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스님의 법문 중에서
‘나를 괴롭히러 찾아오는 인연은 없다’라는 말씀에 의문이 생겼습니다.
가끔 사회면 뉴스의 사건 사고 소식을 들으면
안타까운 마음을 넘어서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지속적인 학대로 목숨을 잃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등산하다가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큰 변을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올여름 사회적으로 큰 이슈를 만들어 냈던 교사 자살 사건 등
사회면에 실리는 사건 사고 소식을 접할 때면
누군가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거나 더 나아가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악연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인연들조차 나를 괴롭히려고 찾아온 인연이 아닌 걸까요?
좋은 인연과 나쁜 인연이라는 것이 정말 있는 게 아닐까요?//
두 사람이 만나서 나에게 이득이 있으면
이름하여 ‘좋은 인연’이라 부르는 것이고
나에게 손해를 끼치면 ‘나쁜 인연’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선연(善緣)’이 따로 있고 ‘악연(惡緣)’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줬는데 돈을 못 돌려받았다면,
내입장에서 상대방은 악연이라고 느껴지겠죠.
그러나 악연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돈을 빌려 간 사람이 못 갚았다는 사실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악연이라고 이름 짓는 거예요.
우리가 살다 보면 돈을 빌려주고 못 받을 때가 있고
도움을 준 적도 없는 사람한테서 오히려 도움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것을 이름하여 ‘선연이다’ 이렇게 부르는 거예요.
내가 가게에 가면 나는 ‘손님’이라 불리고
내가 학교에 가면 나는 ‘학부모’라고 불리고
내가 절에 가면 나는 ‘신도’라고 불립니다.
이처럼 나는 어떠한 정해진 존재가 아니라
인연에 따라서 불리는 이름이 달라질 뿐이에요.
악연이니 선연이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만나서
A는 이득을 보고 B는 손해를 봤다고 한다면
B가 볼 때 A는 악연이고, A가 볼 때 B는 선연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악연과 선연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 거예요.
만약에 누군가 ‘좋은 인연을 만나고 싶다’ 하고 말한다면
이 말은 누군가를 만나서 이득을 보고 싶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물건을 훔쳤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물건이 필요해서 가지고 간 거예요.
그런데 상대방은 자신의 물건을 잃어버렸으니까
그의 입장에서 볼 때는 나쁜 인연이 되는 거죠.
내가 어떤 물질을 먹었는데 병이 낫게 되면
그 물질을 이름하여 ‘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물질을 먹고 병이 안 나았다면 ‘약효가 없다’ 하고 말하고
그 물질을 먹었는데 오히려 병이 생기게 되면 ‘독’이라고 이름 짓는 겁니다.
약이나 독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현재 약이라고 하는 물질의 대부분은
정량보다 많이 쓰게 되면 독성을 띠고, 적당히 쓰면 약성을 띠게 됩니다.
‘무아(無我)’란
어떤 것도 실체가 없으며
단지 인연을 따라서 이렇게도 이루어지고 저렇게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도 한번 보십시오.
남편이 아내하고 사이가 안 좋다고 해서 악연이 아니에요.
서로가 원하는 만큼 얻지 못하니까 악연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상대방에게서 뭔가 이득을 얻으면
그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그 사람한테서 손해를 보면 그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좋은 인연과 나쁜 인연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면 좋은 인연이 되고
원하지 않는 결과가 일어나면 나쁜 인연이 되는 것입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에 따라 좋은 인연과 나쁜 인연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과 일본이 전쟁한다고 합시다.
한국이 이기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밤이고 낮이고 기도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이기게 되면
우리는 ‘부처님 믿어도 소용없네’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반면에 일본의 불교 신자들은
‘부처님이 우리에게 가피를 내렸다’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같은 부처님을 두고도
이렇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보게 되는 거예요.
이렇듯 본래 좋고 나쁜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좋은 일이라고 평가되기도 하고
나쁜 일이라고 평가되기도 하고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닌, 그냥 사건이라고 평가되기도 하는 겁니다.
거란족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서희가 적장 소손녕과 담판으로 거란을 몰아냈던 상황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고려 입장에서는 활도 한 번 안 쏘고 승리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란족 입장에서는 서희에게 속았다고 평가할 수 있겠죠.
그래서 정해진 인연이 따로 있다고 보면 안 되고
어떤 시간과 어떤 공간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고 봐야 합니다.
그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시각 차이는
각자의 입장, 사상, 이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때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불경기로 인해 엄청난 재앙을 맞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운동 하는 사람들은 ‘지구 공기가 맑아졌다’ 하고 평가합니다.
이처럼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시각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인연만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좋은 인연을 만나고 싶은 마음속에는
인간관계에서 항상 이득만 보고 싶어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수행자는 복을 받기를 바라기보다 복을 지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행위가 곧 복을 받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을 지을 생각은 안 하고
복을 받기만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기가 쉽습니다.
자신은 다른 사람한테 아무런 이익을 안 주면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익을 얻고자 하면,
첫째, 그렇게 되기가 불가능하고,
둘째, 주위에서 그런 사람을 보면 얄밉게 느껴집니다.
복을 짓는 사람이 되어 스스로 복 받는 길을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많이 베풀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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