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9)

Can We Live Only with Love without Darkness_ Ven. Pomnyun’s Dharma Q&A

Buddhastudy 2019. 10. 16. 20:05


Ven. Pomnyun's Answer to "Can We Live only with Love without Darkness? ”

Selection from a Dharma Q&A session at Busan City Hall, Busan (June 15, 2019)

 

And my question is, Mister, what do you think about Yin Yang philosophy as there is a day and night, there is love and hate, and the complete contrary is the utopia. What do you think is the possibility to live only or if there is a possibility to live only with love as according to Buddha’s teaching?

 

If we look at love or let’s say light is just non-presence of darkness, so if it’s possible actually, if in this world we can live only with love, except [for] the night. If there is a possibility that we can live without the dark side, let’s say.

Because I believe each person has their own dark side and we need this dark side to be here, to appreciate the good things that happen in our lives. So I would define the love as the bright side.

 

Thank you for answering. I really appreciate it. So I would just say that Majjhimāpaṭipadā, the middle way. It’s the coexistence, as you said, of all the religions, all types of religions they coexist, all Buddhist systems.

So I think as well the light and darkness as well the love and hate, as long as there is the middle way there is the coexistence. This is the most important thing. Thank you.

 

제목 : 어둠 없이 사랑만으로 살 수 있나요?//

 

사랑이라는 그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

뭘 해주고 싶다

이것이 사랑인가?

 

부처님은 이것을 욕망, 욕구라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반드시 미움이라고 하는 과보가 따르게 됩니다.

 

사랑이 그런 어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원하는 것, 이런 개념이 아니라면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의 입장에서 그럴 수도 있겠다 라고 이해하면

이것이 만약에 사랑이라고 한다면 사랑이란 아무런 부작용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미움이라는 것이 뒤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느냐가 먼저 정의되어야 합니다.

 

--

네네.

 

비유라는 것은 이해를 돕는데, 유용한 도구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비유는 어떤 사물을 잘못 인식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면,

 

한 남자가 여러 여자분과 같이 산다고 합시다.

이것을 합리화 하려면

저 자연의 동물들을 봐라. 수컷 하나가 여러 암컷과 살지 않느냐?”

 

그러면 그 예는 맞습니다.

그 예가 사람에게 적용되는 게 합당하냐 하는 거요.

 

만약에 여자가 여러 남자를 데리고 산다고 합시다.

그럼 저 여왕벌을 봐라이렇게 얘기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산다면

하늘에는 달이 하나, 태양이 하나밖에 없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목성이나 이런 데는 달이 여러 개 있는 세계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조금 위험할 때가 있습니다.

비유는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되는데, 그 비유를 이곳에 적용하는게 합당하냐 하는 문제가 검토 되어야 합니다.

 

자연의 상태에서 밝음과 어둠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어둠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우리 인간에게는 괴로움이 없을 수가 없다이렇게 하는 것은 그게 적절하게 연결시키는 게 맞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자연의 밝음과 어둠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보고 우리가 말하는 것이고요

우리가 괴롭고, 괴롭지 않고 하는 것은

심리적 현상입니다.

 

이것은 주관적인 문제입니다.

주관적인 문제를 객관적인 문제와 비교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종교가 때로는 이런 우를 많이 범합니다.

제가 하나 말씀 드려볼게요.

 

A라는 분은 신이 있다고 말합니다.

B라는 분은 신이 없다고 말합니다.

, 우리는 이 얘기를 듣고 누구 말이 맞을까를 생각합니다.

 

누구 말이 맞을까요?

A가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이거 밤새도록 토론해도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10년 아니라 천년을 해도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 접근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믿음의 문제이지 객관적 상황의 얘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의 문제, 주관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결론을 낼 수가 없습니다.

주관의 문제는 주관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신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신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두 사람의 믿음이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두 사람의 믿음이 다르구나이렇게 접근하면 되요.

그럼 여기 아무런 모순도 없습니다.

 

피부 빛깔이 다르듯이, 키가 다르듯이, 성격이 다르듯이, 생각이 다르듯이 믿음이 다를 수 있는 거예요.

믿음이 다르다고 우리가 갈등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왜 믿음이 다른 것이 갈등이 되느냐?

 

주관을 객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모순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대화를 하다보면 자기가 지금 약간 이런 혼란을 겪고 있는 거 같아요.

종교로서의 불교의 전통적으로는 이상세계에 대해서 3가지 다른 종류가 있습니다.

 

유토피아가 우리가 죽으면 가는, 여기가 아닌 저 멀리, 서방정토 극락세계라고 저 멀리 다른 세계에 있다. 이렇게 믿는 거요.

이것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토종이에요.

 

두 번째는 그 이상세계가 저곳이 아니라 여기에, 지금이 아니라 먼 미래에 이 세계가 정토가 된다.

전자는 다른 곳에 있다고 해서 타방정토라고 그러고

후자는 미래정토라고 그래요.

 

타방정토는 극락세계고, 미래정토는 미륵붓다.

저기는 아미타바, 여기는 마이뜨레야붓다 이렇게 말합니다.

 

세 번째는 정토가 저기 있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마음속에 있다.

 

그럼 어느 게 불교냐?

불교 안에 이 3가지가 다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종파가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러면 이렇게 갈라졌을까?

그것이 하나의 방식으로는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어느 것이 맞느냐? 이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다른 거예요.

 

어떤 것이 바르고, 맞고, 틀리느냐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 믿음이 서로 다르구나이렇게 접근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불교 안에서도 이렇게 다른데, 다른 종교는 더 다르겠죠.

아무리 많이 달라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사람 수만큼 다를 수가 있어요.

우리 얼굴이 사람 수만큼 다르잖아요.

그런데 사는데 아무 지장 없잖아요.

 

그래서 믿음이 달라도, 생각이 달라도,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문제는

다른 것을

현실이 다른데, 사실이 다른데, 같아야 된다고

잘못 생각하는데서 갈등이 생기는 거요.

 

다름을 인정하면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습니다.

, 더 질문하세요.

 

--

이렇게 다름을 서로 인정하고 이해하면

괴로울 일이 없어진다는 거요.

이것이 니르바나입니다.

 

화날 일도 없고

괴로울 일도 없고

미워할 일도 없고

미워하지 말아야지가 아니고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면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요.

 

만약에 일어난다면

내가 뭔가 집착하고 있다는 거요.

내가 옳다든지.

 

그러면 그것을 봐야 됩니다.

, 내가 고집하고 있구나

내가 집착하고 있구나

, 내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있구나

 

그러면 괴로움이나 미움이 생겼다가도 금방 사라지게 됩니다.

잠을 자면 악몽을 꾸다가도

잠을 깨면 사라지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