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말기. 영제의 외척인 하진은
키가 큰 미인, 누이동생 ‘하태후’라는 배경 덕에
대장군까지 승진하며, 권세를 누렸습니다.
하진은 황건적의 난 때 대장군이라는 직책으로서
당고의 난 이후, 환관들에게 억류되었던
청류파 인사들을 구하는데 앞장섰고
점차, 청류계 사이에서 명망을 넓히며
십상시들마저 압박하는 위치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황건적의 난을 진압한다거나
청류파 인사들을 환관들로부터 보호해 주는 모습과는 별개로
하진의 개인적인 권력 욕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영제와 하진의 누이동생 하 황후 사이에는 황자 유변이 있었는데
영제는 유변보다 왕씨 사이에서 낳은 유협을 더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왕씨의 본명은 왕영, 통칭 왕미인으로 불리는 후궁으로
지체가 높은 집안의 출신이며
총명하고 영리하여 궁중에 선발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황제의 관심은 하태후와 유변으로부터
왕미인과 유협에게로 옮겨갔습니다.
그러자, 하태후는 자신의 아들인 유변이
앞으로 왕위 자리를 빼앗길까 봐
왕미인에게 맹독을 지닌 새, ‘짐새’의 독을 먹여 독살시켰습니다.
영제는 하태후의 질투를 못 마땅히 여겨
당장에 황후의 자리에서 폐하고 처형하려 했지만
이미 궁궐은 하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어
조정의 중신들과 환관들의 변호로 인해
하황후는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게 된 유협은
할머니인 효인황후 동씨
통칭 ‘동태후’의 손에 의해 양육되었습니다.
황자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자 조정의 분위기는
태자로서 하태후의 아들인 유변과 동태후의 손자 유협 중에서
한쪽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어졌습니다.
유변이 태어나기 전 몇몇 어린 황자들은 병으로 요절했는데
이 때문에 하태후는 아들을 보호하겠다는 일념으로 미신을 신봉하여
유변을 궁중이 아닌 궁정 밖, 한 도사의 집에서 자라게 했습니다.
이에 반해, 유협은 궁궐 내에서 할머니 동태후 손에 자라면서
궁중 예의를 몸에 익히며, 예의 바른 아이로 자랐습니다.
영제는 앞으로 태자를 책립하는 데 있어
당연히 장남이면서 동시에 조정 내 실력자인 하진을 고려해
유변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도사의 집에서 자란 유변의 행동은 너무 제멋대로였고
나이는 어리지만, 유변보다 훨씬 총명한 유협을 보고 있자니
영제는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태자를 얼른 책립하라는 주변의 눈치에도 불구하고
영제는 결정을 정하지 않고, 잠시 일을 뒤로 미루었습니다.
아직은 황자들의 나이가 어리기도 하여
유변과 유협을 천천히 지켜보기로 했던 겁니다.
원래대로라면, 장남인 유변이 태자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지만
영제는 만일에 대비하여 동태후의 조카
‘동중’을 표기장군에 임명했습니다.
즉, 유변을 확고히 밀고 있는 하진에 대응하여
동태후와 유협에게도 힘을 실어 넣어주는 방편으로서
동중을 대장군의 다음 지위인 표기장군으로 임명했던 겁니다.
그리고, 최근 신설했던 서원팔교위에는
대장군조차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는데
서원팔교위를 통솔하는 자는 무용을 갖춘 환관 건석이었습니다.
참고로, 건석은 채널 내 재생목록 삼국지 10편에서
잠시 그 이름이 등장했었습니다.
바로 조조가 낙양북부위 시절
신분을 막론하고 법률을 어긴 자에 대한 처벌을 시행하여
곤장을 때리다 죽은 사람이 건석의 숙부였던 겁니다.
그때의 사건과는 별개로 건석은
오랫동안 황제 곁에 있으면서, 영제의 마음을 알아차렸고
지금 영제가 하진과의 거리를 두고자
서원팔교위와 동태후를 이용하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하진 또한 자연스레
건석 등을 포함한 환관들을 경계하였고
원소 등의 사대부들 인사들과 세력을 다져갔습니다.
한편, 양주의 난에서, 서량 반란군이 진압된 후에
조정에서는 군대를 와해시키라고 했지만
동탁은 자신의 군대는 돌려주지 못한다고 버티고 있었습니다.
동탁은 평소, 현대 사회의 로비처럼
뇌물 관리를 통해 궁궐 내에 가까운 사람들이 많았는데
동태후 및 표기장군 동중과 촌수는 멀어도 친척인지라
제멋대로 행동을 하는 데 있어,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즉, 궁정 내에서는 하태후와 후원자인 하진이
궁정 밖으로는 동태후의 지지 세력인 동탁이
언제든 권력의 중심에 설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189년, 황제는 서원팔교위를 창설함으로써
조정 내의 환관과 사대부 대립을 조정하고
군대도 자신이 직접 장악하며,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근래 들어, 한수가 이끌던 서량의 난도 진압되었고
장순, 장거의 난도 유우가 해결하였으며
남쪽 구성의 난은 손견이 정리하여
후한은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189년 봄을 알리는 소식과 조정의 안정화로
천하가 평화로워지는 듯하였으나
갑자기 영제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병으로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직전, 건석에게 유협을 잘 부탁했습니다.
영제는 공식적으로 유협을 후계자로 지목한 건 아니었지만
건석은 영제의 마음을 헤아려
조정에서 제멋대로 날뛰는 하진과 하황후를 없애고
황제로 어린 유협을 세우고자 계획했습니다.
건석은 20년 전, 영제가 즉위할 때의
혼란에 빠진 궁궐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169년, 영제가 13세의 나이로 황제로 즉위하자
당시, ‘두태후’가 외척인 두무와 손을 잡고 실권을 차지하며
환관들을 모조리 없애려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두무가 이끄는 외척군은 사전에 계획이 발각되었는데
이때, 건석이 통솔했던 환관지지 부대인 환관군이 두무를 죽이며
‘2차 당고의 금’을 거쳐, 십상시의 세상이 왔었습니다.
20년이 지난 189년, 영제가 죽으면서
조정의 분위기는 ‘당고의 금’ 때와 같은 상황으로
이번에는 두태후가 아닌 하태후가
두무가 아닌 하진이
권력의 중심에 서고자 발톱을 내세웠습니다.
심지어, 하진 곁에는 신흥 장수로 떠오르는 원소가
사족들 사이에서 인정받으며, 사대부들이 단단히 결집하여
건석은 상황이 더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여겼습니다.
건석은 황제의 상사(喪事)를 뜻하는 ‘대상’이 난 사실을 감추고
하진에게 앞으로 후사 문제에 대해 의논한다는
가짜 조명을 보내, 영제의 거처로 불러들였습니다.
건석은 병사들을 미리 숨겨두어, 하진이 입궐하면 주살하려 했지만
건석의 부하 중에 ‘반은’이라는 자가
평소 하진과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하진이 입궐할 때 눈짓을 보냈습니다.
낙양에 입성하기 전부터 백정 생활로 산전수전을 겪으며
눈치보는 사회생활을 겪어왔던 하진은
반은이 눈짓을 보내자 무언가 이상하다고 눈치챘고,
아프다는 핑계로 궁을 빠져나왔습니다.
하진은 다른 장소로 이동하여, 측근으로부터
뒤늦게 궁중에서 변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제가 죽었다는 국상이 발표되자
공식적인 후계자 언급이 따로 없었기에
후계자로는 유변이 후한 13대 황제 소제로 즉위하였습니다.
소제는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나이에 즉위하여
정사를 맡을 수 없자, 모친인 하태후가 정사를 대리하였고
하진과 원소의 숙부인 원외가 정사를 보좌했습니다.
하진은 대장군 때보다 한층 높은 권력을 차지하였으며
평소, 십상시가 나라를 망치는 근본임을 여겨
가장 먼저 건석을 없앨 계획을 세웠습니다.
오늘은 삼국지 29번째 시간으로
영제의 죽음과, 그의 사후
유변 세력과 유협 세력간의 대립하는 내용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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