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4)

[법륜스님의 하루] 남편이 암 투병 중입니다. (2023.11.25.)

Buddhastudy 2024. 1. 10. 20:21

 

남편이 암투병 중입니다.

투병 생활을 한 지 6개월이 지났는데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5개월이 지나면서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고 적응이 되었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니까

평상시의 가벼운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남편이 다시 검사를 받고 결과가 기대만큼 좋지 않으니

마음이 또 가라앉게 됩니다.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의문도 듭니다.

이 일을 해결하고 나면 다른 일로 괴로워하고

그 일을 해결하고 나면 또 다른 일로 괴로워할 것을 생각하니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남편을 간병해야 하는데

정토회 활동을 어느 정도로 해야 할지도 고민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사람이 죽거나, 병이 나서 죽을 위기에 처해 있거나

전 재산을 잃어버리거나, 중요한 시험에 떨어지거나

이럴 때 옆에서 무슨 말을 한들 그게 위안이 되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살다가 어려운 일을 겪게 되면 위로를 구하는데

이렇게 위안을 얻으려는 데서

5천 년 전에 나온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사람은 가진 것을 잃어버릴 때나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괴로움을 느낍니다.

 

질문자는 남편이라는 존재가 죽음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괴롭다고 생각을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며칠 전 즉문즉설에서

자기가 아끼던 반려견이 죽어서 너무 괴롭다는 사연이 있었어요.

49재도 지냈는데 극락에 갔는지

다음 생에는 개가 아닌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겠는지

다시 반려견으로 태어난다면 나와 다시 만날 수 있겠는지

스님이 좀 이야기를 해달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런 질문을 들어보면

왜 영혼설이 나오고, 왜 환생설이 나오고

왜 내생에 좋은 곳에 간다는 이야기가 나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키우던 강아지한테도 집착을 하니까

어떻게든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겁니다.

키우던 강아지한테도 이런 마음을 느끼는데

하물며 같이 살던 사람한테는 더 하겠죠.

 

이럴 때 위로를 해주는 게 종교입니다.

기도를 하면 좋은 곳으로 간다거나, 환생을 한다거나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이때 그게 사실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이 사람에게 위로가 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위로를 받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시고

어떻게 해야 괴로움을 근원적으로 없앨 수 있는지

그 길을 찾아 출가를 하셨습니다.

 

만약 위로에 만족을 했다면

왕자로 살던 붓다가 출가할 이유가 없었겠죠.

주변에 다른 사람들은 다 그런 위로로 만족을 했는데

붓다는 만족을 하지 못하고 출가해서 탐구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데 헤어지는 인연이 되면

괴로움이 발생하고,

내가 싫어하는데 만날 인연이 되면

괴로움이 발생한다는 걸 발견하신 거예요.

 

헤어지는 것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마음과 인연이 되면 괴로움이 발생하고

또 싫어하는 마음과 인연이 되면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얻고자 하는데 얻지 못하면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이처럼 내 마음에

왜 괴로움이 발생하는지 탐구해서

괴로움의 발생 원인은 집착이라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그 집착을 놓으면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왜 집착이 놓아지지 않을까요?

좋아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좋고 싫음을 떠나버리면 집착할 바가 없어지고

집착할 바가 없어지면 괴로움은 사라집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정토불교대학에서 배운 내용입니다.

 

괴로움이 발생할 때 왜 그런지 잘 살펴봐야 합니다.

만약 소심해서 고민이라면 소심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탐구해야 합니다.

 

소심해지는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이쪽에서도 욕을 안 먹고, 저쪽에서도 욕을 안 먹으려고 하니까

소심해지는 거예요.

남한테 욕을 하나도 안 먹고

다 좋은 소리만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욕심입니다.

 

누가 돈 빌려달라고 할 때

빌려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것도

그 뿌리를 살펴보면 모두 욕심 때문입니다.

얼핏 들으면

내가 돈을 빌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돈을 빌려달라고 할 때 고민하는 게

왜 욕심인가 싶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돈을 빌려주려고 하니 못 돌려받을 것 같고

안 빌려주려니 욕을 먹을 것 같고

돈도 안 주고 욕도 안 먹는 방법이 없을까?’

이렇게 머리를 굴리기 때문에 고민이 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질문자의 경우에도

남편의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남편과의 관계로 인한 원인이 있을 거예요.

정신적으로 의지하기 때문에

남편이 죽는 것이 두려울 수도 있고,

남편이 떠난 뒤 미래의 경제적 어려움을 걱정하는 마음일 수도 있고

원인은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자식에 대해 괴로움을 느끼는 건

대부분 자식에 대한 애착심 때문이에요.

 

질문자도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그 원인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우선 내가 걱정한다고 병이 낫는 건 아니에요.

치료는 의사가 하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게 아니니까

그 부분은 의사에게 맡기고

대신 나는 거기에 필요한 병원비를 지원한다거나

간호를 도와준다거나 할 수 있겠죠.

 

큰스님이 나이가 점점 들어가시는데

제자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부축해 드리는 일밖에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가시는 걸 제가 막을 수는 없잖아요.

대신 밥 한 끼 사드리고

걸어 다닐 때 부축해 드리는 일은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게 없는데도

마치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하기 때문에 번뇌가 생깁니다.

 

자식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서 고민하는 사람은

질문자의 사연을 듣고

남편 같으면 내가 집착을 놓겠는데

자식은 집착을 놓기가 어렵다하고 이야기를 할 겁니다.

 

반대로 질문자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

정신적인 문제는 받아들이면 되지

병에 걸려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이렇게 사람은 다 자기 입장에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근본 원리를 꿰뚫으면,

그것이 병이든, 재산의 상실이든, 늙음이든, 장애든

그 집착을 놓으면

누구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질문자도 앞으로 살면서 이런 끄달림 없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고 있으니까

이번 일을 계기로 배우면 됩니다.

 

불교대학을 다니면서

머리로 배우는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우선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직접 경험하고

마음에서 받아들여져야 자기 것이 되지

다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서

인생은 이런 거야’, ‘인생은 저런 거야하고 말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이가 아픈 사람은

막상 내 아이가 아프니까

내 마음이 편안하게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고

남편이 갑자기 암 진단을 받으니까

내 마음을 추스르기 어렵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일련의 과정이 모두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지금 남편의 병이 낫느냐 안 낫느냐는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이 문제에 대해

내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살펴서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정토회 일을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남편을 간호하는 데 장애가 되면 안 해야 하고,

간호와 아무 관계가 없다면 계속 이어가는 것도 괜찮습니다.

 

남편이 아픈 것과 정토회 일이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 그걸 연결시켜서

마치 상관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건 순간적인 착각에 불과합니다.

 

...

 

같이 사니까 집착이 생기죠.

강아지도 같이 지내면 정이 들고 집착이 생겨서

떠나보낼 때 괴로운 거예요.

대상이 무엇인지에 상관없이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괴로움은 모두 집착으로 인해 생깁니다.

 

지금 가자 지구에서는

하루에 아이들만 60여 명이 죽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들이 거기에 대해 크게 괴로워하지는 않잖아요.

신문에서 기사를 읽을 때는 조금 안타깝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런 걸 보면 누군가 죽었기 때문에 슬픈 건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도 매일 매시 매초 단위로 사람이 죽고 있잖아요.

그러면 매일 슬퍼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잖아요.

누가 죽으면 괴롭고, 누가 죽으면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괴로움의 원인이

나의 집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으면

이 괴로움이 집착으로부터 온 줄 알고

집착을 내려놓아야 하고,

괴롭고 싶으면

그냥 집착을 하고 괴로움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괴롭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그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음식에 쥐약이 들었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먹을지 말지는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죠.

자꾸 부처님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잘못 이해하니까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하는 질문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어떻게 살지는 각자가 알아서 사는 거예요.

 

부처님은 괴로움이 왜 생기는지 밝히셨고

괴로움 없이 살고 싶으면 그 원리를 따라 행하면 되고

감정이 끌리는 대로 살고 싶으면

그에 따른 괴로움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관점을 이렇게 갖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