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1

[나탐 Natam] [실전] 깨닫는 법, 신이 되는 법 |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가상현실)임을 아는 방법 | 내 경험담 공유

Buddhastudy 2024. 7. 22. 19:16

 

 

 

대부분의 사람은 모르고

소수의 사람만이 아는 현실의 비밀이 있습니다.

바로 이 현실이

꿈의 세상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죠.

 

가상현실은 실제 같은 체험을 할 수 있게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를 말합니다.

이 현실이 바로 그러하죠.

 

이 현실은

여러분이 잘 때 꾸는 꿈보다

더 깊은 단계의 꿈입니다.

만약에 이 현실이 꿈인지 모른다면

꿈속에서 꿈을 꾸는 상태

즉 꿈속에서도 가장 깊은 꿈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진짜인데

꿈은 무슨 꿈이야?” 싶을 겁니다.

 

이 현실이 정말 꿈이라면

그렇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나의 참된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면

현실에 대한 이해는 저절로 생기게 됩니다.

현실이 꿈과 같다는 것은

더 이상 말이 안 되는 소리가 아닙니다.

점점 많은 사람이 꿈에서 깨어나고 있죠.

 

가까운 미래에는 많은 사람이

나 자신과 현실이 무엇인지를 저절로 깨닫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신이 되는 법>에 대해서 알아봤죠.

이번 영상은 신이 되는 법, 실전편입니다.

중요한 내용을 꽉꽉 담았어요.

 

--

우선 여러분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 현실이 무엇인지를 자각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알아보고

여러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 방법

즉 여러분은 곧 신이자 참나이자

깨달음으로 있음을 자각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볼 거예요.

 

제가 주로 이것을 자각하는 데 썼던 방법을 알려드릴 겁니다.

여러분의 그냥 평소 일상생활 속에서

이것을 자각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방법을 알려드릴 겁니다.

 

설명에 앞서 여러분의 본질이 되는 이것은

인식하지도 인식되지도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에 신, 참나, 전체의식 같은 고유명사를 붙이거나

이것은 어떠한 것이다라고 인식된 상태를 표현하면

이것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언어로 설명해야 하니까

저는 에고입장에서 인식하는 이것을

참나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경험, 체험, 상태, 자리(위치)’ 등의 표현을 쓰겠습니다.

(이것 자체는 인식하지 않기에 경험, 체험, 상태, 자리가 아님)

 

제 설명을 언어 그대로 듣지 마시고

느낌으로 들으시면 돼요.

 

 

--나의 본질을 자각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참나를 자각하는 사람이든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이든

참나로 있습니다.

 

참나를 자각하는 사람을 A,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을 B라고 한다면

AB 모두

이 현실이라는 꿈을 꾼다는 것은 같아요.

 

하지만 둘의 차이는 이러합니다.

A

나는 몸과 마음이 아니며

이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것을 아는 채로 꿈을 꿉니다.

꿈에서 깨어 있기 때문에 꿈을 꾼다고 할 수 없기는 해요.

 

반면에 B

몸과 마음이 나 자신이며

이 모든 것이 진짜라고 여긴 채 꿈을 꿉니다.

깊이 잠들어 있는 채로 현실이라는 꿈을 꾸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괴한에게 쫓기는 꿈을 꾼다고 해보겠습니다.

괴한은 내가 가진 것을 빼앗고 나를 해치려고 합니다.

괴한에게 쫓기는 와중에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것을 자각한 사람은

상황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뭐야? 그래봤자 고작 꿈이잖아하고

괴한이 다가오는 것을 그대로 맞서거나

괴한을 사라지게 하거나

괴한을 귀여운 강아지로 만들어서 함께 놀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꿈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괴한을 계속 무서워만 하다가

결국 괴한에게 당하는 내용을 맞이하게 됩니다.

 

영화로 비유를 하자면

AB나 좀비 영화를 본다는 것은 같습니다.

하지만 A는 주인공이 좀비에게 쫓기는 긴박한 장면에서

이 영화는 허상이라는 것을 알고

영화 속 주인공은 자신이 아님을 아는 채로 영화를 보죠.

 

반면 B는 주인공이 좀비에게 쫓기는 긴박한 장면이

실제 상황이라고 여기고

영화 속 주인공을 나라고 여긴 채, 영화를 봅니다.

B는 영화가 끝났는데도

영화 속 주인공에 빙의가 되어서

좀비에게 쫓기거나

물리게 될 것을 두려워하게 되죠.

 

우리가 잘 때 악몽을 꾸듯이

이 현실 꿈속에서도

많은 사람이 무서운 내용의 꿈을 꿉니다.

돈과 명예를 잃지는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지는 않을까

사람들에게 외면당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는 내용의 꿈을 꾸죠.

 

현실 꿈의 내용이

사람들에게 외면당해서 수치심을 느끼는 내용이라면

AB

주인공이 수치심을 느끼는 내용의 꿈을 꾸게 된다는 것은 같습니다.

 

하지만 A

그것이 한편의 꿈이자 영화임을 아는 채로 있는 것이고,

B

수치심이 진짜라 여기고

수치심을 느끼는 주인공을 자신과 동일시하여

수치스러운 캐릭터 그 자체로 살아가죠.

 

여러분이 나는 무엇인지를 깨닫는다면

현실에서 고통스러운 일을 마주하게 될 때

꿈속에서 꿈인 것을 알고 바라보듯이

깨어난 상태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나의 본질을 자각하지 않는 이상

몸과 마음은 내가 아니며

이 현실은 꿈과 같은 세상이라는 것을 절대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직접 경험하고 인식하기 전까지

절대 지식이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백날 남들한테 두리안의 맛에 대해서 설명을 듣거나

책과 영상으로

두리안은 이런 냄새가 나고, 이런 맛이 난다라는 정보를 접해도

내가 직접 두리안을 맛보기 전까지는

그 맛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두리안의 맛은 직접 먹어봐야 알 수 있잖아요.

이것도 여러분이 직접 경험을 해야만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직접 경험을 하느냐?

제가 두리안을 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두리안을 구하는 팁을 알려드릴게요.

 

참나를 자각하는 방법 4가지 알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하기

 

정말 단순하게도 여러분이

나는 무엇인가, 이 현실은 무엇인가를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 한다면

여러분은 그 답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사실 이 영상을 보고 계신 것만으로도 여러분은

나아와 현실에 대해서 탐구정신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마음은

아이의 마음과도 같은 순수한 호기심이겠지만

그만큼 한편으로는 마음이

오랜 시간 동안 괴로웠기 때문이기도 할 거예요.

 

저는 이 모든 것을 너무나도 궁금해 했습니다.

물론 저는 여전히 모르는 것도, 궁금한 것도 많아요.

궁금한 게 많았던 바탕에는

괴로움이 너무 컸었기 때문이긴 합니다.

악몽만 계속 꾸는 것처럼

내가 겪는 모든 일이 나에게는 아픔으로만 돌아오니까

상처를 치유하고자 끊임없이 마음을 들여다보고

왜 이런 현실이 펼쳐졌는지를 항상 의문을 갖고

이해하려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으로써 나라는 존재는 뭘까’ ‘이 현실은 뭘까를 항상 궁금해했어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실 거예요.

여러분이 이런 내용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도

여러분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잘 알고 있습니다.

 

괴로움은 나에 대한 무지에서 생겨납니다.

내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나 자신을 몸과 마음이라고 여기면

괴로움은 점점 커집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인정받지 못해 좌절하는 연기를 펼칠 때

그 주인공이 하는 행동, 말 생각, 감정을

내가 한다고 여기면 괴로워집니다.

 

하지만 참나를 인식하는 과정에 있어서

이렇게 자신이

드라마 속 주인공이라고 착각하는 단계는

반드시 필요 해요.

나에 대한 무지, 그리고 괴로움은

곧 나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됩니다.

그리고 나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은

곧 나를 알게 되는 체험이 됩니다.

 

우리가 자다가 너무 무서운 꿈을 꾸면

갑자기 확 깨어버릴 때가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이 현실 꿈에서도

맨날 되는 일도 없고, 돈도 없고, 관계에서는 상처만 주고받고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무서운 꿈의 내용만 반복적으로 꾸다 보면

나 자신과 현실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되면서

꿈에서 점점 깨어납니다.

 

물론 이 현실 꿈에서도

우리가 잘 때 꾸는 꿈처럼 확 깨면 좋겠지만

현실은 꿈속의 꿈속의 꿈속의 꿈이다 보니까

꿈의 단계가 너무 깊어진 관계로

한 번에 확 깨지는 않고

점차 점차 깨어납니다.

 

 

<꿈에서 깨어나는 과정>

<참나를 자각하게 되는 과정>을 잠깐 알아볼게요.

 

참나를 자각한다는 것은

나가 아닌 것이

나인 것을 인식하고

나가 무엇인지를 알고

나를 경험하는 것입니다.(나로 있는 것)

(이것 자체는 인식하지 않기에 경험이 아니지만, 표현을 그리할 뿐)

 

1) ‘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단계를 거칩니다.

내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드라마 속 주인공에 빙의가 되어서

현실에서 주구장창 때려맞는 무서운 꿈을 꿉니다.

 

2) 때려 맞다가 정신 차리고 의문을 갖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나 자신과 현실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혼란스러워요.

나는 무엇인지, 이 세상은 무엇인지,

내가 이미 죽었는지, 살았는지

이게 꿈 같기도 하고 진짜 같기도 하고

내가 이제 괴롭다 못해 미치기까지 한 건가?

이 모든 게 궁금하고 혼란스러운 과정을 거칩니다.

 

3) 나 자신이 무엇인지를 점점 인식하게 됩니다.

안개 속에 가려진 것을 보듯이

참나를 살짝 살짝 인식하게 돼요.

 

4) 어느 순간 안개가 걷히고 참나를 정확히 인식합니다.

참나 자각이 이루어지면

언제 어디서든 참나를 자각하고

꿈에서 꿈인 것을 알고 꿈을 바라보게 됩니다.

 

5) 꿈에서 완전히 깨어나면 아무 꿈도 꾸지 않게 됩니다.

정확히는 아무 꿈도 꾸지 않는다라고 할 수 없는 상태죠.

 

여러분, <월리를 찾아라> 아세요?

참나를 자각하는 과정은 월리를 찾아라랑 비슷해요.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는 <월리를 찾아라> 책을 갖고 있습니다.

누구나 신이자 참나이자 깨달음으로 있어요.

하지만 월리가 어디 있는지를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은

월리 책을 들고는 있지만 책을 보질 않으니까

월리의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반면에 월리가 어디 있는지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책을 들여다보죠.

물론 처음에는 월리가 한눈에 안 보입니다.

월리인가?’ 싶으면 월리가 아니고

엉뚱한 캐릭터를 가리키면서 월리인가?’ 하게 됩니다.

 

신을 찾겠다고 엉뚱한 데를 찾아다니는 거죠.

월리를 계속 궁금해하다 보면

그림 구석구석을 살펴보게 되면서

처음에는 애매하게만 보던 그림 전체를

점점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 이거다하고 월리를 발견하게 돼요.

월리를 알아본 사람은 월리 책을 펼 때마다

월리가 어디 있는지를 한눈에 알아보듯이

참나를 자각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 뭘 하든 상관없이 참나를 자각합니다.

 

참나에 대한 인식이 점점 뚜렷해질수록

나와 너의 경계가 없이

개체와 개체의 경계가 없이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나이자 통째로 하나인 것을 경험하게 돼요.

사랑 그 자체로 있게 되는 거죠.

 

물론 이것은 절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월리를 발견했다고 갑자기 그렇게 되는 것이 절대 아니에요.

여러분은 지금도 매 순간

사랑이자 깨달음의 자리에서

너와 나의 경계가 없는 세상을 경험하고 있어요.

 

월리를 찾았든, 못 찾았든

여러분 손에는 언제나 월리 책이 들려 있습니다.

내가 월리 책을 갖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체험

내가 이미 깨달음에 자리해 있음을 알지 못하는 체험

나는 깨닫지 못했다, 모른다, 그래서 알고 싶다라고 느끼는 체험이야말로

여러분은 언제나 지금

참나이자 깨달음의 자리에 있음을 알게 합니다.

 

모른다는 마음은 안다는 체험이 되고

안다는 마음은 모른다는 체험이 됩니다.

이 현실에서는 한쪽에 대한 체험은

상대적인 체험이 있어야 가능해지죠.

즉 알고 싶다면 모르겠다 하면 되겠죠.

 

월리를 발견하게 된다면

즉 참나를 자각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나 다 깨달았네하고 졸업하게 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참나를 정말 알아본 사람은

오히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가 되면서

그때부터 진정한 나 탐구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 이거 알았다고 하는 순간

모르는 것이 잔뜩 생기면서

그전보다 더 많은 궁금증이 생길 거예요.

 

아이가 세상의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갖고 궁금해하듯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그저 순수하게 궁금해하고 궁금해하세요.

 

여러분이 제 영상을 통해서

더 모르겠고 더 갈증만 생긴다면

제 영상의 목적은 이룬 것입니다.

 

여러분이 할 것은 나는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에 따른 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열린 결말로 두세요.

 

답을 찾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본래 알고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답은 여러분 안에서 저절로 찾아집니다.

 

 

 

-두 번째) 마음이 편안할 때 관찰자 모드를 켜기

 

여러분은 항상 참나로 있기에

참나는 언제 어디서나 자각할 수 있는 것이지만

월리가 어디 있는지 아무 감도 안 잡힌다면

우선 마음의 저항이 없고 편안한 것을 할 때 참나를 자각해 보도록 합니다.

 

일상에서 무엇을 하든 간에

하기 전, 하는 동안, 하고 나서

마음의 저항이 없는 것이면 돼요.

 

예를 들어서

내가 산책을 하고 싶어서

거부감 없이 자발적으로 산책을 하고

산책하는 동안도 마음이 편안하고

산책하고 나서도

편안하거나 에너지가 채워지는 느낌이 들거나 잔잔한 기쁨이 있다면

산책할 때 관찰자 모드를 켜는 겁니다.

 

반면에 내가 어떤 것을 하는데

하기 전부터 하기 싫고 귀찮고 걱정되고

하는 동안도 마음이 긴장되고 불편하고

하고 나서도 기분이 다운되고 찝찝하고 에너지가 뺏긴 느낌이 든다면

저항이 있는 거죠.

 

예를 들어서

내가 직장에서 A업무보다는 B업무를 할 때 마음이 편안하구나.”

, 내가 이 사람과 대화를 할 때 마음이 편안하구나.”

내가 나무를 쳐다볼 때, 강아지 영상을 찾아볼 때, 영화를 볼 때, 게임을 할 때, 샤워를 할 때, 노래할 때, 춤출 때, 악기 연주할 때, 그림을 그릴 때, 글을 쓸 때

마음에 저항이 없고 편안하구나

알아차립니다.

 

내가 무엇에 저항이 없는지를 알아차린다면

그것을 하게 될 때

관찰자 모드를 켜서 참나 자리를 자각합니다.

(관찰자는 눈이 아니지만 눈으로 표현)

 

그럼 대체 무엇을 자각하려는 것이야?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물을 꿀꺽꿀꺽 마신다고 봐요.

여러분이 물을 마시는 순간을 자세히 관찰하면

물과 물을 마시는 나의 경계가 사라져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물을 마시다 보면 어느새

내가 물을 마신다’. ‘이것은 물이다’.

내 손에 컵이 들려 있다’. ‘물이 목으로 넘어간다는 인식이

완전히 사라져 있는 순간이 있어요.

컵을 들고 물을 마시는 몸을 가진 나라는 주체자 개체와

컵에 담긴 물’, ‘목으로 넘어가는 물이라는 대상 개체가

사라져 있는 순간이 있어요.

그 순간에 있게 되는 자리가 참나 자리입니다.

 

지금 제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분들은

반복적인 관찰이 중요합니다.

 

매일 물을 마실 때마다

물을 마시는 순간을 관찰하는 거예요.

당연히 처음에는 월리가 잘 안 보여요.

하지만 계속 보다 보면

, 여기 있다하고 보입니다.

 

샤워할 때 편안하다면 샤워하는 순간을 매번 관찰합니다.

샤워를 하고 있다 보면

내가 샤워를 한다’. ‘따뜻한 물이 몸에 닿는다라는 인식이

사라져 있는 순간이 있어요.

물의 느낌을 느끼고는 있지만

내가 무엇을 한다, 내가 무엇을 느낀다 는 인식이 없이

하고 있고, 느끼고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에는 내 몸이라는 개체와

따뜻한 물이라는 개체의 경계가 없어요.

그 순간에 있는 것을 캐치하는 겁니다.

(이것 자체는 있다고 인식할 수 없음)

 

새 소리를 들을 때 편안하다.

그러면 새 소리를 듣는 순간을 관찰합니다.

새 소리가 들리는 순간을 관찰해 보면

내가 새소리를 듣는다.

새가 소리를 낸다는 인식을 하지 않고 듣고 있어요.

그 순간에는 새 소리를 듣는 인간인 나와

소리를 내는 새의 경계가 없습니다.

 

내가 새소리이고 새소리가 나로 있어요.

나는 곧 새이자, 새 소리이자, 새 소리를 듣는 자로 있습니다.

같은 말로 나는

새도, 새 소리도, 새 소리를 듣는 자도 아니죠.

 

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

와 별이다라고 인식하죠.

와 별이다라는 인식이 일어나기 바로 전을 관찰해 보면

이 눈을 가진 인간인 내가 별을 본다’.

저것은 별이다라는 인식이 없는 채로

별을 보고 있는 순간이 있어요.

그 순간엔 내가 별이 되고 별이 내가 됩니다.

 

별을 보는 나라는 개체와 저 별이라는 개체는 존재하지 않고

하나가 통째로 아무 경계도 없이

비어 있는 그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를 발견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귀여운 강아지를 보게 된다면

, 귀여워하기 바로 전에

나는 인간이고 너는 강아지야라는 인식 없이

그저 투명하게 텅 빈 상태로 보고 있는 순간이 있어요.

그 순간은 인간인 나강아지는 너의 경계가 없이 하나로 있습니다.

강아지가 곧 나고, 내가 곧 강아지죠.

(=나는 인간도 강아지도 아니다)

 

어떤 가수가 사람들 마음을 울리는 노래를 한다고 해볼게요.

그 가수가 관객 앞에서 노래할 때를 잘 관찰해 보면

거기에는 노래를 하는 주체가 없습니다.

가수는 노래를 할 때

내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한다는 인식 없이 노래를 합니다.

관객도 내가 이 노래를 듣는다’ ‘너는 노래를 한다는 인식 없이

그저 듣고 있습니다.

노래를 하는 가수나 노래를 듣는 관객이

너와 나의 경계가 없이

아무 판단도 분별도 없이

텅 비어 있는 자리에서 노래를 경험합니다.

그런 무대를 보여준 가수에게는 기립박수가 쏟아집니다.

 

저는 월리를 찾아서를 주로 운동할 때 했습니다.

저에게 운동은 마음의 저항이 없는 것이고

일상적으로 하는 것이다 보니

참나를 반복적으로 관찰하는 데 아주 유용했어요.

 

저는 무게를 들어 올리는 순간을 매번 관찰했습니다.

제 정신은 호흡과 바벨과 몸에 집중합니다.

근데 바벨을 들어 올리는 그 순간을 잘 지켜보면

모든 게 사라져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내 아바타는 바벨을 들어내는 동안

분명 호흡을 하고

무게를 후덜덜덜 하면서 들고

근육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낍니다.

 

근데 그 순간을 자세히 살펴보면

호흡하는 나, 앞을 보는 나, 음악을 듣는 나, 무거움을 느끼는 나

보이는 것, 음악 소리, 무거운 바벨은 통째로 사라져 있습니다.

 

오해하시면 안 될 것은

바벨을 들어올리는데

무슨 기절하듯이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아무것도 안 보였다는 말이 아니고요.

내 몸은 분명 호흡하고, 앞을 보고, 소리도 듣고,

낑낑 움직이면서 무거운 느낌을 생생하게 느낀단 말이죠.

근데 그러고 있는 나를 관찰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이걸 하는 나, 보는 나, 듣는 나, 무게를 느끼는 나, 근육의 고통을 느끼는 나가 사라져 있는 자리에 있게 됩니다.

 

거기에는 내 몸과 헬스장과 음악과 바벨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게 통째로 비어 있을 뿐

그것을 체험하는 개체는 없는 겁니다.

 

 

-세 번째) 매 순간 관찰자 모두를 켜기

 

여러분이 월리 찾기에 대한 감이 좀 잡힌다면

좋아하는 것을 할 때뿐만 아니라

일상의 매 순간에서 아바타를 관찰해 보려고 합니다.

 

물을 마실 때, 화장실 갈 때, 밥 먹을 때, 커피 마실 때, 화장할 때,

걸을 때, 생각할 때, 운전할 때, 청소할 때, 말할 때, 요리할 때, 담배 피울 때, 일을 할 때

매 순간을 관찰합니다.

관찰할 때

이걸 누가 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누구인가?”

지금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 질문을 하란 말이죠.

 

기침을 켁켁켁 하는 순간

기침을 하는 내가 사라져 있는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를 알아보는 겁니다.

내가 곧 기침이고 기침이 곧 나란 말이죠.

 

길을 걸으면서

지금 누가 걷고 있는가?” 관찰합니다.

어느 순간에 내가 걷는다’, ‘내 몸’, ‘내 다리라는 인식이 사라지면서

걷는 주체가 사라져 있는 순간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밥을 먹으면서

지금 누가 밥을 먹는가? 밥을 먹는 나를 관찰해요.

밥을 먹고 있다 보면

어느새 내가 밥을 먹는다는 인식이 사라지면서

밥을 먹는 몸을 가진 나와

음식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자리에 있게 됩니다.

 

음식의 맛을 맛있다고 느낀단 말이죠.

근데 맛이 느껴진다는 인식 없이

맛을 느끼고 있는 순간이 있어요.

거기엔 맛과 맛을 느끼는 자아의 경계가 없습니다.

 

나는 곧 음식이자 맛이자 맛보는 자입니다.

같은 말로 나는 곧 음식도 맛도 맛보는 자도 아니죠.

주말에 어디 놀러 갈까?’ 생각이 일어납니다.

지금 누가 생각하는가?’ 생각하는 나를 관찰합니다.

 

생각을 곰곰이 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내가 생각을 한다는 인식이 사라지면서

생각하는 나가 사라져 있는 자리에 있게 됩니다.

거기에는 주말에 놀러 갈 생각이 떠올라 있지만

생각하는 자아와 생각은 존재하지 않아요.

 

친구와 수다를 떨면서

지금 누가 말을 하는가?” 말하는 나를 관찰합니다.

내가 친구한테 어쩌고저쩌고 하고 있는 그 순간

내가 말을 한다는 인식이 사라지면서

말하는 나와 듣는 나가 존재하지 않는 자리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말하는 나라는 개체와 듣는 너라는 개체의 경계가 없이

통으로 전체가 비어 있어요.

 

 

네 번째) 마음이 불편할 때 관찰자 모드를 켜기.

 

만약에 여러분이 마음이 편안한 상태로 있을 때만 참나이고

몸이나 마음이 불편한 상태로 있을 때는 참나가 아니다라고 알고 있다면

오산입니다.

 

아바타가 기뻐하든, 슬퍼하든

숨을 쉬는 경험이 언제나 일어나 있듯이

여러분 아바타가 어떤 생각, 감정을 하든, 어떤 경험을 하든 상관이 없이

여러분은 언제나 신이자 참나이자 깨달음의 자리에서 세상을 봅니다.

 

상처받는 아바타, 상처 주는 아바타,

수치스러워하는 아바타, 외로워하는 아바타 등등

고통스러운 생각, 감정을 느끼는 아바타 역시도

물을 마시는 아바타, 운동하는 아바타, 강아지를 쳐다보는 아바타와 같이

여러 현상 중 하나일 뿐입니다.

 

마음이 불편할 때 역시도

누구인가?’

누가 감정을 느끼는가?’ 똑같이 적용하세요.

 

여러분 아바타가 두려운 행동, , 생각, 감정을 하게 될 때

있게 되는 자리도

여러분 아바타가 물을 마실 때 있게 되는 자리랑 똑같아요.

물을 마실 때

물과 물을 마시는 나의 경계가 없는 자리에 있게 되죠.

 

마찬가지로 여러분 아바타가

감정적 고통을 느끼게 되는 순간을 자세히 관찰하면

감정적 고통이란 개체와

감정적 고통을 느끼는 나란 개체의 경계가 없는 자리에 있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상대방이랑 말다툼을 하다가 화를 냅니다.

그러면 누가 화를 내는가?”

화를 내는 나를 관찰합니다.

화를 내는 순간을 자세히 관찰하면

분명 화를 내고는 있지만

내가 화를 낸다는 인식이 사라지면서

화를 내는 나라는 개체와 화를 일으킨 대상이라는 개체가

사라져 있는 순간이 있어요.

화를 내고 있는 장면이 펼쳐져 있지만

그것을 아무 인식도 하지 않은 채, 텅 비어 있는 채

경험하고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를 알아보는 겁니다.

 

속상해서 울게 된다면

누가 우는가?’ 관찰하세요.

울 때 자세히 보면 울고 있지만

내가 운다는 인식이 사라진 채 울고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거기에 우는 나라는 개체와 나를 울게 한 대상개체는 존재하지 않아요.

우는 경험을 하지만

그 경험이 통째로 비어있는 채

일어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겁니다.

 

무시당해서 수치심이 확 올라온다면

수치심을 느끼는 나를 관찰합니다.

그 순간을 보면

분명 수치심을 고통스럽게 느끼고 수치심이 일어나 있어요.

하지만 어느새

내가 수치심을 느낀다’, ‘나라는 인간이 이 고통을 느낀다는 인식이 없이

그거를 느끼고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에는 수치심을 느끼는 나라는 개체와

나에게 수치심을 준 너라는 개체는 존재하지 않아요.

수치심을 느끼지만

거기에는 그거를 실제로 느끼고 체험하는 주체가 없는 겁니다.

 

몸에 통증이 있어서 아프다면

누가 통증을 느끼는가?’ 하고

아픔을 느끼는 나를 관찰합니다.

통증을 느끼지만 내가 통증을 느낀다는 인식 없이

통증을 느끼고 있는 순간이 있어요.

그 순간에는 통증을 느끼는 나와 통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통증은 인식하기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는 몸이고 너는 통증이다.

내가 통증을 느낀다고 인식하는 순간

통증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죠.

 

통증을 느끼는 나를 관찰하면서

통증을 인식하지 않으니까

통증이 사라져 버리는 그 순간, 그 찰나가 있음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마음적 고통이나 육체적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순간에도

여러분은 참나 자리에서 세상을 경험합니다.

고통을 느끼는 순간을 잘 들여다보고 있으면

거기에는 고통을 느끼는 행위(주체)

고통(행위 대상)’이라는 대상이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현실에서는

내가 주체가 되어서 하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느껴지고 일어나 있지만

이것은 무엇이다’, ‘내가 무엇을 한다는 인식이 사라진 순간

거기에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식이 사라짐에 따라서

나라는 아바타 개체와 현실은 사라집니다.

사라지는 것을 나라고 할 수 있나요?

사라지는 이 현실을 진짜라고 할 수 있나요?

 

모든 것이 비어 있고 사라져 있는 자리에

아주 분명하게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존재한다,

내가 존재함만이 있습니다.

 

사실 이것 자체는 나는 존재한다라고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참나를 인식하게 될수록

개체의 나개체의 너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세상을 나와 너의 분리 없이

전체를 하나로 보면서

사랑 그 자체를 경험합니다.

 

이 어디에도 현실을 인식하고 체험하는 나라는 주체가 존재하지 않고

그렇기에 현실은 존재하지 않음을

말 그대로 이 모든 게 꿈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아기가 아무런 판단 없이 세상을 바라보듯이

아무런 필터 없이 세상을 그저 투명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여러분의 본래의 자리입니다.

 

시청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럼, 다음에 만나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