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부처님의 자비심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당시 계급주의 사회에서도
부처님께서는 평등을 주장하시고, 중생을 깨우쳐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한평생을 헌신적으로 살아가셨다는 내용이
가슴에 많이 와닿았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야사 비구도 그렇고, 야사 비구의 친구들 50명도
쉽게 아라한과를 증득했는데
현대사회에서는 왜 이렇게 깨달음을 이루기가 어려울까요?
깨달음을 쉽게 이룰 수는 없을까요?//
요즘 시대가 깨달음을 얻기에 더 쉬워야 하지 않을까요?
부처님 당시에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그때도 부처님은 사람들을 깨우쳤는데
요즘은 깨우치기가 더 쉽다고 생각해야죠.
왜 요즘 시대에 깨우치기가 더 어렵다는 생각을 해요?
법문을 듣고 깨우쳤다고 말할 때
깨우쳤다는 말은 같은데
그 기준과 내용은 천양지차입니다.
어떤 사람은 ‘알았습니다!’ 하고 겨우 이해하면
그것을 깨달은 것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미워하고 원망할 뿐만 아니라
본인이 괴로워서 못 살다가
어느 순간에 남편의 고뇌를 이해하고, 자신을 자각함으로써
남편에 대한 미움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을 두고
깨달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똑같이 깨달음이라고 말하지만
잠시 괴로움이 없어진 정도가 아니라
인생의 전반적인 고뇌가 사라져 버린 사례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토회에도 그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
세속적인 생활을 그만두고 출가하거나
공동체에 들어와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 시대에도 이렇게 번뇌가 없어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을 자세히 안 보니까 못 보는 거예요.
사람을 보더라도
그 사람이 번뇌가 없는 사람인지를 자세히 보기보다는
주로 지위, 부, 인물, 이런 것을 보잖아요.
또한 여러분들은
번뇌가 완전히 없어진 사람만을 찾습니다.
너무 ‘완벽’을 추구하니까
번뇌가 없어진 사람을 못 보는 거예요.
예를 들어
18K 금으로 만든 반지는 금반지일까요, 아닐까요?
‘그게 어떻게 금반지예요?’ 하면서 100% 순금을 찾는다면
90%의 금도 순금이 아닌 가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18K라 해도 금이에요.
그런 것처럼 부모를 원망하고, 남편을 미워하고, 자식에 실망하고
이렇게 살다가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들은
모두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순간순간 경계에 부딪힐 때는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거나, 괴롭거나, 미움이 일어나지만
곧바로 자각하면 금방 사라집니다.
굳이 시간으로 따지면
자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번뇌를 하루 넘기는 법이 없어요.
잠시 사로잡혔다가 놓아버리면서 편안하게 생활합니다.
제 경험으로 봤을 때는
아는 게 적을수록
번뇌가 적어지는 효과가 더 큰 것 같습니다.
정토회 회원 중에서도 초등학교나 중학교까지 공부한 것이 전부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서
탁 자신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이 많습니다.
반면에 불교 교리나 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을 가지고
계속 머리를 굴려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안다.’ 하는 인식을 놓아버려야 되는데 그게 잘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현대인은
옛날 사람들보다 말귀는 빨리 알아듣는다고 할 수 있지만
오히려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옛날 사람보다 더딘 이유는
자꾸 생각으로 모든 걸 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륜스님 법문을 들어보니 훌륭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저는 법을 이해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하는 말이
본인의 머리로 이해가 되면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머리로 이해가 되면 ‘훌륭하십니다!’ 하고,
내 머리로 이해가 안 되면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다!’
하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그냥 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스님한테 가까이 와서
‘스님!’하고 부르면서 좋아하는 마음을 냈다가
제가 톡 하고 외면하면
곧바로 삐져서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바로 확 바뀌어 버려요.
그 사람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작용이 그렇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고뇌에서 벗어나려면 움켜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움켜쥔 생각은 사람마다 카르마에 따라서 차이가 크게 나지만
평균적으로 말하면
아는 게 많을수록 어떤 문제를 자꾸 생각으로 풀려고 합니다.
생각을 골똘히 하니까 능력은 커지지만
대신에 자신의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좀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현대인들은 깨닫는 게 좀 더딘데 왜 그럽니까?’
이런 의문이 드는 것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야심경을 읽어봐도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라고 하잖아요.
‘이 얻을 바 없는 까닭으로’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으려면
무엇을 얻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실은 아무것도 얻을 게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깨달음마저도
얻겠다는 욕망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했다는 새로운 고뇌가 또 생기는 거예요.
돈을 벌어야 하는데 돈을 못 벌었다고 실망하는 것이나
깨달아야 하는데 못 깨달았다고 실망하는 것이나
모두 집착이라는 측면에서는 같은 겁니다.
그럴 때 ‘돈을 벌겠다.’ 하는 말과
‘도를 얻겠다.’ 하는 말은 아무 차이가 없어요.
얻겠다는 것이 고뇌의 근본이기 때문에
그 대상이 돈이든, 도이든, 사랑이든
그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얻겠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얻겠다는 생각이 그렇게 쉽게 놓아지지 않는다는 거죠.
여러분들은 돈을 얻겠다고 하다가
괴롭다고 해서 돈이 얼마나 무상한 줄 아는지 깨우쳐 주면
‘그렇구나!’ 하고 권력을 잡습니다.
‘권력이라는 게 얼마나 무상한 줄 아느냐?’고 깨우쳐 주면
권력을 탁 버리고
이번에는 도를 붙잡는 식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도’가 그냥 돈이나 권력의 대체물에 불과한 수행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깨달음을 체험하기가 어려운 겁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자꾸 추상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확 깨우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돈을 조금씩 벌어서 저축할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복권을 사서 일확천금을 벌겠다는 것과 똑같은 개념으로
깨달음에 대해서도 접근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수행을 한다고 하면서도
늘 복권에 떨어진 것 같은 그런 실망을 하는 거예요.
수행은 지금 나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깨어있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을 유지하다가 놓치면
다시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렇게 꾸준히 해나가면 되는데
‘깨달았다.’, ‘못 깨달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돈을 벌었다.’, ‘돈을 못 벌었다.’ 하는 것과 똑같아요.
복을 비는 기복적인 신앙도 문제지만
욕심으로 깨닫겠다고 하는 우리의 수행 풍토 역시 문제입니다.
마치 벼락부자가 되겠다는 것처럼
단박에 깨우쳐서 도인이 되겠다는 잘못된 수행 풍조 때문에
지금 한국 불교가
매우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발을 안 딛고
늘 허공을 헤매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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