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살의 의미를 이해하시겠어요? 그래. 포살은 어떻게 하느냐? 자, ‘대중이 우리가 한 30명이 같이 산다.’ 하면 우리는 이러이러한 계율을 가지고 즉, 규칙을 가지고 살기로 했단 말이오. 자. 불자가 되었다 하면 살생하지 않는다. 도둑질 하지 않는다. 사음하지 않는다. 거짓말하지 않는다. 술을 먹지 않는다. 이렇게 계율을 지키고 살게 되었단 말이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살다보면 어길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겠죠. 그러니까 보름마다 한 번씩 모여서. 개인이 자기가 참회하는 것은 매일매일 알아서 순간순간 할 일이고, 단체에서는 보름마다 한 번씩, 한 달마다 한 번씩 모여서 포살법회를 연단 말이오. 포살법회는 어떻게 하느냐?
사회자가 일어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대중들이여, 들으시라. 오늘은 보름. 포살의 날이니 만약 대중들에게 지장이 없다면 승단은 포살을 베풀고 계본을 내리라. 무엇을 승단의 첫 행사라고 하는가? 여러 대덕이 몸의 청정함을 고백합니다. 나는 이제 계본을 읽으리라. 대중은 여기에서 잘 듣고 잘 생각할 지어다.』
승단은 화합하고 청정해야 된다고 그랬죠? 가장 중요한 게 승단이 유지해야 될 것은 화합과 청정성이기 때문에, 그 화합과 청정성을 유지해야 된단 말이오. 그런데 화합이 깨뜨려지고 청정성이 더렵혀졌다면 뉘우쳐서 화합을 이루고 청정을 협업해야 된다. 이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만약 스스로 허물이 있음을 자각한 사람은 드러내라. 또 죄 없는 이는 잠자코 있을지니 잠잠하면 여러 대덕의 청정함을 알리도다. 만약 누가 물때는 마땅히 대답해야 하리니, 이같이 비구는 이대중속에서 세 번까지 질문을 받을 것이며, 세 번을 질문을 받고도 죄가 있으면서 고백하지 않는다면 고의적인 망어죄를 얻으리라.』
그러니까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스스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또 거짓말 죄까지 범해지죠. 자기까지 속이면서 여기 굳이 살 이유가 없잖아. 이것을 잘 생각해야 돼. 여기는 그런 것을, 그런 세상을 벗어나서 살려고, 그런 것이 없는 세상을 이루려고 모였는데, 자기가 또 그런 것을 범할 바에야 밖에 가서 살지, 여기 있을 이유가 뭐가 있냐 이거야.
『고의적인 방해는 도의 장애가 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나니 그러므로 죄 있는 것을 기억하는 비구로 청정하기를 원하는 이는 그 죄를 드러내라. 드러내면 그는 안락함을 얻으리라.』
즉, 참회하면 사라진다. 이 말이오. 자, 이렇게 해서 시작하면서 대본 하나를 구체적으로 계본이 쭉 10개면 10개. 20개면 20개 있을 거 아니오. 그럼 한 계본마다 이렇게 질문을 한단 말이오.
『어떤 비구라고 만약 마을이나 숲에서 주지 않는 것을 취했다면 그는 바라이에 해당하니 함께 있지 못하리라. 이제 나는 여러 대덕들에게 묻노라. 이곳에 대해서 청정한가?』
그럼 대중이 여럿이 물을 때, 각각은 자기 개인에게 묻는 것처럼 받아들여라. 자기를 들여다 봐. “지난 보름동안 또는 한 달 동안 나는 이런 일이 있었던가.” 없단 말이오. 또 물어.
『다시 묻노라. 이 점에 대해서 청정한가.』 다시 살펴 봐. 없단 말이오.
『세 번째 묻노라. 이 점에 대해서 청정한가.』
더 살펴 봐. 그런 일이 없단 말이오. 살펴보는 데 없으니까 뭐할까? 침묵이 유지되겠죠. 발견되면 어때요? 일어나서 “참회합니다. 저는 몇 월 며칟날 몇 시에 어떠어떠한 상황에서 이러이러한 일을 범했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겠죠?
『여러 대덕들은 이 점에 있어서 청정하십니다. 그러기에 침묵하시니 나는 그렇게 알겠소.』
그리고 또 한 계본, 한 계본, 한 계본, 한 계본 나가는데 하나하나씩 이렇게 물을 수도 있고, 그 다음에 전제를 하고 계본 하나를 딱 읽으면 부처님께서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갖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 계본에 대해서 청정합니까?”
『다시 묻노라. 이 점에 대해서 청정한가?
세 번째 묻노라. 이 점에 대해서 청정한가?』
하면 대중이 일어나서 참회하고 하겠죠. 그럼 또 다음 계본, 다음 계본, 다음 계본. 이렇게 넘어간단 말이오. 이해하시겠어요? 이러면 설령 때가 묻었다 하더라도 이 포살을 통해서 다 뭐가 되었다? 깨끗해졌겠죠? 더러워진 걸레가 다 빨렸단 이 말이오. 이렇게 아침에 하면, 이런 청정한 입장에서 우리는 누구를? 대중을, 신도를 받을 수가 있다. 맞을 수가 있다. 이 말이오. 신도의 공양을 뭐할 수 있다? 받을 수 있어요.
그래서 이 날, 신도들은 공양을 준비해서 스님들께 올리고, 스님들은 이 포살을 한 뒤에 그 공양을 받아먹고, 그리고 신도들을 위해서 뭘 하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설법하게 되고,
자기가 더렵혀진 상태로
어떻게 남보고 어떻게 하라고 얘기하겠어.
이것이 정기적인 법회의 유래다. 그러니까 신도님들도 포살을 했다가 아니라, 그 지도부가 늘 포살을 하고 먼저 자기를 청정하게 사고, 그 다음에 대중들에게 법을 설했다. 그럼 유래 이해하시겠어요? 그래서 이것이 오늘날도 지켜져야 한다. 마땅히 지켜져야 한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앞으로 가정에서 몇 가지 규칙을 정하고 같이 살려면 가정에도 규칙이 있어야 되겠죠. 몇 가지 규칙이오? 간단하게. 6가지 우리 화합에 대한 규칙만 딱 정해놓고 살면, 이제 한 달에 한 번씩 어때요? 포살회를 하면 되겠죠. 그러면 다 참회를 한단 말이오.
자, 그 다음에 또 다른 참회법이 있습니다. 이게 자자란 말이오. 이 자자라는 것은 딱 생활을 함께하는 사람에게만 해당이 됩니다. 같은 규칙을 갖고 있었더라도 멀리 떨어져서 모르는 사람하고 하는 게 아니라, 생활을 같이 한 사람, 즉 부처님 당시 같으면 안거, 그러니까 우비 때, 비가 오면 5명이든, 10명이든, 20명이든 한군데 모여 산다 이 말이오. 움직이지 않고.
이 안거가 끝나는 날, 우기가 끝나는, 안거가 끝나는 날, 이게 7월 백중날이란 말이오. 지금은 추우니까 겨울 안거, 여름 안거, 이런 게 있지만, 인도에는 무슨 안거밖에 없다? 우안거, 비올 때 밖에 없단 말이오. 끝나는 날, 그러니까 지적해주는 거예요. 둘러앉아서. 그런데 이것은 수행자가 아니면 좀 어렵겠죠. 잘못하면 이게 뭐가 되요? 비판이 될 수가 있죠.
“너 잘못했다”고 서로 비판하면 이것은 수행자의 태도가 아니잖아. 그것을 넘어서서 상대를 도와주는 거요. 이게 자자다. 이 말이오. 지금 우리는 포살은 할 수 있을 지언정, 자자를 하려면 공부가 더 되어야 돼. 안 그러면 타인을 정말 사랑으로 지적해주기도 어렵고, 또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정말 고맙게 거울로 받아들여야 되는데,
“너는 뭐 잘하노?”
“네 차례 되면 두고 보자.”
“네가 그런 생각하고 있었구나.”
이렇게 거꾸로 오해를 사고,
그 잘못을 지적받으면 기분이 나빠서 억울하고 분해서
“나는 잘한다고 했는데”
이런 생각으로 해버리면 자자를 안해야 되요.
할 수준이 못된다. 서로가. 자, 자자는 어떻게 하느냐?
『대중들이여, 들었으라. 오늘은 자자가 있는 날이오. 만약 대중들에게 이의가 없다면 승단은 자자를 베풀어야 하오. 』
대중이 “좋습니다. 이의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되고, 침묵하면 늘 뭐다? 승낙하는 거란 말이오. 자, 그럼 한 사람씩 일어납니다. 10명이 둘러앉아 있거나, 20명이 둘러앉아서 자자를 하면 한분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승단에 대해 자자를 행하노니 나에 대해 무엇을 보고, 무엇인가 듣고, 또는 나에게 의심을 지니신 분이 있다면, 대덕들이시여, 저를 가엾이 여기서 그것을 말씀해 주소서. 죄를 알면 그것을 제어하오리다.』
“정말 나를 불쌍하게 여겨서, 나를 위해서 여러분께서 본 것이 있고, 들은 것이 있고, 아는 것이 있다면 저의 잘못에 대해서 제발 좀 지적해 주십시오.” 하고 공손하게 청하죠. 그러면 대중들은 말할까? 말까? 할까? 말까? 이렇게 망설이는 게 아니죠. 망설이면 “저게 또 얘기하면 또 어떻게 반응할까?” 이런 걱정이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그죠? 그래서 진지하게 청하고 대중들은 자가기 본 대로 느낀 대로 얘기를 하죠.
그럴 때도 조건이 있어요. 반드시 계율에 근거해서. 그냥 “너는 평소에 좀 게으르더라.” 이런 것은 안 됩니다. 아시겠어요? 계율 몇 장 몇에 근거하면 이렇게 이렇게 하기로 되어있는데, 당신이 아무 날 아무 시에 이렇게 하는 것을 내가 봤는데, 그것은 당신이 혹시 놓친 거 아닙니까?
그럼 본인이 딱 알아차리죠. “아. 예. 감사합니다. 그때 제가 그것을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고마워요? 안 고마워요? 고맙지. 이래서 탁마_서로 닦는다 그래요. 그런데 사실은 안 그랬는데, 이 사람 본 사람이 혹시 또 착각하거나 오해를 할 수도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그러니까 무조건 잘못했다고만 하는 게 아니란 말이오.
“저는 그때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이럴 때 “아, 나 잘못 안했어.” 우겨서도 안 돼요. 아시겠어요? 뭔가 이렇게 오해가 생긴 것 같으면 이렇게 자기 해명을 하면 본 사람은 “아, 제가 잘못 봤군요.” 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니오. 당신 그때 그렇게 했습니다.” 이렇게 찾아나가야 되는데, 잘못하면 이거 분쟁이 생길 소지가 있겠죠. 여기에 바로 무아집이 되어야 된다.
설령 내가 잘못을 행하지 않았더라도 그 사람이 오해살 일만 갖고도 참회를 할 만하고, 저분이 스스로 잘못이 없다는데 굳이 그것을 잡고, 그를 위해서 지적해줬는데 미처 못 알아 들으면 끝내야지, 그것을 갖고 우길 이유가 없죠.
지난번에 제가 승단이 계율을 한 사람 어겼다고 그러고, 한 사람은 안 어겼다고 그래서 분열이 일어났다는 얘기, 시작할 때 했죠? 이렇게 될 소지가 있다. 이것이 자자다.
그래서 우리 정토회에서는 아주 소수만, 포살은 좀 더 넓게 행하지만, 자자는 아주 소수만, 한 20여명 되는 소위 정토회 중심 회원만 현재 자자를 하고 있거든요. 그래도 자자를 하고 나면 꼭 1년에 한두 명은 자자의 상처 때문에 탈퇴를 하든지, 중도 포기를 하든지 이런 게 생겨요.
그러니까 자자라는 것은 대충하면 자자가 아니겠죠. 아주 분명하게 수행적 원칙에서 딱딱 지적을 해나가니까 스님도 원래 자자를 받아서 고쳐야 될 게 7가지. 반말을 가끔 찍찍 잘한다. 전화를 해서 “법륜입니다.” 이렇게 안하고, “난데.” 하든지 아무 말도 안하고 “누구 바꿔라.” 이렇게 하는 버릇이 있다는 거요. 건방지기 이를 데 없죠. 이런 식으로 해서 7가지가 있어요. 자주 아프다. 그래서 다른 사람 걱정을 끼치는 것도 큰 죄다.
그러면 이런 것들을 딱 벽에 붙여놓고, 7개를 써놓고, 늘 보죠. 오늘도 보면 안 지켰어요. 버릇이 되니까 “아, 이거 정말 반말 안하고 경어를 쓰자.” 해놓고도, 하도 가까이 오래 살아놓으니까, 공적인 자리에서는 쓰지만 사적으로만 가면 어때요? “네가?” 이런단 말이오. 그러니 누가 그래요. “실컷 반말 해놓고 끝날 때만 경어를 쓴다.”는 거요. 예를 들면 이렇게 받게 된단 말이오.
그러면 그것을 받아서 늘 살펴야지요. 그죠. 원래 또 지적 받는 것은 몸이 늘 불편해서 사람들이 지압한다고 이렇게 했으니, 스님이 사람들이 문 열고 들고 왔을 때 지압 받는 게 보기가 안 좋다. “아, 그렇겠다.” 아플 때만 생각하면 별거 아니지만 남이 봤을 때 “ 아, 그거 참 안 좋겠다.” 그러면 이런 것들을 딱 해야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우리가 지켜나갈 때 그 공동체가 화합을 이룰 수가 있다.
그런데 이런 지적을 받고 “아니, 요게 말이야 어따 대놓고 스님한테 그런 소리나 하고 있어?” 이렇게 생각하면 어때요? 그것은 같이 살기가 어렵겠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가정에서도 그런 비판을 수용해 낼 수 있으면 아이들도 엄마한테 할 말이 있을까? 없을까? 할 말이 다 있어. 그럴 때 야단치면 수긍 안하면 문 탁, 닫고 들어간단 말이오. 그게 무슨 소리라고 했죠? 문을 꽝 닫고 들어가서 문을 콱 잠그는 게 "니나 잘해라." 이 말이오. 그 말을 차마 못하니까. 그러니 이런 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할 거냐?
자, 그러면 포살과 자자를 통해서, 즉 참회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들의 근본 목적으로 끊임없이 나아간다. 그러니까 참회는 중요한 수행이겠죠? 예. 그런데
참회는
수행의 아주 기초, 기본이면서
또 수행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다.
참회하지 않으면 즉, 수행을 참선하네. 경 읽네. 뭐 하네 이러면서 다른 사람의 수행, “참선도 안하는 게.” “경도 모르는 게.” 이렇게 남을 멸시하는 경우가 많고,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 자체는 이미 수행이 아니다.
여러분들이 시어머니가 어디 산에 가서 바위 밑에 촛불을 켠다고 ..한다고 무시하고, 미신이라고 이러면 안 되겠죠. 그것은 그 사람에게는 뭐다? 중요한 신앙이다. 뭐해야 된다? 존중해야 된다. 그러나 그것보다 여기 더 좋은 길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제시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를 탄압하고, 무시하고, 그로 인해서 그가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 남을 해치지 않는 이상. 그것은 폭력이다. 정법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을 해친다.
자, 그 다음에 수행법은 또 더 있겠죠. 그러나 오늘은 여기서 여러분들이 삼귀의 오계와 그다음에 참회를 통해서 공부를 한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요. 지금까지 공부한 것만 갖고도 그럼 정토회에서는 어떻게 수행을 하느냐? 우리가 지금 정토법당에 다니잖아. 법문 들으러 왔죠. 여러분들이 다른 종교에 다니거나, 또는 다른 절에 다니거나 그것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럼 여기서 어떻게 수행을 하느냐? 여기서는 이렇게 수행을 한다. 요것을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맨 먼저 시작을 어떻게 하느냐? 삼귀의로 시작을 합니다.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합니다.
부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귀의합니다.
(하면서 절을 한번 하는 거요. )
(또 일어나면서)
부처님 법 만난 것을 기뻐합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 돌아옴을 알아
부지런히 정진하겠습니다.
부처님 제자 됨이 자랑스럽습니다.
이 땅에 고통 받는 모든 중생을 구원하는 보살이 되겠습니다.』
요렇게 삼귀의를 먼저 합니다. 요게 ‘내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을 먼저 딱 방침을 잡아요. 그리고 수행한다 할 때 수행이 뭐냐? 하는 원칙을 딱 잡고 있어야 된다. 즉,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와 나에게 돌아옴을 알아 부지런히 정진하겠습니다.” 하는 것을 좀 더 자세하게 쓴 게 고 다음에 있는 수행문이다. 이 말이오.
『모든 괴로움과 얽매임은 잘 살펴보면 다 내 마음이 일으킨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괴로움과 얽매임이 밖으로 부터 오는 줄 착각하고,
이 종교 저 종교, 이 절 저절,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니며 행복과 자유를 구하지만 끝내 얻지 못한다.
그것은 이.. 도는 밖으로 찾아서는 결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일어난 어떤 괴로움일지라도 안으로 살펴보면
그 모든 괴로움의 뿌리가 다 마음가운데 있고,
그 마음의 실체가 본래 공한 줄 알면 모든 괴로움은 저절로 사라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일으킨 한 생각에 사로잡혀
옳다. 그르다. 모양 짓고 그 모양에 집착해서 온갖 괴로움을 스스로 만든다.
한 생각 돌이켜서 이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면 모든 괴로움과 얽매임은 즉시 사라진다.』
그러니까 매일 아침에 수행이 뭔지 원칙을 이렇게 딱 잡는단 말이오. 그리고 수행에 들어가는데,
전통적인 불교수행법은 3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계정혜 삼학이다. 이렇게 말해요.
계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원칙, 기준을 말하고,
정이라는 것은 바로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수행,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혜라는 것은 이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사물을 올바르게 보는 지혜를 말하는 거죠.
그러니 첫 번째 계행을 청정히 한다. 계행을 청정히 한다는 것은 뭘까? 잘못을 뉘우치는 게 계행을 청정히 하는 거겠죠. 그러니까 첫 번째가 참회다. 참회라는 것은 계행을 청정히 하는 거다.
『화나고 짜증나고 미워하고 원망하는 이 모든 것은
밖으로 살피면 상대가 잘못해서 생긴 괴로움인 것 같지만
안으로 살피면 ‘내가 옳다’는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일어난 것임으로
모든 법에는 본래 옳고 그름이 없음을 깨달아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때
모든 괴로움은 사라지고 온갖 업장은 녹아나는 것이다.』
이렇게 원칙을 잡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하느냐?
일어나서 108배 절을 합니다. 108배 절을 하면서 각자 가지의 기도문, 수행문에 집중해서 절을 한다 이 말이오. 그냥 하면 그래도 좋은 점이 있죠? 다리 운동. 온몸운동이 된다 이 말이오. 안하는 것 보다는 낫다. 그러나 수행은 마음을 다스리는 거고, 마음을 청정히 하는 거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다 각자의 뭐가 필요하다? 수행문이 필요한 거요. “우리 아들 잘 되게 해주십시오.” 이게 수행문이 될까? 아니죠. 자, 그러면 수행문은 각자의 경우, 인천 사람은 동쪽으로 가고, 수원 사람은 북쪽으로 가듯이 수행문은 각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죠. 그러나 다 서울 가는 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다. 근본으로 보면 다 똑같고, 인연을 따라서 보면 다 틀린다.
한 예로 남편이 술 먹고 와서 행패 피우고, 그래서 10년 20년 30년이 지나도 안 고쳐진다. 잔소리해도 안 고쳐지고, 굿을 해도 안 고쳐지고, 절에 가서 100일 불공을 해도 안 고쳐진다. 그런데 누가 100만원만 주면 고쳐준다면 100만원 주고라도 고치겠어? 안 고치겠어? 고치겠죠.
그러니까 절에 다가 보시금 100원 내고 “스님, 어떻게 좀, 우리 남편을 위해서 기도 좀 해주세요. 어떻게든 저것 좀 고쳐야 되겠는데.” 그러면 “부처님, 부처님, 우리남편 좀 술 좀 끊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하잖아요. 이게 다 우리가 하는 일이죠. 보통. 돈까지 100만원 보시하고. 매일 108배 절하면서 남편 술 끊어달라고 기도까지 했는데도 술을 먹고 오니 화가 더 날까? 덜 날까? 더 나겠지.
그러니 이런 분을 딱 만났을 때도 그런 분도 경우에 따라 다 틀립니다. 그러나 한 예를 든다면 이런 분은 어떻게 기도문이 주어질 수가 있느냐? "부처님, 관세음 보살님, 술은 우리 남편에게 보약입니다." 이렇게 기도문이 탁 주어졌어. 그러면 절을 하면서
부처님, 관세음 보살님,
술은 보약입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그러면 공부를 하다가 탁 알게 되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마음에 있는 그 30년간 헐떡거리던 괴로움이 없어진다.
그러면 이렇게 기도문을 갖고 절하는 게 있고, 행동으로 어떻게 해라? 그것은 매일 술상을 차려서 남편이 퇴근하면 많이 드시고 해장국을 끓여드릴 것, 이게 계율이에요. 하나의 실천 프로그램이란 말이오. 절을 할 때는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좀 적게 먹고 온 날은 적은 부문만큼 드리고, 안 먹고 온 날은 많이 드리고. 왜 그래요? 보약이니까. 빼먹으면 되요? 안 돼요? 보약이니까 빼먹으면 안 되겠죠. 그러면 여러분들이 생각하면 전혀 다른 방식이죠. 그런데 처방은 금방 효력을 나타내죠. 남편은 술을 그냥 먹고 있지만 나는 이미 괴로움이 사라지고 세월이 흐르면 남편 술도 줄고 이러죠.
그런데 그렇게 딱 차려주면 남편이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면 좋겠지. 그런데 뭐라고 그러냐? "이게 미쳤나?" 이러면서 술상을 발로 차버린단 말이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게 아무한테나 되는 건 줄 아나? 저놈의 첨지는 원래 안 되는 거야.” 그래서 그것을 한번 하고 치워버린다. 그러니까 수행은 지속적으로 하는 거예요.
발로 차면 이튿날 차려놓고, 차면 또 차려다 놓고.
일단 한번 법이 떨어지면
그냥 하는 거요.
되고 안 되고를 논하면 안 돼요.
타기로 했으면
넘어지든 안 넘어지든 그냥 타는 거요.
그럼 일정하게 시간이 지나면
우선 자기가 편안합니다.
먹는 술은 그냥 먹되 술 갖고 시비할 일이 없잖아. 보약 먹는 데 뭐. 더 시간이 지나면 남편의 술이 줄어듭니다. 처음에는 “왜 내가 이 짓해야 되느냐? 스님도 결국은 남자편이네.” 이러다가 10명 중에 8명은 아예 안하죠. 하는 사람 두 사람 중에 한명쯤은 어때요? 한번만 발로 차버리면 끝나죠. 그런데 그것도 끔찍이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게 하면 자기가 편안 지고 세월이 지나면서 그 기적같이 남편 술이 줄어들어.
그러면 스님한테 와서 절을 탁, 하면서 이제 그때야 스님이 도사같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요. 그러다가 봉투에 돈도 가득 넣어 고맙다고 갖다 주면서, 여기는 보시가 다 그런 거요. 그런데 이렇게 와서 “아, 고맙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드디어 부처님 가피가 일어났습니다.” “무슨 일이오?” “우리 남편이 술을 드디어 줄였습니다.” 끊은 게 아니라 줄였다는 거요.
그러면 제가 뭐라고 그러겠어요? “아이고 보살님 그동안에 고생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보살님 요즘 기도 안하시군요.” “스님, 무슨 얘기에요? 기도를 안 하다니요. 열심히 하고 있는데.” “기도 안하는데요.” 스님이 108배 하라는데 내가 요즘 기분이 좋아 하루에 300배씩 한다는 거요. 금강경 읽으라는 말도 없는 데 금강경도 독송하고 이런 다는 거요.
“보살님은 수행을 안 하시니까, 또 괴로움에 과보를 받을 겁니다.” 그러면 억울한 거요. “저 스님은 참, 이상한 스님이야. 스님에게 고맙다고 가서 인사를 했는데 인사도 받을 줄 모르는 스님이오. 나무라기만 하고.” 이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조금 있으면 찾아오죠.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도로 아미타불이에요.” 이렇게. 왜 그렇게 될까? 남편이 술이 주는 것을 보고 “영험이 왔다. 드디어” 이 말은
남의 변화를 통해서
또 기쁨을 얻죠.
이것은 또 뒤집어 진 거요.
그러니 괴로움이 필연적으로 옵니다.
그럼 자연적 “아, 기도 조금만 더하면 끊겠다.” 이런 생각이 들겠죠. 그래서 100배 하던 것을 300배까지 하는 거요. 그럼 이 태도가 이미 바로 수행에선 어긋나버린 거요. 그건 절해야 다리 운동이지 수행이 아니고, 그때는 “보약입니다.” 하고 절을 해도 이미 마음속에는 “술 끊었으면.” 하는 바램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것은 이미 기복이란 말이오. 그것은 욕망의 기도란 말이오. 그러니까 기도 안하죠.
그럼 “아, 빨리 끊었으면 좋겠다.” 싶어 더 열심히 하는데 끊어지는 속도가 자기 속도만큼 안 되겠죠. 그러니 짜증이 나죠. 짜증을 내니 남편이 또 술이 도로 늘겠죠. 그러니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거요.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 듣나봐.
자, 어떻게 수행하는지 원칙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예. 해탈의 길은 열려 있지만, 우리는 그 길로 가지 않는다. 이렇게 계행을 청정히 지킨다.
그다음에 딱 이렇게 108배가 끝나면 그 다음에 자리에 앉아서 명상을 합니다. 즉, 계, 그 다음에 정이죠. 마음을 청정히 하는 수행을 한다. 마음을 청정히 하는 수행에는 정, 마음을 고요히 하는 수행에는 4가지가 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게. 뭐가 있다?
참선이 있고,
염불이 있고,
주력이 있고,
강경이 있다.
이것은 대승불교에서 우리가 전해 내려오는 거고, 남방 불교에서는 뭐가 있다? 비파사나, 선이라고 하는 게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난 천일 동안은 염불 수행을 했고, 이번 천일 동안은 그 가운데 어느 걸 하나 마찬가지니까, 남방의 비파사나 선을 그냥 여기서 종교적인 냄새를 좀 덜 내려고 그냥 명상이다. 이렇게 해서 한단 말이오. 자, 그럼 명상법은 또 나중에 얘기를 하고요.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요렇게 명상을 딱 한 뒤에 그 다음에 뭘 하겠어요? 한 10분이나 15분 정도하고, 그 다음에 경전을 읽습니다. 책이 있어서 매일 며칟날 읽을 항목이 인쇄가 되어 여러분에게 나눠진단 말이오. 그러면 3월 25일. 펴면 거기에 부처님 경구가 있단 말이오. 그것을 3번 읽는 거요. 요게 계정혜란 말이오.
경전의 뜻을 이해한다는 것은
지혜를 닦는 거다.
요렇게 공부를 하고는 그다음에 정토행자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붓다의 가르침에 맞는 세상, 붓다의 가르침의 원칙에 맞는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가고자 하는 그런 원을 세운 사람을 우리가 정토행자다. 이렇게 하니까, 요것은 정토행자로서 원을 세운 사람에게는, 요 전까지는 누구나 다 요렇게 해야 된다. 그러면 지금까지 가르친 것을 정리한 것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지금 우리 인류는 인간성상실 공동체붕괴 자연환경 파괴라고 하는 중대한 위기에 처해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 속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첫째, 연기법을 우리의 세계관으로 삼는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존재의 상호 연관성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내가 죽으면 나도 죽고
네가 살면 나도 산다.
네가 불행하면 나도 불행하고,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는 연기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함께 살고 함께 행복해지는 이 길을 추구한다.
여러가지 꽃들이 모여 하나의 화단을 이루듯이
각자의 다양한 개성이 모여 조화와 균형을 이루게 하여
시기와 질투를 뛰어넘어 사랑을
대입과 경전을 뛰어넘어 화합을,
투쟁과 전쟁을 뛰어넘어 평화를
이루는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고자 한다.
둘째, 부처님과 보살을 우리 삶의 모범으로 삼는다.
평생을 가사 한 벌과 바루 한 개로 걸식하며 살아가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을 본받아
적게 먹고 적게 입고 적게 자며,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고 살아가는 구도자의 자세를 갖는다.
나아가 중생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스스로 사바세계와 지옥 속으로 뛰어들어 중생을 구제하시는
대비관세음보살님과 대원지장보살님의 원력을 본받아
일체 중생을 구원하는 대승보살이 되고자 한다.
셋째, 무아, 무소유, 무아집을 수행의 지표로 삼는다.
정토세계를 이룩하기 위하여
나를 버리고, 내 것을 버리고, 내 고집을 버리고,
오직 중생의 요구에 수순하는 보살이 되고자한다.
그리하여 한 생각 돌이켜 사로잡힘에서 벗어나
괴로움도 없고 얽매임도 없는 대자유인이 되고자한다.
나아가 인류에게 불어 닥친 이 위기를 극복하고,
행복한 인생, 평화로운 사회, 아름다운 자연을 일구어
살기 좋은 정토세상을 만들고자 한다.』
이렇게 우리가 이제 새로운 각도에서 현대적으로 우리가 불법의 근본 가르침 속에서 우리는 이렇게 나아가고자 한다. 그리고 끝날 때 사홍서원을 합니다.
『이 땅에 고통 받는 중생이 한사람도 없는 정토세계를 이루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괴로움과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수행정진 하겠습니다.
부처님 법 만난 것을 기뻐하며 모두 배우겠습니다.
일체 중생과 더불어 꼭 수행하겠습니다. 성불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도가 끝나면 원칙이 있어요. 하루 천 원씩 보시하기 운동입니다. 이 일에 쓰기 위해서. 그래서 집에다가 요만큼 크리넥스 통 같은 것을 마련해 놓고 하루 천 원씩 집어넣습니다. 기도 딱 끝나면 바로 집어넣어 버려요. 그러면 100일 지나면 얼마 모일까? 10만원 모이겠지. 그럼 이것을 100일 마다 제출하고, 새로운 교재를 받아서 또 정진하고 수행일지 쓰고.
이렇게 그날 수행하고 끝나면 수행일지가 나가요. 책이 나가면 거기다 자기 수행하고 느낀 점, 반성할 점 쓰고, 그다음에 천원을 보시를. 이렇게 아침에 5시에 일어나 6시까지 집에서 그냥 하면 된다. 이 말이오. 우리 절에 있는 사람은 절에서 하고, 집에 있는 사람은 집에서 하고, 여행가면 여관에서 하고, 교회 볼일이 있으면 교회에서 하면 되겠죠. 이렇게 한다 이 말이오.
그리고 봉사활동을 한다. 하루 한 가지 좋은 일. 이렇게 정해져서 천일기도를 하니까, 여러분 중에도 이런데 동참을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천일기도에 입제를 하시면 된다. 이것은 개인 복 구하기 위해서 모인 게 아니고, 그래서 결사라 그럽니다. “아, 이런 일에 나도 동참해서 같이 해보겠다.” 이렇게 하는 거요. 요기에 소속된 사람만 하는 게 아니고 종교를 넘어서서 다른 종교, 일반, 청년 학생, 이렇게 같이 해나가고 있다. 그러면 여기에 동참하고 안하고를 지금 내가 얘기하려고 내가 읽어준 게 아니에요. 그러면 공부를 배우고 어떻게 수행을 하는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예. 이렇게 우리가 공부를 해나가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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