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전우용 사담

전우용의 사담 5화 - 3.1운동과 대한민국

Buddhastudy 2019. 5. 8. 20:11


정책과 역사가 함께하는 시간, 전우용의 사담 다섯 번째 순서입니다.

3.1운동 100주년이 다가오죠.

올해가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00주년을 우리가 어떻게 기념하고 어떻게 기억해야 하며 100주년의 기억을 어떻게 후세에 계승하느냐 하는 것 자체가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올해의 기념사업 자체가 역사적 사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은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기획소통분과 위원장이신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김정인 교수를 모시고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의미를 짚어볼까 합니다.

 

대한민국 근현대 민주주의

역사 전문가

김정인

 

 

, 오래간만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십니까.

 

일단 이름이 굉장히 길어요.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지난 촛불혁명은 3.1운동의 정신을 이은 명예로운 시민혁명이었습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일이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의 토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018.07.03.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출범식)/

 

그리고 거기에 기획소통분과 위원장으로 계시지 않습니까.

이 위원회가 만들어진 경위 그리고 소속 분과들 분과별로 하는 일을 시청자분들에게 간단하게 소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먼저 작년 초에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에서 TF(테스트 포스)를 만들어서 전체 틀을 짰습니다. 그 틀이 지금 그대로 분과로 와있는데요, 그때 생각하기로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과

그 이후 100년의 역사를 발전과 성찰의 관점에서 다시 짚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미래의 100년이나 그 이후를 전망한다는 차원에서 미래의 희망,

 

3가지의 관점에서 100주년을 기념하자는 뜻이 있어서 그대로 분과화하면서 그다음에 전반적으로 기획을 하고 대국민 홍보나 이런 것들을 맡는 기획소통분과를 두었기 때문에 4개의 분과가 만들어지게 된 겁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각각 하나의 분과 지위이고, 그걸 관통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기획소통분과 가장 중요한 일이겠죠. 그렇죠?

역사가 과거 따로 현재 따로 미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상

기획소통분과를 지금 담당하고 계시니까 저는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다.>

그런데 실제로 기념사업회에서 독립운동의 전모를 밝혀야 되겠다라고 이야기하신 것은 어떤 겁니까?

그럼 좀 많이 연구가 부족하다. 연구의 인력이나 연구 내용이, 이렇게 보고 계시는 겁니까?

 

독립운동가 생각보다 발굴이 안 돼 있고, 후손들에 대한 예우가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도 부끄럽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고, 그래서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그 뒤에 독립운동가의 행적이나 이런 것들을 정리하고,

한국전쟁 관련해서는 그것도 역시 독립유공자와 같은 참전자에 대한 발굴과 예우 문제로 가고

또 하나는 과거사 문제에 해해서도 위안부 문제라든지 이런 문제들에 대한 예우,

그 다음 또 가장 주목할 것은 물론 산업화나 민주화에 대한 기념은 너무 기본전제라 빼놓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 말고도 재외 교포에 관한 문제가 있습니다.

해외 동포가 약 700만 명인데, 700만 명이 지난 100년 동안 해 온 역사적인 어떤 성과

또 하나는 한국에 지난 100년 동안 기여했었던 외국인들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세계가 함께 대한민국의 100년을 만들어 온 것이 아니냐, 그 부분에 관한 사업들을 부처에서 제안받고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이 언제 올 것이냐는 것은 100년 전부터 알고 있었던 일 아닙니까.

그렇죠? 100년 전인 1919년에 일어났던 일이니까 2019년은 100주년이 된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는데 100주년 행사 자체가 역사적 사건이 돼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 역사적 사건을 만들기 위해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중점을 둔 사업이라든가 아니면 가치나 정신 이런 것이 있다면 어떤 것으로 설정을 하셨는지요?

 

“(3.1운동 밎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 위원회의 구성이 다른 대통령직속 위원회와는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위원단 100인을 구성하는 것 자체도 하나의 기념행사처럼 치른 겁니다.

다 어떤 분들이냐면 5.18민주화운동의 당사자나 후손분들, 독립유공자 후손분들, 이런 후손분들이 많이 들어오거나 세월호 학생들도 들어와 있고, 그 자체 100인 위원회의 면면을 보면 한국의 100년이 보이도록 했기 때문에 대한민국 역사의 100년을 보여주는 상징성이 위원회가 갖는 가장 큰 의미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죠.

 

위원회 중심으로 일을 하기는 굉장히 어려운 조건이죠.

 

그래서 위원회에 각 부처의 일을 관리하는 추진단이 있어서 관리하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식의 위원회가 하는 한계가 있는데, 상징성과 실무라고 하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3.1운동 밎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 위원회 소개는 길지만 들었고요,

 

<대한민국에 오롯이 새겨진 3.1운동정신>

사실 프랑스 혁명이 최종 승리를 하는 데까지 100년 가까이 세월이 걸렸던 거니까,

(*프랑스 왕정복고 1814~1830: 프랑스 제1제정이 몰락하고 프랑스 혁명으로 쫓겨난 부르봉 왕가가 복귀하여 세운 왕정이 통치 )

 

우리나라의 경우도 유사한 문제를 최근에 겪고 있어요.

광주 5.18민주화운동에 대해서 북한군이 침투해서 벌인 폭동이라는 둥, 이야기가 정치권에서 나오고 있고, 이른바 국민이 합의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만들기 위한 진통이 아직도 벌어지고 있잖아요.

 

3.1운동의 경우에는 대규모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우리 역사상 100여 년간 보면 큰 진통은 없었던 사건이겠죠? 3.1운동을 비하하거나 부정하거나 이것의 가치를 훼손하거나 이런 발언들은 일제강점기 친일파라고 불리는 이완용같은 사람들이 망동이다, 맹동이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이완용

3.1운동 경고문

불순 세력에 의한 난동이고, 누군가 뒤에서 선동하고 있다.

아무리 시위해봤자 소용없다. 그냥 포기해라.

어차피 잠깐 타오르다가 말 거다.”/

 

프랑스 혁명의 자유·평등·박애처럼 우리가 3.1운동에서 특별히 강조해서 이 100주년을 맞아서 하나의 압축된 개념으로 함께 공유하고,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을만한 가치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프랑스 혁명 자유 평등 박애: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 속에는 르네상스 이래 인간존중이라는 천부인권사상이 전제되어 있음)

 

 

저는 민주주의, 비폭력, 평화 이런 세 가지 가치가 3.1운동에서 반드시 오늘날에도 꽃필 수 있는 가치로 계승돼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제가 변화라고 느낀 것은 3.1운동이든 이후의 역사이든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려고 하는 것 같아요.

 

적어도 관점에 대해서는 합의가 되어가는 게 아니냐. 독립과 민주주의를 함께 꿈꿨다고 하는 부분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높고, 그 부분에 대해서 주목을 하는 것 같아서 민주주의와 관련돼서는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촛불시민혁명이 없었으면 3.1운동의 가치를 무엇이라고 해야 될지 정말 몰랐을 텐데, 촛불시민혁명을 겪으면서 우리가 생각했었던 민주주의와 비폭력의 정신을 알게 된 것 같아요.

 

미국 신문에 그렇게 났다는데 23세기에나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

/BBC 촛불집회가 축제로...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평화로운 집회.../

 

그런 것처럼 어떤 정신이 살아있어서 오늘날에도 뿌리내릴 수 있는 정신의 또 정권교체 이후에 남북관계가 좋아지면서 한반도 평화 문제가 결국 3.1운동 당시에 한국의 독립이 동양 평화와 세계 평화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했었던 논리들이 다시 오늘날 되살아나는 것이죠.

 

독립을 꿈꾸고 민주주의를 꿈꿨지만 결국 평화를 꿈꿨지만 분단 때문에 평화는 안 돌아온 거죠.

그런 것들이 현실화하고 있는 과정에서 보면 오늘날 살아있는 3.1운동의 가치는 민주주의, 비폭력 그리고 평화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100주년쯤 돼서 역사적으로 정리한다는 의미는 핵심 가치들을 압축된 언어로 만들어서 우리 스스로 공유하는 정도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아직도 우리는 3.1운동을 공유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위원회뿐만 아니라 우리가 할 일이 좀 남아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북한이 3.1운동을 거부하거나 부정하거나 비하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격을 좀 낮게 보고 있잖아요.

사건의 의미를 낮추어 보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100주년이 되도록 아직도 3.1운동에 대해서 국가 단위가 아니라 민족 단위에서 합의된 견해를 갖고 있지 못하는 것이어서

사회 전 영역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주셨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이고요,

 

<우리가 몰랐던 3.1운동의 사실>

만약에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3.1운동에 대해서 정확히 인식되지 않고 있거나 좀 오해가 있거나 이런 부분이 좀 남아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 게 어떤 게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제일 재미있었던 것이 태화관에서 33인 민족대표가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고 우리 교과서에서도 쓰여 있거든요. 다 그렇게 알고 있는데요, 낭독을 안했거든요.

 

그러니까 굉장히 소소한데, 탑골공원에는 도대체 몇 명이 모였을까?

보통 수천 명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자세히 조사를 해보니까, 역사학자끼리는 200여명 정도라고 이야기를 하고,

 

그다음에 가장 오해가 있는 것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누가 읽었느냐.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나온 한의원이 읽었다. 사실 그것은 서울대학이 우리도 했다. 라는 굉장히 패권주의적인 그런 딱 한명의 증언을 가지고 한 것이고

(*경성의학전문학교: 조선 내 최고 의학 교육기관. 1946년 경성제국대학의학부와 합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흡수)

 

실제 당시 판결문을 보면 30대의 한복을 입은 분이 기미독립선언서 낭독을 하셨고요, 그분이 나중에 정재용으로 밝혀졌거든요. 황해도 해주 출신의 감리교회 전도사였던.

/1950년 이화여고 강연 중, 정재용 선생 실제 육성/

(정재용1886.11.6~1976.12.31: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사건으로 감옥생활을 하였고, 출옥한 뒤에는 의용단에 참가하여 항일운동에 전력)

 

이러한 해프닝이 있는데 인터넷을 검색하면 우리 어떡하지? 이런 고민도 있고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말이 있죠. 사실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는 것은 맞는 말인데 사실 자체가 잘못돼 있는 것들을 바로 잡는 일들이 장기적으로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리고 또 하나의 3.1운동 자체에 대해서 첫 번째로 오해에 관한 문제이고, 알아야 하는데 잘 모르고 있는 부분들도 있지 않겠습니까?

3.1운동의 핵심가치 이외에 전체적인 준비, 전개 과정에서 조금 더 교과서 수준 이상으로 우리 국민이 알아야 할 내용이 있다면 어떤 것을 짚으실 수 있겠어요?

 

저는 연대라는 단어를 들으니까 생각이 나는데요, 처음부터 종교계도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3.1운동에 연대를 했고, 그 다음에 학생들이 연대를 했고, 사실 첫날 시위는 서울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북쪽 지역 여섯 군데에서 동시에 만세시위가 일어나게 되는데, 사실 선천에서 12시에 제일 먼저 만세시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다 기독교, 천도교, 그 다음에 기독교계 학교들이 동원돼서 첫날부터 연대의 힘으로, 왜냐하면 약자인 식민지민으로서 절대권력과 같은 총독부에 맞서는 항일 운동을 할 때 아예 3.1운동 준비 자체가 함께 해야 한다는 기존 전제를 갖고 했고, 천도교에서 일어나라고 표현했는데, 실제로 지역마다 혼자 하기보다는 학생이면 학생끼리, 종교인은 종교인끼리 시작이 첫날부터 그랬거든요.

 

그래서 저는 3.1운동의 가치로서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부분이 그리고 새롭게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 연대를 했다는 점이고요,

한국사회에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연대를 만들지 않습니까, 시민연대, 국민연대. 그 흐름의 출발점에 연대 정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자들은 그런 얘기를 하기도 했었어요.

민족대표 33인이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민족대표가 천도교 대표, 기독교 대표, 불교대표, 이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민족대표 33: 19193.1운동의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

 

그래서 비하는 아니겠지만 민족대표로서의 대표성이 부족하다고 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종교계 대표들이 왜 민족 대표냐, 종교 없는 사람은 대표성도 없는 것이냐, 유교가 많았었는데 유교 대표 빠졌으니 왜 너희들이 민족 대표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왜 하필 종교계 대표라고 하는 사람으로 서명을 했을까, 조금만 설명을 해주시죠.

 

당시에 1910년에 조선총독부가 들어서게 되면서 정치, 사회단체를 모두 해산했고요, 오로지 남은 것,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종교계에 들어가서 활동하든가 아니면 학교 선생님을 하는 것 딱 두 개였는데, 약간 통쾌한 것은 그 두 군데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거죠.

학생들이 3.1운동의 주역이었고, 종교인들이 이끌었잖아요.

 

종교인들 같은 경우는 기본적으로 천도교나 기독교는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서 예배하고 집단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었고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준비할 때, 3.1운동이 단순히 서울에서만 안 한 게 다 지역에서 연계되어 있던 것이 종교는 가능했던 것이죠.

 

그래서 종교인사와 학교 교사 이외에 이러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조직을 일본이 다 깼는데, 딱 두 군데서 일어난 것이죠.

그러니까 불교는 한용운이 굉장히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천도교와 기독교가 함께 참여를 했고

어쨌든 일원화를 위해서 노력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종교계의 기독교 천도교, 불교만이 함께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 된 것이죠.

(*한용운1879.8.29.~ 1944.6.29: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조선독립의 서는 일제의 침략을 비판한 글로 유명함)

 

일본이 무단통치하에서 한국인들의 모든 집회 결사의 가능성을 봉쇄했고, 봉쇄한 상태에서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일 수 있는 공간이 교회 아니면 학교밖에 없었고요,

게다가 종교계는 모일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각의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조건 자체가 종교계 대표를 민족대표로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을 분명히 기억해두셔야 할 것 같고요,

 

많은 분이 평화적 시위, 비폭력 평화적 시위라고 이야기하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폭력적 양상이 보인 적도 있었고, 또 이 비폭력 평화적 시위를 제암리 학살사건처럼 일본군이 만행으로 한 마을 전체를 몰살시키는 그런 사건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제암리 학살 사건 1919.4.15: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 행위로 일본군이 수원(현재 화성시) 제암리에서 일으킨 참변)

 

간간이 드러나는 지역에서의 폭력성, 지역으로 확산되는 경위, 그리고 우리가 3.1운동이라고 부르지만 31일 하루에 일어난 운동은 아니잖아요.

장기에 걸친 운동이었던 셈이고요,

지방으로 확산하는 과정, 또 일부에서 폭력화됐던 평가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해주시죠.

 

일단 시위 자체는 만세시위잖아요.

만세시위가 3.1운동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이 자체는 비폭력이에요. 왜냐하면 독립선언서를 읽고 만세삼창 부른 다음에 행진하잖아요.

 

행진하다가 면사무소나 주재소 앞에 가게 되면 화가 나잖아요.

거기서부터 소리 지르고 물러나라이렇게 이야기하면, 경찰이나 헌병들이 대응하면서 총을 쏘게 되고, 아니면 폭력을 휘두르게 되면서 뒤엉키게 되는, 이야기로 많은 시위가 일어나게 되는 거고요,

 

처음부터 폭력 시위를 준비한 경우도 사실 있거든요.

안성지역 같은 경우에 폭력 시위를 면장들이 주동해서 한 적도 있기 때문에 그런 여러 가지 양상들이 존재하는데

 

아이러니한 것이 3.1운동이 처음에는 북부지방에서 주로, 70% 일어나다가 3월 중순 중남부로 가게 되면서 3월 말이 됐을 때 327일부터 43일까지가 정점이었어요.

그 시기에는 정말 폭력 투쟁도 많았고 비폭력 투쟁도 많았고 희생자도 많았고.

 

우리가 개념을 정확히 해야 할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있었던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몰은 망언도 마찬가지 방식이잖아요.

총 칼 앞에서 돌 던지는 걸 폭력이라고 볼 수 있느냐, 이런 정도잖아요.

 

폭력화했다는 것이 그동안의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자면, 비폭력 시위에서 강경 진압 과잉진압이죠. 생각 이상의 과잉진압에 대한 정당한 방어다...

그런 차원에서 정리하는 부분들이 있어야 할 것 같고요.

 

주로는 비폭력 평화 시위를 했다고 생각하고 중국의 푸스녠이 5.4운동의 지도자였는데 자기가 볼 때는 이건 진짜 비폭력 혁명인거에요. 이게 정의의 결정체다.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푸스녠1896~1950: 중국 산둥지방 출신. 1949년부터 대만대학교 총장을 역임)

(*5.4운동 1919.05.04: 3.1운동과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중화민국에서 확산한 반제국 반봉건주의 혁명운동)

 

그 말씀하신 것처럼 그 어떤 대용으로서의 정당방위로서의 폭력 이런 문제가 아니라, 한국인들이 실제로 일어나서 준비하고 나아가는 과정에서는 어떤 비폭력의 정신이 빛난다. 이런 평가를 했었던 것 같습니다.

 

만세시위라고 해서 만세라고 하는 것은 사실 중세사회의 축수잖아요.

그래서 황제 폐하 만세

그러니까 대한제국 시대에 독립협회 같은 곳에서 집회를 하면 이렇게 기사가 나요.

우리 집회가 끝날 때 회원들이 황제 폐하를 위하여 만세를 부르고

2천만 동포와 황태자 전하와 태극기를 향하여 천세를 불렀다고 나와요.

만세는 황제에게 바치는 축수였잖아요.

(* 축수: 대한제국 시대에는 황제폐하를 위하여 만세를 부르고, 황태자 전하와 이천만 동포를 위하여 천세를 불렀음)

 

이게 시위가 아니라 굉장히 기쁠 때 황제의 생일날 이럴 때 부르는 축하의 메시지란 말이에요.

그런데 만세시위를 했다, 만세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왜 그러한 만세시위를 했을까요, 설명해주시죠.

 

당시에 아주 어린 나이에 3.1운동을 목격했던 피터 현이 쓴 책 제목이 만세거든요.

(*피터 현 1906~1993: 3.1운동 당시 14살이었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상하이와 세계에 알린 현순 목사의 아들)

 

그래서 만세가 무슨 의미냐 물어봤더니 자유다이렇게 한마디로 정의를 하더라고요.

그것은 일본의 차별적인 지배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한 것이다. 보통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조선독립만세라고도 부르고, 대한 독립 만세라고도 불렀을 때, 앞에 붙은 독립이란 단어가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결국 만세의 의미에는 독립을 통해서 자유를 찾겠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불렀고,

 

흥미로운 것은 첫날부터 시위 양상이 똑같아요.

누가 지시한 것이냐 보면 천도교와 기독교가 224일 합의하면서 운동방식도 전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애국가가 마지막 구절이 우리나라 만세잖아요.

만세라는 말은 우리나라가 만 년 동안 영원하란 뜻이잖아요.

우리나라가 독립 선언했으니까 이 독립을 만년 동안 지키자 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애국가의 우리나라 만세와 대한 독립 만세와 똑같은 이야기거든요.

 

독립선언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독립축하의...저는 그렇게 봤거든요.

만세시위라고 하는 마른 다른 말로 하면 축하 행진이다.

, 다른 해석도 물론 가능하겠죠.

그래서 만세라는 개념 자체가 독립축하연이었다. 만세시위, 만세행진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보고 있었어요.

 

이번 3.1운동 100주년 기념식도 사실은 국가와 공동체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만세의 날...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 사실, 저로서는 굉장히 아쉽고 안타까운 점들이 매우 많아요.

어떤 일이 필요한 것인지, 우리 국민은 어떤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는지 말씀해주시죠.

 

필란드가 1917년에 독립해서 2017100주년 독립 100주년 행사할 때, 구호가 Together투게더였거든요.

말씀하신대로 어떤 국민통합, 국민참여에 대한 컨셉은 분명히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촉박하게 되면서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그래도 다행히 사회적으로 정부입장에서 보면 민간에서 굉장히 활발하게 3.1운동을 기념하고 있어요. 언론도 마찬가지고요.

3.1운동 기념을 하면서 100주년의 의미를 돌아보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국가주도형이 아니라 민간에서 스스로 100년을 돌아보면서 기념하는 이 사건이 나중에 기념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잘 정리하는 것이 오히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적 차원에서 하고 있는 일들을 국가가 정리를 잘해야 하고요, 말하자면 위원회가 하고 있는 일 중에 인증사업이란 것이 있는데, 함께 그 사업을 정리해서 백서에 담아 모든 100주년의 사업을 국가주도의 것만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국민이 만들어간 100년을 정리하겠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거든요. 아마 그 사업이 의미 있는 사업이 되지 않을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사업도 있지만 잘 정리해서 우리가 100주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를 다시 하나의 역사로 만드는 일이 중요한 일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바쁘신데 나와 주셔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자체의 역사적 의미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기념하는 것을 떠나서

기념사적의 역사적 의미를 해설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많이 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전우용의 사담,

오늘은 기미독립선언서 공약 3장의 첫 번째로

마지막 말을 대신하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한 민족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조하지 말라.

 

, 지금까지 전우용의 사담이었습니다.

다음 주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