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야바라밀다: 깨달음의 지혜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정토불교 대학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내용 중 하나입니다 [05:53].
- 수행자의 자세: 수행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며, 법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혜를 통해 괴로움에서 벗어납니다 [06:19].
- 보시바라밀: 털끝만큼의 욕심 없이 무엇이든 베푸는 마음을 내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06:31].
- 무주상보시: 제법이 공한 줄 알고 베풀어야 하며, 내 것이라는 생각 없이 필요한 사람이 쓰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07:55].
- 인욕바라밀: 참을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하며,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면 참을 필요가 없어집니다 [09:13].
- 반야의 중요성: 깨달음이 선행될 때 베푸는 것이 바라밀다가 되고, 참는 것이 바라밀다가 되며, 정진, 선정, 계를 지키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10:02].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용어는 '반야바라밀다'입니다.
깨달음의 지혜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이는 여러분이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하면
가장 먼저 배우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수행자는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납니까?
내가 원하던 것을 얻어서 벗어나는 거예요?
아니면 이 모든 괴로움이 나의 무지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무지를 깨우쳐서 벗어나는 거예요?
수행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사람입니다.
즉, 법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혜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이것을 산스크리트어로는
'프라즈냐 파라미타얌(Prajnā-pāramitāyāṃ)'이라고 합니다.
내가 털끝만큼도 욕심 없이 무엇이든 베푸는 마음을 내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것을 ‘보시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베푸는 마음을 내면
우리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무주상보시의 마음을 내어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다나바라밀다(dana paramita)라고도 부릅니다.
이와 달리, 내가 깨달아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대승 불교의 핵심은 깨달아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반야바라밀다’입니다.
바라밀다에는 총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가 그것입니다. 이 여섯 가지를 대승보살이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수행법이라고 해서
‘육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반야바라밀다는 좁은 의미로 쓰일 때는
이 여섯 개 중 하나를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로 쓰일 때는
이 여섯 가지를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보시바라밀이라고 할 때
단순히 보시한다고 해서
그것이 바라밀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법이 공한 줄 알고 베풀어야 바라밀이 될 수 있습니다.
제법이 공한 줄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네 것, 내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실상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단지 ‘베푼다’는 용어를 썼을 뿐이지
실제로는 내가 너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필요한 사람이 쓰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입니다.
무주상보시가 되어야 보시바라밀이라고 하지
단순히 베푸는 것만으로는 바라밀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남을 도와주고 나서 섭섭할 때가 있죠.
베풀었는데 오히려 괴로움이 더 생겼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보시라고 할 수는 있어도
보시바라밀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보시바라밀이 되려면
이 물건이 내 것이라는 생각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즉, 제법이 공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해요.
그때 비로소 바라밀이 되는 거예요.
인욕바라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무엇을 참는다고 할 때, 참는 데는 한도가 있어요.
참으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면 인욕을 통해 괴로움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에요.
물론 착한 사람인 것은 맞아요.
아무리 화가 나도 꾹 참으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안 주니까
착한 사람인 것은 맞지만,
내가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바라밀이란
내가 어떤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인욕바라밀이 되려면
참을 것이 없는 경지가 되어야 해요.
남들은 나를 보고 '그 사람 참 잘 참는다.' 이렇게 얘기하겠지만
스스로는 참을 것이 아예 없어야 합니다.
참을 것이 없어지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내가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면 참을 것이 없어집니다.
그가 왜 그렇게 하는지를 내가 완전히 이해하면 참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한테 돈을 달라고 해서 기분이 나빠졌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10년 전에 내가 그 사람에게 돈을 빌린 것이 생각났어요.
그는 나한테 빚을 받으러 온 사람이었던 겁니다.
그러면 내가 돈을 주면서 고맙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생색을 내야 할까요?
고맙다고 해야 합니다.
이렇게 확연히 알면 참을 것이 없어져요.
그래서 바라밀이 되려면
모두 그 앞에 반야의 요소가 들어 있어야 합니다.
깨달음이 선행될 때 베푸는 것이 바라밀다가 되고
참는 것이 바라밀다가 되고
정진이 바라밀다가 되고
선정이 바라밀다가 되고
계를 지키는 게 바라밀다가 되는 거예요.
깨달음이 없다면
그것은 비록 누군가에게 좋은 일은 될 수 있어도
나의 괴로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뒤끝이 남게 됩니다.
괜히 보시했다가 뒤통수 맞는 일이 생긴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기껏 좋은 일을 하고서는
기분이 나빠질 때가 많잖아요.
수행이란 뒤끝이 없어야 합니다.
흔적이 없고, 남음이 없는 것이 수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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