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이 ‘고’임을 자각해야
즉 ‘락’의 본질이 곧 ‘고’임을 확연히 아는 게
‘고’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이다.
여러분들이 ‘고’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가르치는데
여러분들의 해탈은
고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알고 있어요?
고락 중에 락을 구하는 것을 해탈이라고 알고 있어요?
여러분들은 열반이나 해탈을
고락 중에 고는 멀리하고 락을 취하는 것을 해탈이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수행이 진척이 없는 거죠.
고집멸도 중에 첫 단계를 아직 못 깨달았기 때문에
일체가 고임을 못 깨달았기 때문에.
미련을 못 버리는 거요.
집착이 놔지지 않는 거요.
그리고 여러분들 나한테 맨날 묻잖아요.
”집착을 어이하면 놓습니까?“
괴로움인 줄 알면 저절로 놔지는데
괴로움인 줄 아직 모른다.
이게 뜨거운 줄 알면 저절로 놔져요.
”스님, 뜨거워 죽겠어요.“
”놔라“
”어이 놓는데요?“ 이래.
말이 되나 안 되나?
그러니까 이게 뜨거운 것은 손을 대보고 뜨거우면
‘어떻게’는 벌써 집착이오.
쥐면 ”앗 뜨거“
어떻게 놨니?
그냥 놓은 거요.
뜨거운 줄 알면 그냥 놔지는 거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놓는 방법이에요? 뜨거운 줄 아는 거요?
고 인줄 알면 그냥 놔지는 거요.
분명히 이치를 탁 알아야 공부가 되는 거요.
남자가 아이고 얼굴도 예쁘고 돈도 있고 말도 잘하고 이래서
그 인간하고 내가 결혼했다고 좋아하는데
그런데 그 인간은 나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딴 여자도 좋아하기 때문에
반드시 질투심으로 한평생 괴로워해야 한다.
‘락’이 곧 ‘고’의 씨앗이 된다.
그러면 이 근본이, 뿌리가 뭐예요?
욕구에요, 욕구.
욕구로부터 ‘고’가 생기고 ‘락’이 생기는 거요.
그런데 욕구를 충족시켜서 ‘락’으로 행복을 삼으면
욕구가 계속 충족이 되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현실은 욕구가 완전히 충족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요.
또 상대적 욕구는
이게 충족이 되면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욕구가 커져요.
그래서 이게 충족이 될 수 없어요, 완전히는.
그래서 욕구를 충족시켜서 그 만족감으로 행복을 삼는 게 쾌락주의에요.
쾌락주의라는 것은
술먹고 노래하고 춤추고 이런 것만을 쾌락이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잖아요.
이건 다 쾌락주의에 속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원히 영원히 이뤄질 수 없기 때문에
반대로 생각하게 된 게
욕구라는 것이 결국 고의 원인이다.
이 욕구를 아예 억눌러서, 뿌리를 뽑아버리면 괴로움이 없을 거 아니야.
그래서 음식도 안 먹고 생존 욕구도 용납을 안 하는 거요.
일부러 지옥을 만들어서 거기서 욕구를 용납 안 하는 거요.
나무에 거꾸로 매달리고, 물속에 들어가서 참고 견디고
이렇게 해서(욕구를 억압해서)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게 고행주의에요.
고행주의는 어리석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고행주의는 그 고통을 감내, 어떤 욕구도 용납하지 않으려고 함으로써
오히려 어쩌면 쾌락주의보다 덜 헐떡거릴 수가 있어요.
그런데 욕구는 항상 자연스럽게 있어요? 없어요?
그걸 아무리 없애려고 해도 늘 있겠죠.
그러면 그걸 억누르거나 없애려고 하면 스트레스를 받는 거요.
그래서 이것도 완전한 해탈에 이를 수 없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길은 2가지에요.
이렇게 명상한다고 앉아있는데
다리가 아프다, 펴버리면 해결이 되죠.
그런데 그 고통은 해결이 되지만, 다리를 편다고 해결이 되는 건 아니잖아.
다리가 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쾌락주의라면
참고 이겨내는 것을 고행주의라고 그래요.
우리도 지금 쾌락과 고행을 왔다 갔다 하는 거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는 해탈의 길이 아니다.
그
래서 부처님이 발견한 제3의 길, 그게 중도에요.
부처님도 29살까지는 쾌락주의로, 출가해서 6년은 고행주의로
그래서 이쪽도 저쪽도 완전한 해탈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원인을 살펴서
“아, 욕구를 따르는 것만 욕구의 노예가 아니고
욕구를 억압하는 것도 뭐다? 욕구의 노예라는 거요.
욕구에 따른 작용 반작용이에요.
욕구에 반응을 안 해버리는 거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있다는 건 욕구가 있다고 그랬는데 욕구를 없애버린다?
그러면 이거 없애버리면 저게 또 나오겠죠.
풀 뽑는 거 하고 똑같아요.
..
그래서 욕구를 따라가지도 않고 욕구를 억압하지도 않고
욕구에 반응을 하지 않는 거요.
그래서 욕구를 다만 욕구로 알아차리는 거요.
”욕구가 있구나“ ”이런 욕구가 있구나“ ”욕구가 있구나“ 하고 다만 알아차린다.
이게 제3의 길이오.
욕구를 없애는 게 아니고, 욕구에 반응을 하지 않는다.
욕구에 대응을 하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어려워요.
이거든 저거든 해야 해.
그걸 비유를 들어서 말하면 공중에 줄 타기하는 사람이
줄을 딱 타서 왼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고, 오른쪽으로도 기울어지지도 않고
똑바로 가기만 하면 된다.
말은 억수로 쉽지.
그거하고 똑같아요.
그런데 현실은 똑바로 가집니까? 안 가집니까?
항상 이쪽으로 기울어지든, 저쪽으로 기울어지든 기울어지는 거요.
기울어지는 게 극단이요.
그래서 중도라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쉽지만
현실에서는 많~~~~~~은 연습이 필요한 거요.
똑바로 가는 사람, 숙련된 사람도
현실에서는 휘청휘청하면서 나아가죠.
욕구를 억압하지도 않고
욕구를 따르지도 않고
그러나 약간 약간 휘청거리면서 나아가는 거요.
빠지지 않는 거요.
이런 것이 해탈의 길이다.
이렇게 해서 중도의 길을 발견하시고
중도의 행을 하셔서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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