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초에 사랑하는 반려견을 하늘로 떠나보냈습니다.
특히 어머니는 자식을 잃은 것과 같은 슬픔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셨습니다.
한 사찰의 지장전에 반려견 영가등도 달아주고 천도재도 지냈습니다.
저는 읽기만 해도 공덕이 된다고 알고 있는 금강경을 독경하고 있습니다.
축생에게도 부처님의 경전을 들려주면 좋다는 말을 듣고
금강경을 독송하기도 했었고
제가 없을 때는 어머니께서 우리말 금강경을 하루 종일 틀어놓으시며
반려견에게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지금도 어머니는 반려견 묻은 곳을 찾아가실 때마다 금강경을 틀어주십니다.
예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
어떤 개구리가 우연히 부처님 법문을 듣고 너무 좋아하다가 그만 밟혀 죽었는데
죽자마자 하늘 세계에 태어났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희는 반려견이 더 이상 축생의 과보를 받지 않고
하늘 세계에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지금은 어디에 있을지 너무나 궁금하고 많이 그립습니다.
살아생전에 금강경을 많이 들었던 우리 강아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 질문자의 얘기를 들으면서 종교의 발생과 믿음에 대해
근본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헤어지는 것이 너무나 아쉽지요.
부모와의 이별도 너무 아쉽지만
부모보다 더 안타까운 것이 자식과의 이별입니다.
부부의 이별도 마찬가지이고, 친구 역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사람이 죽으면 좋은 곳으로 간다’ 하는 말로 위로를 삼았습니다.
죽으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영혼이 있어서 하늘나라와 같은 좋은 곳으로 간다고 믿으니까
위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인도에서는 그곳을 천상이라고 불렀고,
기독교에서는 천국이라고 불렀고,
불교에서는 극락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 밑에 용궁이라는 좋은 세계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죽어서 좋은 곳에 가 있어도 실제로 내가 보지는 못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죽어서 저 멀리 가는 것보다는
다시 내 가까이에서 자식으로 태어나거나 친구로 태어난다면
이것이 훨씬 더 위안이 될 수 있잖아요.
또 가난한 사람은 부자로 태어나고
장애를 가진 사람은 장애없이 태어나고
신분이 낮은 사람은 신분이 높은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보시를 했더니
다음 생에 아주 큰 부잣집에 태어나거나 왕자로 태어난다는 이야기들이 나온 겁니다.
경주 불국사 창건 설화에도
가난한 사람이 보시를 한 공덕으로
재상집에 태어나서 재상이 되어
생전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생전에 너무 가깝게 지냈던 집착에 따르는
아쉬움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옛날에는 소나 말과 같은 동물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만 그렇게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요즘에는 애완용으로 기르는
고양이나 개와 너무 가까이 지내다 보니
그 집착의 정도가 자식에 대한 집착 이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호칭을 부를 때도 강아지 이름을 붙여서
‘아무개 엄마’라고 부를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름도 애완견이 아닌 반려견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아내나 남편을 반려자라고 하는데
그 정도로 위상을 승격시켰습니다.
이렇게 가까이 지내던 동물이 죽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아쉬움으로
‘강아지도 극락에 간다’, ‘강아지도 환생을 한다’ 하는 믿음을 갖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죽은 강아지를 위해서 49재를 지내는 경우도 많아졌고요.
반려견의 유골함을 만들거나 그 유골을 묻거나 뿌려주면서
사람과 똑같이 장례식을 하죠.
이렇게 된 이유는 강아지와의 관계가
사람 사이의 관계와 같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는 사람과 똑같이 대우를 하면서
다른 동물인 소나 말이나 돼지에게는 왜 안 그럴까요?
왜 다른 동물은 잡아먹어도 된다고 생각하고, 개는 안 된다고 생각할까요?
그 이유는
자기가 좋아하고 집착하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하고
나머지는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개는 오랫동안 사람들과 가까이 지냈고
더군다나 유목 생활을 많이 했던 서양 사람들은 사냥개와 가까이 지냈고
특히 미국에 이민 온 사람들은
개가 자신을 지켜주는 동료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개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습니다.
요즘은 주로 애완견이나 반려견으로 개를 많이 키우다 보니
질문자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분들이 더욱 많아진 것 같아요.
앞으로는 작은 곤충이나 식물이라도 너무 아끼다가 죽으면
이런 감정을 느끼는 문제가 생길 수 있을 겁니다.
슬픈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집착과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착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애정을 버리라고는 할 수는 없겠지요.
이에 대한 치료법은
애정을 지닌 사람에게 애정을 버리라고 말하기보다는
‘좋은 곳에 갔다’ 또는 ‘다시 태어난다’ 하는 믿음을 갖도록 해서
위로를 해주는 것입니다.
‘죽으면 끝이야! 아무것도 없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종교의 역할은 위로를 해주는 거예요.
슬픔을 덜 수 있도록
‘좋은 곳에 태어난다’, ‘좋은 곳에 환생한다’ 이렇게 말해 줌으로써
아쉬움, 근심, 걱정을 덜어주는 것이 종교의 역할입니다.
종교에 따라
천국에 갔다’, ‘극락에 갔다’, ‘용궁에 갔다’, ‘환생했다’ 등
여러 가지가 믿음이 있지만,
인도나 티베트 같은 곳에서는 주로 환생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인 금강경의 핵심은
제법이 공한 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집착할 바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만약 질문자가
‘금강경을 독송하면 강아지가 극락에 간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질문자는 금강경이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 거예요.
금강경의 핵심 구절이 이렇습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이 구절의 뜻은 이렇습니다.
무릇 상을 지은 것은 다 허망하다.
모든 상에 실체가 없는 줄 알면 그것이 곧 부처를 보는 것이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집착할 바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입니다.
금강경이 가르치는 내용은
형상을 지은 것은 다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한 줌의 재로 돌아가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아쉬움이 없어야
금강경의 가르침을 체득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금강경을 독송하라고 하는 이유는
죽은 사람에 대한 집착을 놓기 위해서입니다.
질문자가 ‘금강경을 많이 독송했으니 좋은 곳에 갔겠지요?’ 이렇게 물었는데,
만약 제가 ‘그래, 좋은 곳에 갔다’ 하고 대답한다면
이것은 종교적인 위로입니다.
그러나 즉문즉설은 진리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금강경의 가르침을 이해해서
‘내가 강아지에 대해 너무 집착했구나’ 이렇게 자각하고
집착을 내려놓는 일이 천도입니다.
개가 좋은 곳에 갔다고 믿는 것이 천도가 아니라
내가 개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 천도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아쉬움이 남아서 늘 울고 있으면
천도가 안 된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극락이든 천국이든 좋은 곳에 갔겠지. 안녕히 가세요’ 하고
집착을 내려놓으면, 그것이 천도입니다.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면 모든 영가가 천도된다는 말은
금강경의 본래 가르침을 체득하면
모든 영가가 천도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고뇌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집착을 놓지 못하는 사람에게
좋은 곳에 갔다는 믿음을 통해서 위로하는 길이 있어요.
이것을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슬픈 감정에 빠진 사람에게는 위로가 필요해요.
그렇다고 그 말이 진짜 사실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을 혹세무민 하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어요,
‘환생한다’, ‘천국에 간다’ 이런 것은 믿음이에요.
그렇게 믿는 사람을 보고 이러니 저러니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믿음으로서 위로를 얻어 고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둘째, 붓다의 가르침인 깨우침을 통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까운 존재의 죽음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생깁니다.
그 아쉬움으로 인해서
영혼설이 나오고, 내생설이 나오고, 환생설이 나오고, 온갖 것이 다 나온 거예요.
인간의 문화는 지난 1만 년 동안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형성되어 왔고,
그것이 우리 사회의 종교 문화로 정착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진실을 깨닫게 되면
모든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였으니 반려견이 좋은 곳에 갔을 거야’
이렇게 믿어서 집착을 내려놓아도 괜찮고,
‘이 슬픔은 나의 집착 때문이구나’ 이렇게 자각해서
집착을 내려놓아도 괜찮습니다.
핵심은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고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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