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0)

즉문즉설_법륜스님(제314회) 제법이 공하다..장애아 손녀

Buddhastudy 2010. 7. 5. 20:59

  방송 보기: BTN


물론 손녀들이 이렇게 신체장애가 있으면 할머니로서 마음이 아프겠죠. 그럼 이 마음이 아픈것의 근본이 어디있을까? 이런 말이오. 마음이 아픈것의 근본 원인이 어디있을까? 본인이 생각해 보면 장애인 아이들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겠죠. 그러면 장애인 아이들을 가지면 왜 마음이 아프고 힘들까? 장애인은 좋지않다 이런 거 아니겠어요? 내가 좋지 않는 것을 가졌기 때문에 괴롭다는거 아니에요. 그런데 신체가 장애인이면 좋지 않는 거냐? 신체가 장애면 좋지 않는 거냐? 나쁜 거냐? 이 말이오. 우리가 그렇다. 이렇게 생각한다. 바로 신체가 장애면 나쁘다 이것이 중생의 생각이다. 어리석은 중생의 생각이다. 어리석은 중생의 생각 때문에 장애인은 나쁘다고 생각하고 장애인을 둔 것은 나에게 큰 괴로움이다. 또는 무슨 죄 받음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 또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이 모든 것에 가장 밑바닥에는 장애인은 나쁜 거다.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럼 정말 장애인은 나쁜 것인가? 부처님의 근본 도리에서 본다면 모든 사람, 모든 사물, 모든 존재는 거기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 그것은 다만 그것 일 뿐이다. 좋고 나쁨은 우리들의 마음에서 생겨나는거다. 좋고 나쁨이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을 인식하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좋고 나쁨이 있다. 이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것은 무명업식에 가려진 마음이다. 만약에 우리가 무명업식에 벗어나지면 어떠냐? 그 맑고 청정한 마음에서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면 사람에게는 사물에게는 존재에게는 좋고 나쁨이 없다.

 

그것은 다만 그것일 뿐이다. 이것을 근본 교설에서는 연기라 했고. 또 무아와 무상이라고 했다. 대승 불교에서는 공이라고 했다. 제법은 공하다. 거기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 크고 작음도 늙고 죽음도 깨끗하고 더러움도 일어나고 사라짐도 없다. 이 모든 분별은 우리들의 무명업식에 가려진 어리석은 마음에서 일어난 거다. 팔이 하나 없으면 나쁜 것이 아니라 생활하는데 좀 불편하다. 키 작은 사람이 선반의 물건 내리는데 좀 불편하듯이. 그러면 키 큰 사람은 그냥 내리면 되고. 키가 작은 사람은 의자를 놓고 올라가서 내리면 되고. 아니면 선반의 물건 내릴 때는 키 큰 사람에게 부탁을 해서 내리고. 아주 마룻장 밑에 좁은 공간에 물건이 떨어졌으면 덩치큰 사람은 못 들어가서 못꺼낸다. 그럴땐 누구를 시켜야된다? 조그마한 어린아이한테 시켜서 가져오게 해야된다. 이렇게 역할이 다르다. 큰 것은 그것에 맞게 사용하고 적은 것은 적은것에 맞게 사용하면 된다.

 

그래 이것은 어떤 상황에서 불편한가? 선반위의 물건을 내린다고 하는 상황에선 키 큰 사람이 유리하고 키 작은 사람이 불리하다. 그렇다고 키 큰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키 작은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이 말이오. 이런 상황일 때는 키 작은 사람이 키 큰 사람에게 부탁해서 물건을 내린다고 해서 키 작은 사람이 인생살이에 불리한 게 아니다. 이 상황에서는 부탁하면된다. 다시말하면 키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을 도우면 된다 이 말이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사다리를 놓거나 의자를 놓거나 해서 그것을 보완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신체장애는 건강한 사람들이 그가 불편한 거에 대해서 도움을 줘야된다. 마치 키 작은 사람이 키 큰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선반의 물건을 내리듯이. 키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을 위해서 선반위의 물건을 내려 주듯이. 건강한 사람이 장애인을 위해서 그 조건에서 필요한 것을 도와주면 되고. 장애인은 필요한 것을 도움을 요청해서 해결하면 된다.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은 여러 가지 기술적인 개발을 통해서 해결하면 된다. 육체적인 장애는 그렇게 해결하면 된다. 그러니 문제는 장애인 자식을 낳았다면 부모를 떠나서 오늘날 사회자연의 원리에서 건강한 사람이면 장애아를 돌봐야 된다. 부모라면 자식을 돌봐야 된다. 어린애라면 어린아이를 돌봐야 된다. 건강해도 어린아이면 부모가 어릴 때 돌봐야 되는데. 장애가 있으면 어린아이라서 돌보는 게 아니라 장애이기 때문에 돌봐야 된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런 공연히 인식을 잘못한 것을 자꾸 원인을 만들어서 너는 전성에 무슨 죄를 지어 이런 애를 낳았다 이렇게 가면 이것은 꿈속에서 해매는 것과 같고 허공의 헛꽃을 꺽으려는것과 같다. 신체장애가 있는 아이를 둔 이것을 나쁘다는 인식을 하니까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나 자꾸 이렇게 연결을 하게 된다.

 

그러니 지금 이라도 부처님 법에 귀의해서 법을 올바르게 알아야 된다. 반야심경 첫 구절만이라도 알아야 된다. 오온이 모두 공함을 밝게 비추어 보니 모든 괴로움이 다 사라지도다. 한마디로 말하면 내가 착실히 살은거하고 내가 열심히 살은거 하고 신체가 장애인 자식을 둔거하고 연관이 있는 게 아니다 이거요. 내가 애기를 가졌거나 할 때 내가 어리석어서 남편을 미워하고 괴로워하고 신경을 과다하게 쓰면 뱃속에 있는 아기가 다칠 수가 있다. 그래서 장애가 될 수 있다. 이럴 경우에는 내가 참회를 해야된다. 내가 마음을 나쁘게 먹어 가지고 애가 장애가 됬다 그런 뜻이 아니라. 어리석어서 내가 내 몸을 상하게 하고 내가 내 자식 몸을 상하게 했다. 이것은 나의 어리석음이 나에게 고통을 가져온다. 이걸 참회하는거요. 그게 아니고 유전적으로나 사고로 인해서 다친 것은 그건 누구의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오히려 불법을 아는자는 이게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자식을 낳았나 이렇게 하는게 아니라. 불법을 모르는 자는 이런 자식을 둔 것을 괴로워한다면 불법을 안다면 보살의 마음을 내서 더 정성을 기울여서 돌보는 마음을 내는 게 부처님의 제자다. 그러니 이렇게 기도해야 된다.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어리석어서 법의 진실을 보지 못하고 복을 재앙이라 하고 그 동안에 괴로워 했습니다. 저도 관세음보살님처럼 작은 관세음보살이 되어 내 손녀들을 귀여워하며 잘 보살피겠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해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