 아니까, 딴 것들은 요즘말로 하면 핸드폰이 온갖 군데서 잘 작용하면 유선전화가 필요합니까? 안 합니까? 필요 안하죠. 그거와 같아요. 이 촉각이니 미각이니 후각이니 이런 것은 일종의 유선전화 같은 겁니다. 물질로서 연결되는 것. 청각이나 시각이라는 것은 파로서 되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가 영상물을 잘 만들면 청각이나 시각은 3차원적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도, 영상물을 통해서 촉각을 느낀다든지, 미각을 느낀다든지, 후각을 느낀다든지. 이런 것은 못 만들어요. 그 이유는 다른 것은 파로 되고 이것은 실제로 물질로 되어야 되기 때문에.
이런데서 우리가 본다는 말을 자꾸 쓴다. 훤히 본다. 즉, 안다는 말을 하는데, 아는 것은 이것을 다 가지고 아는 거예요. 왜 아는 말을 하는데 자꾸 본다는 말을 쓰느냐? 그것은 아는 것=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실제로는 아는 것에는 보는 것의 일부죠. 사실 다른 방식으로 아는 것도 많이 있단 말이오. 그러나 90%이상이 보는 것이 아는 것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보는 것= 아는 것, 아는 것= 보는 것이 되는 거요. 그러니까 이 알 지는 6가지 감각을 기관을 통해서 아는 것인데, 그것의 대부분이 보는 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볼 견자를 쓰든지 안 그러면 관할 관자를 쓰든지. 본다는 말을 쓰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래서 훤하게 안다는 말이 쓰여지는 이유도 그런데 있다. 우리가 아는 것의 대부분이 보는 경험을 통해서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 보는 것은 빛이 있어야죠. 듣는 것은 소리가 있어야죠. 코는 냄새가 있어야 되고, 혀는 맛이 있어야 되고, 몸은 감촉이 있어야 된단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멀리 떨어서져서 소리가 안 들리거나, 장벽이 있어서 빛이 안 보이거나, 냄새나 맛이나 이게 차단이 되면 우리는 못 느껴요.
그런데 이 뇌파, 뇌파는 빛하고 달리, 빛은 장벽을 못 뚫고 나가지만 뇌파는 장벽을 뚫고 나간단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지구 저편에 있는 것, 멀리 떨어져 있는 소리도 들을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것도 알 수 있다. 이게 제6번째 앎이란 말이오. 이것을 천안이라 그래요. 천안. 하늘의 눈이다. 즉 신들의 눈이다. 그 신들의 눈이 어디 있냐? 그래서 인도에서는 이마에 있다. 그래서 신을 표시할 때는 이마 가운데에 표시하는 거요. 신안. 천안이다. 우리가 보통 말하면 뭐요? 제6번째 감각이다. 육감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이게 마음과 마음이 교감해서 아는 거요. 수행을 많이 하고 순수의식에 들어가면 보지 않고도 볼 수 있는 천안이 생깁니다. 듣지 않고도 들을 수 있는 천이가 생기고, 천안통 천이통.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있는 타심통도 생기고, 우리의 까르마, 전생과 내생이 과거에 까르마를 알 수 있는, 이런 숙명통도 생긴다. 이런 여러 가지 신통이 생긴다고 하잖아요. 이게 천안이오. 천안. 그래서 우리가 이런 6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우리의 앎이 있다. 이 말이오.
그런데 많이 공부하죠, 책을 많이 읽고, 강의도 많이 듣고, 경험도 많이 하고, 이렇게 아무리 우리가 많이 알아도 우리의 그 앎은 정확치는 않습니다. 백프로 정확치는 않아요. 우리가 이집트에 가면 나일강이 있다. 나일강은 몇 키로다. 듣고 아는 거지 가봤어요? 아니오. 그런데 이런 정보는 때로는 가보면 엉터리 정보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증명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아는 것들은 잘못 아는 게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아는 게 힘이다. 알면 곧 믿게 되는 거요. 그러나 그 앎에는 잘못된 앎이 있다.
마치 믿음에 잘못된 믿음이 있듯이 앎에도 잘못된 앎이 있다. 오늘 우리가 아는 것 중에 얼마나 잘못 알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남편, 아내, 자식, 타인에 대해서도 잘못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왜? 편견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잘못 알고 있다.
그것은 밝은 게 아니에요.
자기 생각에 빠져서
남의 얘기를 제대로 안 듣지 않습니까.
들어도 자기식대로 또 들어버려.
그것도 다 잘못 아는 거거든요.
그래서 아무리 많이 알고,
아무리 깊이 알고,
아~~~무리 제대로 안다고 해도
깨달아버리는 것보다 더 밝게 알 수는 없다.
확연히 깨쳐버리는 거요.
우리가 아는 것을 하루 종일 이 방안에 있으면서 깜깜한 곳에서 더듬어서 알았는데, 불을 탁 켰을 때, 착, 한눈에 본 것보다도 더 적게 알 수가 있죠. 더듬으면서 자기 나름대로 착각을 해서 잘못 아는 것도 있고. 그래서 이 깨달음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하다. 그러니까 그 어떤 앎보다도 이건 더 확연히 아는 앎에 속한다. 뭐가? 깨달음이. 반야가 그렇다.
그래서 뭐라고 했다? /시대명주/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여러분들은 부지런히 공부하셔서 많이 알아야 됩니다. 아는 데는 6가지 방법이 있다. 우리는 주로 5가지만 치우치는데, 우리가 수행을 하면 천안까지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얻는 그 신통력도 깨달음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그래서 아무리 큰 신통력을 가져도 그것은 성인의 지위가 아니다. 이것은 중생의 지위지. 그래서 우리가 살면서 내가 아는 그런 몇 푼어치 지식으로 그것을 자랑하지 마라. 네가 가진 재물로 자랑하지 마라. 네가 가진 지위로 자랑하지 마라. 그거 몇 푼어치 안 된다. 진실로 네 것이 아니다.
그것처럼 네가 신통을 얻었다 한다 하더라도 저 하늘의 세계를 다 본다 하더라도, 신들의 음성을 다 듣는다 하더라도, 숙명통이 열렸다 하더라도, 타심통이 열렸다 하더라도 그거? 깨달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을 갖고 자랑하지 마라. 그런 것은 다 버려라. 그래야 깨달음의 눈이 열린다. 그래서 부처님이 마치 재물을 지위를 하찮게 여기듯이 신통을 중요시 하지 마라. 버려라. 이렇게 하찮게 얘기 하신 거요. 이것을 알아야 되요.
그 어떤 앎보다도 더 위대한 앎,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앎이 뭐다?
깨달음이다.
그래서 이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밝은 주문이다. 가장 밝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다음에 3번째, 우리가 믿고, 바르게 알고, 이 /신-혜/가 항상 같이 있어야 됩니다.
믿음만 있고, 앎이 없으면 미신이 되고,
앎만 있고 믿음이 없으면
이것은 알음알이에 불과하다. 실천적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믿음은 굳건한 데,
논리적으로 합당하지 않죠.
그러다보니 굉장히 맹신적인 요소가 많고,
철학은 논리적으로 굉장히 합당한데,
믿음이 없기 때문에
다음 단계의 실천력이 동반이 안 되는 거요.
그래서 세 번째 /신-혜/가 겸비된 사람이 다음단계로 해야 될 게 실천이다. 실제로 행해봐야 돼. 보시를 행하는 게 좋다. 알았다. 이거야. 그러면 그 전에는 몰라서 내 이익만 추구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아니다. 주는 게 있어야 받는 것도 있다. 투자를 해야 이익이 오는 게 아니냐. 그러니까 베풀어야 거둘게 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보시를 하는 게 좋다. 하는 것은 알았어요. 그러나 실제로 보시를 해야죠. ‘보시를 하는 게 좋다.’ 이 말만 알아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담배를 끊는 게 좋다.’ 말만 알았다. 아무 의미가 없죠. 실제로 담배를 끊어봐야 돼. 실제로 행해야 돼.
이렇게 우리가 실제로 행해서 즉, 운전 연습하듯이 자꾸 행해 보는 거요. 자꾸 실천을 해본다. 그러면 거기에서 오류가 발견되고 고치고 또 행하고, 고치고 또 행하고. 이
실천을 할 때 나타나는 게 뭐요? 정진입니다.
실천을 할 때는 한꺼번에 안 됩니다.
자꾸 실패하게 되요.
그럼 실패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다시 해야 돼. 무조건 다시만 하면 되느냐?
아니에요. 그 실패한 원인을 일단 점검을 하고,
또 약간 방법을 달리해서 또 해봐야 되요.
즉, 이것을 뭐라고 하냐? 연구하면서 한다.
이렇게 말해요. 연구하면서. 넘어지면 일어난다. 10번 넘어지면 11번째 일어난다. 그런데 막연히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니고, 연구하면서 한다. 이렇게
꾸준히 물러남이 없이,
물러남이 없이 하는 것을 불퇴전의 정진이다.
이렇게 말해요. 이렇게 꾸준히 계속 해야 된다.
그런데 그 어떤 실천보다도, 어떤 행보다도
확연히 깨치는 것 보다 더 높은 실천은 없다.
결국 많은 실천을 행해서 궁극에 가서
그 실천에 맨 끝이 뭐겠어요? 깨침이겠죠.
우리가 한문을 공부할 때도 ‘문리가 튼다.’ 이런 말이 있단 말이오. 한자 한자 한자 한자 공부하는 게 이게 배우는 과정이죠. 그러다가 일정한 과정이 지나 가버리면 저절로 아는 과정이 있다. 저절로 아는 과정. 이것은 피아노를 치는 사람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처음에는 건반 하나하나 이렇게 두드려서 배우지만 나중에는 건반 보고 칩니까? 아니죠. 그냥 저절로 쳐요.
자전거 탈 때도 마찬가지 아니오. 처음에는 왼쪽으로 넘어지면 왼쪽으로 틀고, 오른쪽으로 넘어지면 오른쪽으로 틀고 이래서 배우는데, 그거 알아도 왼쪽으로 넘어지면 거의 대부분 오른쪽으로 꺾게 됩니다. 그래서 몸이 자동적으로. 그러다가 어쩌다가 왼쪽으로 꺾이면 자전거가 안 넘어지거든요. 오른쪽으로 넘어지려고 하면 오른쪽으로 꺾으면 안 넘어진다. 이것이 몇 번 되면 그 다음에 안 넘어지고 탈 수 있다. 안 넘어지고 타는 정도가 아니에요. 얘기해가면서도 타고, 뒤에 한명 태우고서도 타고, 나중에 가면 손 놓고 타죠. 손 놓고도 그냥, 몸으로 갖고 이렇게 이렇게 하면서 다 이게 조정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럼 이게 거의 저절로 됩니다. 저절로.
이렇게 우리가 실천을 하게 되면 결국은 저절로 되는 단계, 그래서 연습이 끝나면 그래요. 이런 단계가 사람들이 볼 때, “저 사람은 자전거 타는 데는 도가 트였다.” “피아노 치는 데는 도가 트였다.” “뭐에는 도가 트였다.” 이런 말 하지 않습니까? 그죠. 그럼 이런 단계에 이르는데, 그 단계를 넘어갔을 때, 이치가 확연히 한 눈에 다 보이는 거요. 이게 뭐라고 한다? 깨달음이다. 깨달음. 그래서
깨달음은
최고의 실천이다.
그러니까 그 최고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깨달음이 있고, 또 깨쳐버리면 그 모든 단계를 뛰어넘는 거지, 눈떠버리면 그 꿈속에 있던 모든 단계를 다 뛰어넘어 버리는 거지, 그리고 꿈속에서 뭘 했다 하더라도 궁극에 가면 눈 떠야 되는 거요. 그것처럼 최고의 실천의 단계에 속한다. 그래서 이것보다 더 높은 주문은 없다. 최고 높은 주문이다. 왜 높다고 표현했는지 이해하시겠죠? 이것은 행을 말한다. 최고의 행을 말하는 거다. 그것은 반야바라밀다가 이만큼 위대하다는 것을 말하는 거요.
그다음에 우리가 /시무등등/등등 같다 이 말이오. 등자는 같을 등자에요. 무등등. 같지 않다. 같지 않다. 뭐와 같지 않다? 그 어떤 것을 통해서 얻은 경험도 이 깨달음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그래서 이것은 증득, 증_신해행증, 증이라는 것은 자기가 체험을 했다는 얘깁니다. 내 손에 잡혔다. 내거다. 믿음도 사실은 내 것이 아니고, 아는 것도 확실히 내 것은 아니에요 .실천도 마찬가지에요. 궁극적으로 진리가 증명되는 것은 내가 경험을 해야 됩니다. 내가 해서 그게 딱 증득이 되어야 돼.
그러면 우리가 “얻었다.” 이렇게 말하죠. “나도 얻었다.” 이렇게 표현한단 말이오. 그러나 그 얻었다할 때는 비교하는데, 그 어떤 것도 얻음보다도 더한 얻음이. 깨쳐버리는 것 보다 더 큰 것을 얻음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재물을 태산같이 모았다 하더라도 아니, 삼천대천세계 칠보로 가득히 채웠다 하더라도 깨쳐버리는 것에 비하면 그것은 그냥 티끌 같은 거요. 권력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설령 왕이 되었다 하더라도, 아니 왕중의 왕인 전륜성왕이 되었더라도 아니, 저 자재천궁의 왕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깨달음에 비교한다면 그것은 한밤의 꿈에 불과한 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재물도 지위도 명예도 다 사실은 꿈같은 거다. 꿈속의 얘기다.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그것은 실체가 없고 늘 변하는 거요.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다. 이렇게도 표현하고 그것은 여몽환포영_꿈같고, 환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다. 이렇게도 표현하지 않습니까? 그 깨달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위대하다. 그래서 다시 보면, /고지/ 이런 까닭으로 알지어다. /반야바라밀다/ 반야바라밀다는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다/ 이것은 반야바마밀다가 얼마나 위대하다는 것을 말하는 거요.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능제/ 능히 제한다. 없앤다. 능히 없앤다. 뭘 없애느냐? /일체고/를 없앨 수 있다. 깨달아 버리면 모든 번뇌와 모든 괴로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그런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니까 능제, 능히 없애버린다. 뭘? 일체 고를 없애 버린다. 그러니까 관자재보살님께서는 오온이 모두 공함을 보시고, 어떻게 해서?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오온이 모두 공함을 조견하시고, 일체 괴로움에서 벗어났느니라.
제불보살이 다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정진함으로 해서 원리전도몽상, 뒤집혀진 잘못된 생각을 멀리 떠나 구경열반, 마침내 열반에 이르렀다. 삼세제불이 다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였느니라. 이렇게 말하잖아. 일체의 괴로움을 다 없애버리는 그런 거다. 꿈속에서 일어난 어떤 괴로움도 강도에게 쫒기든, 뱀한테 쫓기든, 사자한테 쫓기든, 감옥에 갇히든, 사형장에 서 있든, 뭐 그 종류는 수백 수천 수만 가지 일수가 있지만, 눈떠버리면 그냥 없어지는 것이지 종류에 따라 쉽고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꿈속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쉽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여러분들이 겪는 고통은 쉬운 게 있고 어려움이 있죠.
그것은 꿈속에서 있는 얘기요.
눈떠 버릴 때는 어렵고 쉽고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냥 사라져버려요.
그래서 일체고가 다 사라져버린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으니까 믿어져요? 안 믿어지지.
그래서 그 다음에 이 말은 이 얘기는 /진실/하다. 이것은 진짜다 이 말이오. 진짜다. 두 번째 실_이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진짜고 이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금강경에 뭐라고 그래요? 여래는 부처님은 진어자, 진실을 말하는 자다. 허트게 거짓말 하는 자 아니오. 실어자_여래는 사실을 말하는 자다. 허황된 얘기를 하지 않는다. 사실 있는 그대로 말한다. 여기서 진실이라고 말해진 것은 금강경에 있는 진어자 실어자를 딱 압축해 놓은 거요. 진어자 실어자. 진실하다. 사실이다. 그래서 이것은 진실이다.
두 번째 /불허/ 이것은 헛된 말 아니다. 그러니 금강경에는 뭐라고 쓰였어요? 불이어자, 불광어자, 이렇게 써 놨거든요. 불이어자_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다. 불광어자_미친 소리를 하지 않는다. 이 말은 그런 두 가지 말, 다른 말, 그런 게 아니다. 이 말은 진실한 말이다. 헛된 말이 아니다. 그래서 이것을 불이어자 불광어자를 줄여서 여기는 뭐라고 했다? 허라고 표현했어요. 불허. 헛된 말을 하지 아니하는 거다. 그래서 여래의 말씀은 참을 말하는 거고, 사실을 말하는 거고, 이것은 절대로 헛된 말은 아니다.
뭐가 사실이고, 헛된 말이 아니란 얘기요?
반야바라밀다를 행하게 되면
마침내 열반에 이르게 된다.
이게 절대로 허튼소리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된다? 이제 우리가 남은 일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다. 이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꿈속에서 강도에서 쫓기면서 도망도 가보고, 도움도 요청도 해보고, 숨어보기도 하고, 강도하고 싸워보기도 하고, 온갖 행동을 다 해봤어.
그런데 지금 아는 것은 뭘 알았다는 거요?
이게 꿈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면 이게 꿈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오직 갈 길은 한 개 밖에 없어요.
뭐하는 거? 눈 뜨는 것 밖에 없어요.
이게 꿈인 줄 모를 때는 백가지 천 가지로 대응하게 되는데,
이게 꿈이다하는 것을 알아버리면 눈뜨는 일 밖에 없다.
그래서 여러분도 꿈속에서 막, 괴로워하다가 “이거 꿈일지 모르다.” 이런 생각든 적이 있어요? 그런 적 없어요? 저는 가끔 경험해요. 요새 굶고 있다 보니까 가끔은 잠시 잠시 이렇게 꿈속에 휘말릴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딱 정신이 들죠. “어, 이거 꿈일지 모른다.” 거기 끌려가면 한없이 끌려가죠. 그러면 눈이 잘 안 떨어지죠. 애를 좀 써야 됩니다. 눈꺼풀 떨어지는 무게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조금만 정신을 놀리면 그냥 빠져드는데, 탁해서 딱 떠보면 그냥 가만히 누워있죠. 아무 일도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이 꿈이라는 것을 알은 사람은 이제 모든 다른 행동은 다른 시도는 다 멈추어 버려요. 남은 것은 오직 한 가지, 눈뜨려고 하는 것 밖에 없어요. 그래서 우리의 갈 길은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 밖에 없다.
그래서 /고설/ 이런 까닭으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다/는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일러 가로되, /즉설주왈/ 일러 가로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이것은 다음 시간에 제가 또 말씀을 드리지만, 가자가자. 가세가세. 저 언덕으로 넘어가세. 저 언덕이 바로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저 언덕에 도달하여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하여 이렇게 말할 수도 있고, 가세가세 저 언덕으로 건너가세. 저 언덕에 도달하였네. 저 언덕에 도달하여 깨달음을 이루세. 이런 얘기요. 깨닫는 것 빼놓고 할 일이 없습니다.
기미독립선언에도 보면요, ‘오등은 아 조선의 독립국임을’ 왜 우리가 독립을 해야 되는지 다 설명을 했어요. 그리고 밑에 공약3장, 그러니 어떻게 하자는 거요?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이런 말 나오죠? 그것처럼 이제 앞에서 쭉! 설명을 다 했어요. 대승사상의 요지에 대해서. 다 듣고 보니까, 우리 할 일이 뭐 밖에 없다? 깨달을 거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여러분들 근심걱정이 남편이 술 먹는다, 바람피운다. 내가 잔소리 한다. 시어머니가 잔소리 한다. 애가 공부를 안 한다. 이런 거 갖고 늘 괴로워서 이럴까 저럴까 이럴까 저럴까 했는데, 이런 거 딱 놔놓고 눈뜨는 길로 가야 됩니다. 눈을 번쩍 뜨고 나니 다 꿈속의 얘기요. 눈뜨고 보니까 별거 아니오. 지가 먹고 싶어서 좀 먹는 거고, 애들 컴퓨터 좀 하고 싶어서 하는 거고, 어머니께서는 자기 경험이 있으니까 나한테 들으라고 가르쳐주려고 말씀을 하시는 거고, 그래서 어머니 말씀하시면 배우는 자세로 들으면 되고,
애는 “나 어릴 때 생각해 보니 나도 저때 공부 안했다. 공부하기 싫지. 이렇게 들어가면서 공부하기 싫어서 안했더니 손실이 많잖아. 그래서 너도 내 경험으로 볼 때 이런데, 너는 어떨까? 너도 나와 같은 전철을 밟을래? 안 그러면 넌 나보다 좀 똑똑해 질래? 네가 알아서 해라. 네가 공부해서 대학 간다면 부모로서 도와줄 수도 있지만, 네가 공부하기 싫어서 안 가겠다면 어려운데 잘됐다. 그래. 나도 대학 안가도 이렇게 잘 사는데, 괜찮아.” 이렇게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
자꾸 제 맘대로 남편도 하면 “그래, 나도 내 맘대로 하고 싶은데, 당신도 당신 마음대로 하고 싶지. 해 봐라.” 이렇게 할 수도 있고. 계속 마음에 안 들면 불러서 “당신 계속 혼자 마음대로 하면 결국은 ‘안녕히 계십시오.’ 할 수 밖에 없어.” 이렇게 가볍게 얘기할 수도 있죠. 어렵게 얘기할 필요가 없어요. 이게 꿈을 깨면 가벼운 데 꿈속에서는 너무너무 무겁단 말이오. 왜? 너무너무 큰일이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하나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자기에게로 돌이켜서 부처님의 가르침, 법에 의지해서 우선 내가 해탈하는 것을 먼저 해야 되요. 그래야 여러분들이 힘이 생겨요. 우선 첫째 내가 편안하고 그래서 놔놔도 되고, 두 번 째는 고치겠다하면 고칠 수 있는데 힘이 굉장히 붙습니다. 애 공부를 저 컴퓨터에 중독이 되었다. 저거 고쳐야지. 이러면 그냥 야단만 치고, 또 애가 울면 또 하라 그러고, 또 야단 치고,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데, “어 저거 고쳐야 되겠다.” 이러면 학교 가서 휴학계 딱 내놓고 애 데리고 인도 가서 저기 히말라야 산속에 가서 6개월 살다 오는 거요. 그럼 딱 고쳐지겠죠.
왜? “휴학을 하면 어떠니, 공부가 되면 어떠니.” 이런 번뇌가 없어지거든요. 이 아이에게는 정말로 지금 부모로서 이것은 내가 꼭 도와줘야 되겠다.” 딱 하면 내 희생을 감수한단 말이오. 돈 쌓아 놨다 어디 쓰노? 돈을 써도 확실하게 쓰고, 자식이 낭비벽이 있다. “저거 고치려면 내가 근검절약해야 되겠구나. 저 낭비벽은 나를 보고 배운 거구나.” 그래서 내가 근검절약을 해야 되겠지. 그럼 근검절약 하려면 나도 힘들어요? 안 힘들어요? 힘들지. 그것은 자식을 위해서 내가 힘든 것을 감수해야 되는 거요.
그런데 저는 굶어죽는 북한 동포를 위해서도 이렇게 내가 힘드는 것을 감수하고 하려는데, 여러분들은 남도 아니고 제 자식을 위해서 왜 힘드는 일도 안하려고 그래요. 너무 세상을 무사안일로 살려는 거 아니오? 그저 공짜로 먹으려고 그래. 그저 조금 하다 안 되면 부처님한테 손 벌리고, 하느님한테 손 벌리고, 한 사람한테만 손 벌리고 되는데 이 사람 저 사람 다니면서 한단 말이오.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러잖아요.
자신이 최선을 다해야 됩니다.
그것을 수행이라고 그래.
내가 최선을 다할 때 이웃사람이 보고 감동을 해서 저절로 돕는단 말이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과 제자들은 다 검소하게 살았잖아. 정말 하루 한 끼 먹고, 다 떨어진 옷 입고, 나무 밑에서 조용히 명상하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보고 감동을 한단 말이오. 저런 분을 위해서는 내 음식을 줘도 하나도 안 아까워. 낭비 안 하시니까, 내 옷을 벗어줘도 하나도 안 아까워. 두벌 세벌 차지하실 분이 아니란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보시가 기꺼이 이루어지는 거요. 그러니까 주면서 기쁜 거요.
우린 여러분들이 보시하면서 아까워서 우선 주기 힘들고, 주고 난 뒤에 “저거 어디 쓰지?” 이렇게 마음이 좀 언짢지 않습니까? 나는 이고생해서 보시했는데, 알고 봤더니 돈을 엉뚱한 데 썼다. 불사하는데 가보니까 너무 호화판으로 낭비한다. 자기 생활에 너무 낭비하고 있다. 회계도 제대로 안 되어 있고. 이러면 돈 내기가 아깝죠. 자꾸 내라고 하고. 그럼 가기 싫죠.
그게 아니라, 내가 보니까 참 좋은 일을 하시고, 그래서 내가 돈이 내고 싶어. 내라서가 아니라 내가 내고 싶단 말이오. 내놓고 나중에 돌아봤더니 너무너무 알뜰하게 쓰여 졌어. 내가 너무너무 기분이 좋아. 그래서 계획에 없던 돈 더 갖다 주고 싶어. 이게 본래 보시 정신이오.
그래서 부처님은 대중들 앞에 가서 “보시하라.” 이런 말 안하죠. 그분께서 청렴히 살아가신다. 그러면 대중이 부처님께 가서 공양을 올리죠. 그러면 부처님은 그 공양을 얻어 드시고 그 대중을 위해서 다시 법공양을 베풀죠. 깨우침을 준다. 이 말이오. 그러면 또 깨우침을 듣고 너무너무 고마워서 일반대중은 내놓을 게 물질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음식을 올리든지, 안 그러면 하루 잠자리를 제공해 드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옷을 해드리든지, 병이 났으면 약을 내드리든지, 이렇게 해서 서로 아름다운 관계가 된다. 서로 못 믿는 관계가 되는 게 아니고. 이게 불법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제는 이 정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었으니까, “아, 가야할 길은 깨달음이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 요 아제아제에 대해서는 조금 더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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