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법륜스님의 하루

[법륜스님의 하루]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내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을까요? (2025.04.20.)

Buddhastudy 2025. 4. 24. 20:43

 

 

  • 스님은 산상수훈에 불교 수행과 일치하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고 언급합니다 [19:35].
  • 스님은 산상수훈과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는 것보다 삶에서 이해하고 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20:54], [23:39].
  • 스님은 예수님의 가르침, 특히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불교 원리와 일치한다고 말합니다 [19:48].
  • 스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용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사랑을 보여준다고 강조합니다 [21:18].

 

 

사실 저는 오래전부터 성경을 바탕으로

법문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이 주제로 책을 한 권 써보고 싶을 정도예요.

 

왜냐하면 성경 속에도

불교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수행에 관한 가르침이 풍부하게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이 하신 산상 설교가 그렇습니다.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 주어라.’,

속옷을 달라 하면 겉옷까지 벗어주어라.’,

네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왼편 뺨도 돌려 대어라.’

이런 가르침은 그 자체로 수행입니다.

 

누구를 미워하지 마라.’를 넘어

원수를 사랑하라.’ 하고 가르친 것도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억누르는 대신

사랑하는 마음을 내면 미움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훔치지 마라.’ 대신 베풀어라.’ 하고 가르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입니다.

 

기도를 할 때는 은밀히 해야 하며

조건을 붙이지 말라고 가르친 것도

수행적 관점과 매우 일치하는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전지전능하시므로

이미 우리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큰소리로 기도하거나 조건을 일일이 나열하는 것은

하느님을 못 믿는 자세입니다.

혹시 하느님이 내 기도를 못 들으시거나 빠뜨리실까

염려해서 하는 행동인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는 목사님들이 하시는 설교가

예수님의 가르침인 신약 성경보다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구약 성경을 더 많이 인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은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어떻게 삶 속에서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활절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육신이 살아난 것이 곧 부활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부활의 의미를 너무 낮은 수준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 상황을 만든 사람들을 향해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를 모릅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앞의 말씀은 저들을 용서하라는 뜻이고,

뒤의 말씀은 저들은 죄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응징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소금 기둥을 만들어서 응징하는 하느님이셨어요.

 

그러나 예수님 이후의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에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향해

그들을 용서하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사실 그들은 일상적으로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던

교도소 직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죄를 지은 지 모르는 거죠.

예수님은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을 온전히 이해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죄가 없다.’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온전한 이해야말로 최고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해가 곧 사랑입니다.

 

자신을 죽인 사람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은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주여,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두 사람은 지옥으로 보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상식일 텐데

예수님은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구약의 하느님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제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징벌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꾸셨다고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순히 성자(聖子)가 아니라

하느님 그 자체가 되신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가질 수 있는 그 마음을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성자에서 성부(聖父)로 거듭나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육신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 있어도

예수님의 정신은 결코 죽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랑의 하느님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이며 부활입니다.

몸이 되살아나는 것이 부활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정신이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 부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성경을 무조건 믿으라고 말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즉 산상 설교나

마태복음 25장에 담긴 말씀들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든 불교든

이제 종교의 이름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가르침에 얼마나 충실하게 살아가느냐입니다.

 

종교인의 수가 많다고 해서

사회적 범죄가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통계적으로 보아도

종교인과 무종교인 사이에 범죄율의 차이는 거의 없습니다.

폭행범, 성추행범, 사기범 가운데도 종교인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 종교인의 수가 많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이 믿는 신앙을 통해

삶에 어떤 변화를 이루었고,

그것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삶을 통해 사회와 이웃으로부터

어떤 신뢰를 쌓아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신앙으로 돌아가려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가르침에 감동하고, 그 감동으로 삶이 거듭나야 합니다.

 

경동교회가 걸어온 80년의 성과를

단순히 교회의 크기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강원룡 목사님과 여러분이

우리 사회에 끼친 긍정적 영향은

그보다 수백, 수천 배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그 영향을 받은 사람 중 하나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간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