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월도스님_BTN즉문즉설

월도스님 BTN 즉문즉설 28_7. 부처님께서 이 세상 오신 진정한 의미와 참된 불자로서의 자세가 궁금합니다.

Buddhastudy 2017. 12. 5. 20:33


일상적인 부분에서 많이 고민되어지는 것이 바로 이런 거잖아요. 처님은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러 오셨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에 오시기전에 도솔철 내원궁이라고 하는 곳에서 호명보살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계셨다. 라고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호명보살의 모습으로서 이 사바세계, 우리가 사는 세계를 쭉 내려다보셨다고 그래요.

 

그때 보니까 이 사바세계라고 하는 곳이 참 살기가 괜찮은 곳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다투고, 서로 시기하고, 그래서 아주 즐거운 정토를 만들 수 있는데 불구하고 그 정토를 모르고, 서로 다툼의 현상으로 살고 있는 그들에게 정토의 가르침을 즉, 극락의 세계를 가르치기 위해서 이 사바세계에 오셨다고 우리가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중생들이 사는 모습은 육도윤회를 하지 않습니까. 육도윤회라는 자체는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 이것을 중생계라고 얘기해요. 중생계. 윤회계라고 얘기를 하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중생계에서 계속 돌고 도는 인생을 반복하고 있는 중생들에게 한 발짝 더 뛰면 극락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서 사바세계에 오신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탄생을 하실 때에 탄생계에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어머니의 옆구리를 통해서 세상에 나오셔서 사방 동서남북 7발자국을 걸었다.

그리고 하늘 위아래를 가르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일체개고 아당안자.

 

천상천하에 나 홀로 존귀하다.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중생의 고통을 마땅히 편안하게 하리라.

 

왜 부처님께서는 여섯 발자국을 걷지 않고 일곱 발자국을 걸었을까? 중생을 내버려둬도 여섯 발자국을 걷고 사는 겁니다. 윤회의 발자국이 바로 6개죠.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 이게 6개 아닙니까?

 

부처님께서는 한발자국을 더 걸은 거예요. 사방 일곱 발자국을 걸으신 거예요. 그 여섯 발자국 이후의 일곱 발자국이 뭐냐 하면 해탈을 가르치기 위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고로,

 

오늘날 우리는

그 해탈이라고 하는 부분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뭐냐?

복과 지혜를 얻어야 되는 겁니다.

복이 많아야 되고 지혜가 많아야 됩니다.

 

복을 짓는 방법은 뭡니까?

나 아닌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서

내가 바라는 마음 없이 희생하는 부분이 바로 공덕입니다.

아시겠죠? 이게 공덕이에요. 공덕을 짓는 데에는 인색함이 없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대게 보면 우리 집에 밥 먹으려고 그러는데 거지가 오면 기분이 좋아요? 안 좋아요? 내 밥그릇 뺏겨야 되잖아요. 그런데 옛날에 성현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내 집에 거지가 와도 절대 귀찮게 여기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에 저는 우리 상월대조사님이야 이루 말 할 수 없는 그 조상대대로 아주 공덕을 좋아하는 그런 가문이라고 들었습니다. 큰 가문이면 그런 가문에 큰 어른을 모실 수 있는 가풍이 있는 거예요.

 

2대 정종에 대한 이야기를 제가 들은바가 있습니다. 아주 가난하게 사셨죠. 여의 생이라고 하는 곳에서. 정말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는 게, 그 여의 생이라고 하는 마을이 지금도 서너 가구 살기가 바쁜 동네인데, 그 당시에 29가구가 살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좁은 골짜기에 29가구가 사니까,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겠습니까? 그때는 농경사회에 화전민으로서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환경 속에서.

 

어느 날 저녁에 어머니들이 대게 밥을 해서 가족들을 주면 어머니들은 부엌에서 한 숟갈 뜨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법을 뜨려고 하다보면 이웃집에서 마실을 온데요. “누구엄마!”하고 오면, 거기에서 그 밥을 다시 솥에다 넣지 못하고 그 이웃집 마실 온 그가 밥을 굶었다는 시실을 알고, 그 밥을 그에게 나눠줬던 것이 모친의 마음이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그게 좋은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공덕이라고 하는 것은요,

먹고 남을 것을 남에게 주는 게 공덕이 아니에요.

내 생명과 맞바꿀 수 있는 그런 위기상황 속에서도

상대방의 배고픔이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의 마음이

계산 없이 내는 것 자체가 공덕이고 자비라는 얘깁니다. 아시겠죠?

 

이런 마음이 그런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공덕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어떤 보살님들 같은 경우에는 불사를 하는 것에 있어서 스님에게 그 불사하는 게 안타까워서 본인 것을 다 시주를 해놓고도, 그러고도 스님에게 고맙다는 사람이 있어요.

 

부처님이 이미 자타카라고 하는 경전을 통해서 수많은 경전에 나타는 것이 뭐냐 하면 전생이라고 하는 부분에 수억의 생을 통해서 그러한 보시와 공덕을 지었다. 그래서 부처님을 부를 때 양족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공덕이 충만하고 또한 앉아서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수억겁생을 통해서 수행을 해오셨다. 그를 통해서 완성을 하는 부분이 바로 복과 지혜를 완성하신 부처님이세요.

 

우리가 부처님에게 배워야 될 것은

바로 육도윤회라고 하는 한 차원을

그와 같은 공덕과 지혜를 구한 수행으로서

한발 더 걷는 방법을 배우는 것 자체가

진정한 불자의 도리다.

라고 하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