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의 가르침은 상식이라기보다는 사실에 가깝습니다 [01:15]. 우리가 사실을 알 때는 상식이 사실이 되지만, 사실을 모르는 상식은 다수의 허위식일 수 있습니다 [01:23].
- 대부분 스님이 하는 이야기는 상식적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문제는 그 상식적인 것이 실제로 행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01:35], [01:49].
- 부처님의 가르침이 일상적인 상식과는 다른 특별한 비밀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01:56].
- 우리 상식과는 다른 예로, 세상이 개별 존재의 집합(삼남만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연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02:00], [02:12]. 연기법이나 중도와 같은 개념은 일상적인 상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03:39], [03:57].
- 연기를 쉽게 이해하는 비유로는 손가락 다섯 개가 연결된 것처럼, 그물처럼 모든 존재가 연관된 것, 자연의 원자들이 DNA로 조립되는 것 등이 있습니다 [04:02], [04:13], [04:21], [04:30].
- 그러나 더 심오한 연기의 개념인 중중첩연기나 무진연기는 구슬 100개가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지만, 그 구슬 하나하나에 전체 100개의 의미가 다 들어 있다는 '일즉일체'의 개념으로, 3차원에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04:48], [05:03], [05:15], [05:29].
- 일상의 범위에서는 상식이 곧 사실이지만, 상식적이지 못할 때 고통이 따르는 이유는 사실에 입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07:11], [07:24].
- 미시 세계, 거시 우주, 원자 속, 4차원 등에서는 우리의 상식이 성립하지 않으며,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이러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07:24], [00:7:38].
- 일상생활의 이야기는 대부분 상식적이며,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가 아니거나 허위식인 것은 아닙니다 [07:50], [07:57].
- 진리라는 이름으로 허황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지만, 증명 가능한 과학적 법칙들은 우리의 경험과 다르더라도 현실에서 성립합니다 [08:07], [08:13].
- 부처님의 가르침은 상식이 아닌 사실이며, 일상생활에 적용될 때는 대부분 상식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의 일상생활이 비교적 사실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08:38], [08:52].
- 고통은 사실을 알지 못할 때 생기며, 모르는 사람, 장소, 일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지 때문입니다 [08:52], [09:04], [09:15], [09:23]. 명확히 알게 되면 괴로움은 사라집니다 [09:38].
- 즉문즉설의 내용은 대부분 우리 생활과 관련된 상식적인 이야기가 많다고 언급했습니다 [09:50].
이후에는 절에서 거짓말로 밥을 얻어먹은 경험에 대한 질문과 계율이 장소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10:07]. 스님은 상황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지만, 절에서 거짓말한 것이 식당에서 거짓말한 것보다 더 큰 죄라고 할 수는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11:25], [11:48], [12:00], [12:21].
스님이 쓰신 책 중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표현할 때
굉장히 상식적인 이야기 아닌가? 이성적인 이야기고.
부처님의 가르침 혹은 어떤 이치라고 하는 것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대다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의 이치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상식이라기보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사실을 알 때도 있고, 사실을 모를 때도 있습니다.
사실을 알 때는
상식이 사실이 되는 거고
우리가 사실을 모르는 상식은 다수의 허의식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 상당 부분은 스님이 얘기하거나 하면 여러분들이
“그 상식적이잖아요”
맞아요.
근데 문제는 상식적인 게 행해지지 않는다는 데 있어요.
부처님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을 떠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떠나서
별도의 무슨 비밀이 있다, 이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아주 작은 영역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들의 상식은
이 세상은 개별 존재의 집합이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용어가 ‘삼라만상’이다 이렇게 부르는데
사실은 연기되어 있다
이런 거는 상식적이지가 않습니다.
상식적인 건 여러분들이 이해가 팍 금방 다가오는데
상식적이지 않을 때는
“아, 어렵다” 이렇게 하는 거는
내 상식으로 그게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고요.
그다음에 우리가 만약에 내가 이렇게 오래 앉아 있으니까 다리가 아프다
그러면 우리들의 행위 양식을 관찰해 보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다리를 펴든지, 하나는 참든지.
대다수는 뭐 큰 제약이 없으면 팹니다.
그런데 어떤 규칙이 주어지거나 어떤 이익이 주어지면
이걸 안 펴고 참아야 되잖아요.
우리가 화가 나도 그래요.
화가 나면 화를 내든지
엄마가 화가 나면
애한테는 그 대부분 다 그냥 냅니다.
참을 이유가 별로 없어.
근데 남한테는 참아야 돼요.
왜냐하면 내면 바로 반발이 들어오니까.
그래서 참는 경우가 있단 말이예요.
그럼 우리는 두 가지
참았다가 냈다가
참았다가 냈다가 이게 상식이야.
그런데 중도라는 것은
참지도 않고 내지도 않는다.
이런 건 상식이 아니에요.
“참지도 않고 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이렇게 이해가 금방 안 되잖아요.
다만 알아차린다
이런 건 좀 상식적이지 않죠.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연기법이라든지 중도라든지
이런 거는 우리의 일상 상식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거예요.
특히 연기법 중에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연기를 이해하려면
‘아 손가락 다섯 개처럼 이렇게 연결돼 있다’
이런 거는 이해가 쉬워요.
제가 비유를 들면.
‘그물처럼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런 것도 이해가 쉬워요.
그다음에 ‘자연에 있는 원소들이
식물을 구성할 때 DNA에 의해서 이렇게 조립이 되고
그래서 이게 나갔다가 들어오고 나갔다가 들어오고’
이것도 조금만 공부하면 이해가 돼요.
근데 연기 중에도
중중첩첩 연기, 무진 연기
이렇게 부르는 게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구슬 100개가 서로 꿰어져 있어.
그러면 100개가 모여서 그물 하나가 됐다, 이 말이야.
그런데 그 구슬 하나를 보면
그 하나 속에 100개가 다 들어 있다는 거예요.
하나하나가 100개가 모여서 그물이 되고
그 하나 속에
다시 이 전체가 다 들어 있다는 거예요.
이게 일즉일체예요.
하나가 곧 전체고 전체가 곧 하나다.
이런 연기는
3차원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이 차원에서는
그럼 이거는 상식적이지가 않는 거죠.
이해가 안 되잖아요.
그럴 때는 사실은 상식을 초월해 있는 거예요.
대다수는 사실이 곧 상식이에요.
우리가 전부 다 허의식을 갖고 살 수는 없잖아요.
세상을 살아가는데.
그래서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냐 하면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하나밖에 그을 수가 없다’, 이러면
이것은 평면에서에요.
이건 평면에서는 증명할 필요가 없어요.
딱 보면 알아.
이걸 갖다 곡리라 그래, 곡리.
그런데 구면에 들어가면 어떠냐?
지구의 구면에서
북극하고 남극 사이를 지구 표면을 따라서 최단 거리를 걷는다.
몇 개 그을 수 있을까?
무수히 그을 수 있다.
즉 휘어졌다 하면 이거는 앞에 상식이 성립하지 않는 거예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다.’
이건 평면에서 성립하는 법칙이에요.
이게 만약에 이렇게 휘어진 데 그리거나
거꾸로 이렇게 휘어진 데 그리면
180도 넘거나 모자라거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것도 성립하지 않는 거예요.
사실은 우리의 일상의 범위에서는
상식이 곧 사실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상식적이지 못하면 고통이 따르는 거예요.
즉 그거는 상식적이지 않기 때문에가 아니라
사실에 입각하지 않기 때문에.
근데 약간 미시 세계로 들어가거나
약간 거시 세계로
우주로 가버리거나
원자 속으로 들어가거나
4차원에 해당이 되거나 하면
우리의 상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 거를 부처님이 얘기했을 때는 어때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이런 경우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한 얘기는
대다수가 다 상식적인 얘기예요.
내가 이해 못한다고 해서
그거는 상식적이지 않는 건 다 진리가 아니다. 허의식이다.
이런 뜻은 아니에요.
그런데 허황한 얘기
진리라는 이름의 허황한 얘기가 있어요.
그거는 증명할 수 없는 거예요.
지금 말한 대로
-이런 비유클리드 계약이라든지
-허수라든지
이런 건 다 수학에서 사용되지 않습니까?
-뉴턴의 법칙이라든지
-쿨롱의 법칙이라든지
이런 건 다 경험적으로는 모르지만은
현실에서는 다 성립하는 거란 말이에요.
붓다의 가르침은 상식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생활에 적용될 때는
대부분 상식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그 이유는
우리의 일상생활은 비교적 사실에 접근해 있기 때문에.
그러면 이제 우리의 고통은 언제 생기느냐?
사실을 알지 못할 때 고통이 생긴다는 거예요.
고통이 생기는 이유가.
-아는 사람을 만날 때보다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 약간 불안하다.
-아는 일을 할 때보다 모르는 일을 할 때 약간 불안하다.
-아는 곳에 갈 때보다는 모르는 곳에 갈 때 약간 불안하다.
그럼 불안이
모르는 사람 만났다, 모르는 장소다. 모르는 일 때문에 있는 게 아니라
공통점은
모르기 때문에
모르면 불안해지는 거예요.
무지가 괴로움의 원인이다.
확연히 알아버리면 괴로움은 사라져 버린다
이런 얘기예요.
이건 자기가 경험해 보면 다 체험할 수가 있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즉문즉설은 대부분 우리 생활적인 얘기잖아.
그러다 보니까 아주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도
“상식적이네” 이렇게 느낄 확률이 높다, 이런 얘기예요.
...
당연히 차이가 있을 수 있죠.
예를 든다면
내가 내 부인의 가슴을 만진 거 하고
남의 여자 가슴을 만진 거는
만진 건 똑같은데 엄청난 차이가 있지.
그런 것처럼
어떤 일이 상황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지죠.
여기서 행했느냐, 저기서 행했느냐에 따라서
그건 그렇다 이거야.
그건 달라질 수 있다.
상황에 따라서.
그러나 밥 한 그릇 얻어먹기 위해서
식당에 가서 거짓말하고, 절에 가서 거짓말하고, 친구한테 거짓말했다 하면
식당에 가서 거짓말한 게 조금 더 크죠.
그건 영업에 방해를 했기 때문에.
그런데 절에 가서 거짓말한 건
어차피 밥을 공짜로 주는 거니까
제가 볼 때는 그거는
종교라는 울타리 때문에 내가 선입관이 약간 위축이 되는 것뿐이지
거짓말이 ‘절에서 거짓말하면 죄가 더 크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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