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0)

즉문즉설_법륜스님(제315회) 기도의 정의

Buddhastudy 2010. 7. 6.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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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라고 쓰는 용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일반적인 의미가 있고. 정토에서 키도라는 용어는 쓰지만은 그것을 수행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용어가 있다 이 말이오. 일반적으로 기도다 이렇게 말할 때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부처님이나 보살님에게 하나님이나 여러신들에게 그것을 간절하게 갈구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일러서 기도다 이렇게 말해요. 내가 뭔가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간절하게 갈구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고. 그냥 저절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그냥 안 이루어진다고 불평하고 그냥 이루어지기만 바라는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이라면, 기도를 하는 사람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간절하게 정성을 쏟는다. 이런 얘기요.

 

그럼 이 간절하게 정성을 쏟을 때 그 간절함이 얼마나 깊으냐 하는 게 기도는 성취가 되고 안되고의 관건이 됩니다. 얼마나 간절하냐. 이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그것이 바른 방향이냐 이런 문제요. 아무리 간절하게 갈구를 해도 바른 방향이 아닐 때는 이루어지지가 않는다. 방향이 바라야 된다. 두 번째, 아무리 방향이 바르더라도 거기에 따른 간절함이 결여되어 있으면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그러면 바른 방향이냐? 아니냐 이게 뭐냐? 내가 좋은 대학가기위해서 기도를 한다. 그럴 때 공부는 안하고 그냥 좋은 대학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루에 3천배씩 기도를 했다. 그럼 이 사람이 간절하다 이 말이오. 간절하게 하고 굉장히 노력을 하는데 이 기도는 성취되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그 기도하는 방향이 바르지가 않다 이런 얘기요.

 

그러면 무엇이 잘 못되었느냐.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기도하는 학생이라면 자꾸 꽤가 나고 자버리고 늦게 일어나고 안된다 이 말이야. 그러면 그것은 안되는것은 자기 습관 업식 때문에 안된다 이거요. 이 업식을 소멸하기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할려고 하는데도 잘 안되기 때문에 그 업식을 소멸하기 위해서 자기가 기도를 한다 이 말이야. 그럴 때는 기도의 목표는 좋은 대학에 가는 거지만 현재 기도의 과제는 자기 업장을 소멸하는데 있다 이런 얘기요. 업장을 소멸한다는 것은 그 졸린다고 자고, 먹고 싶다고 실컷 먹고, 하기 싫다고 안하고 하는 이 습관을 극복을 해 줘야 된다. 그래서 다시 그러기위해서 기도를 한다. 이럴 때는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자기 업장을 소멸하는 거고. 그 업장을 소멸하므로해서 공부를 꾸준히 하는 거고. 그렇게 해서 꾸준히 하므로 해서 자기 목적을 성취할 수가 있게 된다.

 

이럴 때 그 좋은 대학에 가고 싶은 것이 정말 간절하다면 하기 싫어도 공부를 해야되고, 졸리더라도 눈을 부릅뜨고 해야되고, 아침에 일어나기 싫더라도 일어나서 해야되고. 그게 잘 안될 때는 여기에 기도를 겸해가면서 하면 좋다 이 말이오. 그래서 우리가 이 기도가 간절해야 된다. 다시 말하면 부모가 병이 들었다. 보통약을 가지고는 치료할 수가 없다. 의사 선생님이 말하기를 깊은 산중에 눈 속에 핀 꽃을 구해와야 치료할 수 있다. 그런데 눈 속에 핀 꽃은 쉽게 구할 수가 없다. 이럴 때 부모 병을 낫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자식이면 불가능한 것을 향해서 설산을 찾아 헤맬 거고. 보통 자식이면 간절하지 않으면 없는걸 어떻게 해 하고 포기해 버릴거란 말이오. 그러니까 부모의 병을 치유해야된다는 마음이 간절해야 된다.

 

간절하게 되면 그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그 눈속을 쉬지 않고 찾아 헤매게 된다. 바로 그 간절함이 기도다. 그것이 법당에서 절로 표현되느냐. 그것이 학생이면 공부로 표현이 되느냐. 그것이 일 하는 사람이면 일로 표현이 되느냐. 어떻게 표현 되느냐 하는 것은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다르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그 간절함은 쉽게 안주하는 보통사람이면 그 정도하고 관둬 버리는 그 안주함을 이겨낸다. 그 안주함을 이겨 내는 것은 업장을 소멸시킨다 이런 거와 같단 말이오. 그런데 여기에서 욕심으로 방향이 잘못됬다는것은 욕심으로 한다 이 말이오. 공부는 안하고 그저 좋은대학 가기를 바래서 절이나하고 앉아 있다든지. 그 약을 구하기 위해서 산을 찾아서 약초를 구하는 게 아니고 그냥 방에 앉아서 절만하고 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니 그렇게 산을 찾아 헤매는걸 보면 그 헤매는걸 보면 누군가 보고 감동하겠죠. 부모를 살리기 위해서 저렇게 힘들게 하는구나. 이런 어떤 감동이 있어야 된다. 감동이 있으면 누군가가 아까운 돈이라도 그 사람을 위해서 내 놓거나. 아주 자기만이 가지고 있던 어떤 비법을 알려 주거나. 뭔가 감동이 있어야 이 기적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이 기도를 할 때는 간절해야 되고. 간절하면 감동을 가져온다. 그 감동이 기적을 불러온다. 그래서 옛날부터 뭐라 그래요? 지성이면 감천이다 이런 말이 있단 말이오. 이것이 이제 우리가 말하는 기도인데 대부분 기도를 이렇게 신이 감응하도록 신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러면 사람들이 감동할 수 있을 만한 정성을 기울여야 된다. 우리 대부분 그런 정성이 없다. 욕심으로 한다 이거요. 욕심으로 아무리 해 봐야 사람이든 신이든 감동을 안한다 이 말이오.

 

두 번째, 우리가 기도다 하는 것은 업장 소멸에 더 초점이 맞춰지는거요. 무지를 깨우치는데 더 초점이 맞춰지는 기도다. 예를 든다면 남편이 술을 먹는다 그것 때문에 내가 힘든다. 그러면 남편 술 안먹게 해 주세요라고 하는게 현재까지의 나의 간절함인데 술 안먹게 해주세요에 내가 죽을 정도로 간절함이 생기겠어요 안 생기겠어요?. 안생기겠죠. 그래서 이것은 간절해 질 수가 없는거다. 이 자체가.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렇게 뭐든지 자기 식대로 자기 바라는데로만 이루려는것은 욕심이지 그것은 수행이 아니다. 그럴 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금 남편이 술 못 먹도록 남편 술 먹는 버릇을 고치는데 주로 내가 노력을 해 왔다면 이것은 남편이 술을 먹기 때문에만 괴로운 게 아니고 남편 술 먹는 것을 못 봐내는 나로부터 이 괴로움이 생겨난다.

 

이렇게 자기에게 되돌아보고. 그런 술 먹는 남편을 있는 그대로 봐 낼 수 있는 내 마음이 된다면 비록 남편이 술을 먹더라도 내가 괴롭지가 않아진다. 이게 법의 이치죠. 어리석음을 깨우쳐 이치를 내가 알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먹는 꼬라지만 보면 내가 화가 난다. 그러니까 문제가 상대를 고치는 게 문제가 아니고 그것을 봐 내지 못하는 나의 업식 이게 문제가 된다. 이걸 문제 삼아서 내가 남편이 술을 먹고 오는 것을 보고도 웃을 수 있는 그런 경지로 내가 어떻게 나갈 거냐. 이럴 때는 기도의 간절함이 상대를 바꾸는데 있는 게 아니라 나를 바꾸는데 있다. 경계로부터 끄달리지 않고 자유로워지는 그러한 경지로 이를 때까지 내가 나를 꾸준히 변화 시켜야 된다. 그럴 때 기도문이 술은 보약입니다. 이런 기도문이 주어지게 된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거는 술은 나쁘다라고하는 생각 때문에 남편이 술을 먹지 말라 그랬는데도 먹으니까 남편을 고치려고 하는 게 되지 않느냐. 술은 나쁘다 하는 이 생각은 제법이 공한 도리에 어긋나는 근본 무지에 속한다. 술이 약이다고 생각을 바꿔 버리면 술 먹는 남편이 더 이상 문제가 안 된다 이거요. 그러니까 술을 약으로 보지 못하는 나를 술을 약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내가 여는 게 내가 목표가 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안되죠. ? 오랫동안 술을 독이라고 인식해 왔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정진을 해 나가서 술이 공한 도리를 아는거요. 술이 약이다 하니까 정말 약이냐가 아니라. 술은 본래 약도 아니고 독도 아니고 공한데 내가 독이라고 생각했다 이 말이오. 그래서 이런 괴로움이 발생했기 때문에 도로 뒤집어서 술을 약이라고 볼 수 있는 마음을 낸다.

 

그러면 술이 독이라고 생각했다가 술이 약인 줄 알았다는것은 독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약이었구나가 아니라. ! 이것은 약도 되고 독도 되는데 약도 되고 독도 되는 것은 마음에서 일어난다. 그것을 깨닫게 되면 본래 뭐다? 약도 아니고 독도 아니다. 그런데 독이라고 생각하면 누가 괴로워진다? 내가 괴로워지고 약이라고 생각하면 그 괴로움이 사라진다. 이런 의미란 말이오. 이치로 보면 술은 뭐도 아니다? 독도 아니고 약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어서 독이라고 생각했다. 이 독이라고 생각한 어리석음을 타파하기 위해서 술을 약이라고 보는 기도문을 받게 된다. 그러면 이 약이라고 하는 것은 방편에 불과한 거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이 독이라는 것이 타파되면 약이라는 것도 버려야 된다.

 

그래서 부처님이 나의 가르침은 땟목과 같다 이렇게 말합니다. 강을 건넌자가 땟목을 매고 가면 어리석듯이. 술은 정말 약이구나 해서 그러면 이 문제가 해결된 뒤에도 계속 술을 먹으면 안 된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술을 먹을 때 독이라는 생각을 버리기 위해서 약이라고 하는 방편이 나왔다. 그러면 이 문제가 해결이 되면 약이라는 생각도 던져야 된다 이 말이오. 이렇게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 자기 정진을 하는것도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기도다 이렇게 표현한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쓰는 기도는 자기의 바램을 성취하기 위해서 간절한 마음을 내어 노력하는 것을 기도라고 한다. 그러면 수행자가 사용하는 기도라는 것은 경계에 따라 일어나는 자기 마음을 보고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 업식을 소멸해 나가는 것을 기도라고 한다 이런 얘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