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생활을 오래 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내가 해외 생활도 힘들어 죽겠는데 인간관계에서까지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만나면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들을 끊어내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끊어낸 관계에 대한 미련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를 돌아보니
새로 만나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노력을 안 하고 있더라고요.
사람의 생각은 계속 바뀌는 것 같아요.
‘내가 나 자신도 이해를 못 하는데 남을 어떻게 이해하나?’ 하는 생각으로 살다가
언제부터인가 ‘내가 남을 왜 이해해야 하지? 그냥 끊어내야지’ 하고 살아요.
갈등을 적당히 해결하면서 살아야 인간관계가 유지될 텐데
이제는 그런 노력조차 안 하고 있습니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고 싶습니다//
질문자가 좋을 대로 하고 사세요.
싫으면 안 만나면 됩니다.
그렇게 해도 사는 데 지장이 없으면 그렇게 살아도 돼요.
인생이 별거 아니에요.
불교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쥐 한 마리가 고구마를 먹으려고 해요.
부처님이 보니까 그 고구마에는 쥐약이 들어 있어요.
그러면 부처님은 쥐에게 그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 고구마에는 쥐약이 들어 있다’
이렇게 사실을 말해줄 뿐이지
어떻게 하라는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이때 쥐는 고구마를 먹어야 할까요, 안 먹어야 할까요?
살고 싶다면 안 먹어야 하고, 죽고 싶으면 먹으면 되겠죠.
고구마를 먹을지 안 먹을지를 부처님이 정해주는 게 아닙니다.
선택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예요.
부처님은 사람들의 인생에 간섭하지 않으셨습니다.
‘거기에 쥐약이 들어 있으니 먹지 마라’ 하는 말은 후대에 생긴 거예요.
부처님이 무엇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겠습니까.
‘그 고구마에 쥐약이 들어 있다’ 하고 얘기하면
그 말을 듣고 나서 고구마를 먹고 안 먹고는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돈을 빌려야 됩니까, 안 빌려야 됩니까?’
이런 것에도 간섭하지 않습니다.
‘네가 돈을 빌리고 싶으면 빌리고, 빌리기 싫으면 빌리지 마라’
이것이 부처님의 말씀이에요.
돈을 빌리면 이자까지 쳐서 갚아야 하고
돈을 안 빌리면 당분간 궁하게 살아야 합니다.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는 각자가 책임지고 살아가야 하는 거예요.
결혼하라든지 말라든지, 이혼하라든지 말라든지,
부처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 산에 사는 동물들도 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데
사람으로 태어나서 왜 자기 마음대로 못 삽니까?
자기 좋을 대로 살아도 돼요.
그러나 남을 때리거나 죽이지는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권리는 있지만,
남에게 손해를 끼칠 권리는 없어요.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있지만
남을 괴롭히지는 말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몇 가지만은 꼭 지켜야 한다고 하셨어요.
불교의 목표는 해탈과 열반입니다.
해탈은 자유롭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열반은 괴로움 없이 사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의 가르침에는 즐겁게 살라는 말이 없습니다.
다람쥐가 즐겁게 삽니까?
괴롭지 않게 살뿐입니다.
즐거움만 너무 추구하다 보면
마약으로 빠지거나 향락에 빠지게 됩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왜 스트레스를 받는지 스스로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는데 왜 스트레스를 받습니까?
처음부터 잘못된 관점을 갖고 있는 거예요.
질문자는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과 관계를 끊는다고 했는데,
관계를 끊을 이유가 뭐가 있어요?
그 사람이 자기한테 달라붙었어요?
끊어내게요.
그 사람이 껌이에요?
만약 어떤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 사람을 잡은 것도 나이고, 그 사람을 버린 것도 나입니다.
그 사람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 성질대로 살아갑니다.
나도 내 성질대로 살고,
다른 사람들도 자기 성질대로 사는 거예요.
내 성격과 맞지 않다고 해서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인간관계를 맺을 때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구나.
사람마다 성격이 다 다르지’ 이렇게 가볍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살다 보면 나를 칭찬하는 사람도 있고, 나를 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나에게 욕을 하면 반드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할까요?
인간 사회에서 뒷말은 늘 있는 일이에요.
오늘 제 법문을 듣고 나서 어떤 사람이
‘법문을 왜 그따위로 해요!’ 하고 면전에 대고 말하는 게 나을까요?
집으로 돌아가면서
‘왜 법문을 저렇게 하지?’ 하고 뒤에서 말하는 게 나을까요?
뒷말은 다 상대를 배려해서 하는 행동이에요.
누가 뒷말을 했다면 '내가 없는 곳에서 내 욕을 했다.'
이렇게 괘씸해하지 말고 생각을 바꿔보는 거예요.
'그래도 나를 배려해서 뒤에서 말한 거구나.
내 앞에서 이야기 안 해서 고마워' 이렇게 감사 인사를 할 정도로
관점을 딱 바꾸면 사는 데 별문제가 없어요.
누구나 뒷담화를 합니다.
당사자가 들었을 때 기분이 나쁘면 뒷담화입니다.
특별히 욕을 하고 악담을 하는 게 뒷담화가 아니에요.
여러 사람이 모이면 사람들은 '그 사람은 성질이 좀 급하더라'
이런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얘기하는 사람은 누구도 뒷담화라고 생각을 안 해요.
당사자만 뒷담화라고 생각합니다.
제 법문을 듣고
'법륜스님 법문 중에서 북한 얘기는 좀 아니지 않나?'
이렇게 자기 의견을 낼 수 있습니다.
당사자의 귀에 안 들어가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당사자는
'저 사람이 내 의견에 반대하나?' 이런 식으로 듣습니다.
그래서 뒷담화가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뒷담화에 대해서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관계를 끊기 위해 따로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관계는 내가 끊어낸다고 해서 끊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질문자가 상대방을 붙잡아도 그가 내 옆에 계속 있지 않을 수 있고,
인연을 끊는다고 해도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대방은 질문자를 만나는 게 이득이다 싶으면 가라고 해도 곁에 있을 거예요.
질문자와 같이 있어 손해다 싶으면 붙잡아도 갑니다.
그러니 인간관계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말고
사람을 대할 때 '저 사람은 저렇구나' 하고 보면 됩니다.
사람은 생각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고, 이념도 다르고, 정치적 판단도 달라요.
'나와 이런 점이 다르네' 이런 정도로 생각하면
인간관계에서 아무 문제가 없어요.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서로 다르구나!' 이걸로 끝이에요.
어떤 사람이 신이 있다고 하면
'왜 저 사람은 없는 신을 있다고 하나?' 이러지 말고
'저 사람은 신이 있다고 믿는구나' 하고 생각하면 됩니다.
또 다른 사람이 신이 없다고 하면
'저 사람은 신이 없다고 믿는구나' 하고 생각하면 됩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그 문제를 두고 밤새도록 토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둘이 생각이 다르네' 이렇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질문자처럼
특별히 상대를 끊어내고자 노력할 필요도 없고,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야지, 왜 그렇게 자꾸 노력합니까?
밥 먹고 살기도 힘든데요.
그렇게 좀 더 편하게 살면 어떨까요?
여러분은 인생이 노력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여러분들과 정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어요.
저는 인생이 특별히 노력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좋을 대로 살면 돼요.
제가 평화운동을 하는데
특별한 이념이나 사명이 있어서 하는 게 아니에요.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보세요.
한반도에도 전쟁이 나는 게 좋을까요? 안 나는 게 좋을까요? 전
쟁이 안 나는 게 좋겠다면 그렇게 되도록 일을 해야죠.
그것을 굳이 노력이라고 할 것이 있나요?
전쟁이 일어나는 게 싫으니까 전쟁을 막는 겁니다.
제가 비행기를 타고 일본까지 왔는데
온 김에 여러분과 대화하고 가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그냥 가는 게 나을까요?
물론 이 시간에 책을 보거나 원고를 쓸 수도 있지만
어차피 흘러가는 시간인데 여러분들과 대화는 오늘밖에 못 하잖아요.
여러분들을 위해서 대화한다고 표현을 하지만
저를 희생하는 게 아니에요.
저도 여러분들을 보니까 좋아요.
일본에 와서 가만히 방 안에 있는 것보다는
이렇게 여러분과 대화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어요?
그래서 저는 해외 어디를 가도 간 김에 이런 대화의 장을 마련합니다.
사는 게 별거 아니에요.
너무 엄숙하게 살지 마세요.
인생에 그렇게 괴로워할 만한 일은 없어요.
죽음이 괴로워할 만한 일일까요?
죽는 것이 원래 인생이에요.
인류역사상 지금까지 태어난 사람은 모두 죽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는데, 죽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겠어요.
내일 죽느냐, 모레 죽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죽는 것이 아쉽다면, 살아있을 때 편안하게 살아야 합니다.
암에 걸려서 일 년밖에 못 산다고 하면,
그런 사람일수록 더욱더 웃고 살아야 해요.
오래 사는 인간들은 성질 좀 내고 살아도 돼요.
왜냐하면 웃을 날이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요.
그런데 1년밖에 못 사는데 성질낼 시간이 어디 있어요?
웃으면서 살아야지요.
또 늙을수록 더 많이 웃어야 해요.
살아갈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요.
젊은 사람들은 울기도 하고 성질도 내고 살아도 돼요.
아직 살아갈 날이 많으니까요.
‘인생이 별거 아니다’ 이렇게 가볍게 생각하면
생각보다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너무 무겁게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자신에 대해서 열등의식을 가지게 되는 거예요.
‘나는 공부를 못해’, ‘나는 일을 못 해’, ‘나는 돈을 못 벌어’ 이런 식으로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소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마음이 움츠려져 있다면
욕심이 너무 많거나
인생을 너무 높게 평가하거나
너무 큰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신도 못마땅하고,
같이 사는 사람도 못마땅한 거죠.
남편이나 아내는 이 세상에서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고르고 고른 사람 아니에요?
그렇게 골라 놓고는 같이 못 살겠다고 하면
도대체 어떤 인간이 괜찮은 인간이에요?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고르고 고른 사람에게조차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전 세계에서 어떤 인간을 데려다 놓아도 문제가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안 그러면 내 눈이 삐었던지요.
내 눈이 삐었다고 생각하면 자학을 하게 돼요.
남편이나 아내에게 문제가 있다면 전 세계 사람이 다 문제예요.
상대는 나쁜 것이 아니라 나와 안 맞을 뿐입니다.
나와 안 맞으면 따로 살 수도 있어요.
이혼하고 각자 살아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원수가 되어서 헤어지면 안 됩니다.
헤어지더라도 서로 맞절하고 악수하면서
‘당신 만나서 그동안 재미있었어.’ 이렇게 말한 후 헤어져야죠.
그렇지 않으면 인생을 자꾸 낭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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