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건적의 난이 진압되었을 무렵
기도위로 활약했던 조조는
제남상으로서 빼어난 행정 능력을 보였으나
조정에서는 조조의 재능을 탐탁지 않게 여겨
제남상 자리를 박탈시켰습니다.
조조는 중앙 정부에서 잠시 벗어나
고향에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조조와 친한 친구 사이였던 원소는
대장군 하진의 신임을 얻어 ‘호분중랑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중랑장이라는 직책은 부서에 따라
황제의 호위와 궁중의 경비를 맡거나
혹은 밖으로 정벌을 나가는 역할 등을 맡은 직책이었습니다.
한 예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황보숭은 좌중랑장, 주준은 우중랑장,
노식은 북중랑장, 동탁은 동중랑장을 임명받았습니다.
황건적의 진압 후에는 인사이동이 일어났는데
중랑장 중에서 원소는 주로 황제의 근위대장 역할을 하는 ‘호분중랑장’으로
젊은 나이의 무관직으로서는 파격적인 인사였습니다.
원소는 고조부 ‘원안’ 때부터
이른바 사세삼공(四世三公) 이라는
최고의 명문가 집안 출신이었지만,
집안에서는 천출로서 형제들에게 제대로 가족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고조부 원안은 현대 사회의 수상 격인 ‘사도’를 지냈으며
증조부 원창은 감사원장 격인 ‘사공’을 지냈고
조부인 원탕은 삼공 중에서도 최고위직인 ‘태위’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원소의 윗대에서 원봉과 원외가 모두 삼공을 지내
사세에 걸쳐 삼공을 배출하여, 당대 최고의 명문가로 거듭났습니다.
원가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소의 할아버지 원탕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장남 원평과 원성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살아남은 삼남 원봉과 사남 원외가 뒤를 이어
원씨 가문을 더욱 번창하게 키워나가면서
원가는 많은 사대부 집안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내용이 복잡해지는데
원소는 원래 조부의 삼남, 원봉의 친자식이었습니다.
이 또한, 기록에 따라 약간은 상이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원소의 친아버지를 원봉으로 보고 있습니다.
원소는 원봉의 첫째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집안에서 무시당했던 이유는
어머니가 원봉의 첩실이자 노비 출신이었던 겁니다.
이 때문에, 동생 원술은 번번히 적자라는 것을 내세우며
자신이야말로 한나라 최강 족벌인
원씨의 진정한 후계자라 여기며, 원소를 멸시했습니다.
그러다, 둘째 큰 아버지인 원성이 죽고 나자
원가의 대를 잇기 위해, 원소가 원성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원소는 ‘원성의 적자’로 신분이 세탁되었습니다.
후한 시대 때는 과거 제도가 아닌
추천제인 향거리선제로 사람을 채용했기 때문에,
노비의 자식들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출세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원소는 가문이 사세삼공으로 명문 중에 명문인지라
공식적으로는 원성의 적자로서 신분이 보장되어
중앙 무대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는 원소에게도 큰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고대 사회의 어머니가 천민 출신 첩이라는 사실은
사회적으로 그저 ‘성적 노리개’라는 인식에 불과했고
원술은 이를 두고 원소와 갈등을 빚을 때면
밖에 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원소를 ‘우리집 종놈’이라 깎아내렸습니다.
이 때문에 원소는 이러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유교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원소는 집안의 배경으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고위 관료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20세에 복양현장으로 부임할 때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청렴하고 깨끗하다는 평판이 자자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친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정실부인
즉, 원술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원소는
벼슬을 그만두고 시묘살이를 하며 삼년상을 지냈습니다.
당시에 이 삼년상이라는 제도는
복잡한 절차에 따라 관을 땅에 묻은 후
상주가 무덤 옆에 여막이라는 작은 초원을 지어
약 3년 동안 금주와 고기를 먹지 않으며
중노동을 연이어가는 탓에
체력저하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아
후한말에는 대부분 삼년상을 제대로 하지 않고, 약소화 해나갔습니다.
한나라 때의 삼년상은, 1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
유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조선시대 때도
종종 정식으로 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무리한 삼년상 제도 때문에 아들이 줄초상 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조선 제 5대왕 문종 또한 아버지 세종이 승하한 후
삼년상을 치르다가 심한 스트레스와 기력 부족이
등창으로 이어져, 사망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다시 삼국지 이야기로 돌아가,
원소가 자신의 친어머니도 아닌
집안의 어른 원봉의 정부인이 죽었을 때, 삼년상을 지낸다고 하자
많은 사대부들이 원소의 효심에 감탄했습니다.
배다른 어머니에 대한 삼년상을 끝낸 원소는
이번에는 자신이 입양된 아버지 원성에 대한 삼년상을 또 치르게 되면서
한 번에 6년상을 치르게 됩니다.
삼년상만 하더라도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는데
6년상을 치르는 원소의 이러한 효심은
노비의 아들 출생이라는 세간의 평가를 뒤집기에 충분했고
수많은 빈객들이 원소를 찾아가 호평 일색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원소는 유교 정신에 입각한 6년상이라는 장례를 통해
대다수의 청류파들의 마음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여
궁정 내에서도 환관들과 대척점을 두는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6년상 이후 탈상을 마친 원소는 곧바로 낙양으로 이주했는데
당시, 낙양에서는 ‘2차 당고의 난’이 일어났을 때였습니다.
실권을 잡은 환관들은 수백 명의 당인들을 체포하거나 처형하였고
당인을 보호하던 ‘조란’이라는 영창 태수도 처벌을 받았습니다.
조정에서는 괘씸죄로 조란을 잡아 찢어 죽여, 사대문에 효시한 뒤
당인과 그 보호자에 대한 연좌제가 시행되면서
조란의 5촌 이내 친척들의 관직을 모두 박탈시켰습니다.
이 때문에 낙양에서는 청류파 인사들의 씨가 말라갔고
이러한 환관 천하의 세상에서 원소는
당인이었던 하옹과 함께 당인들을 보호하고 도와주었습니다.
원소가 이렇게 대담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는
‘원가’는 4대에 걸쳐 오랫동안 최고 벼슬직을 유지했기 때문에
환관들인 탁류파와도 가까운 사이였는데 있었습니다.
환관들 입장에서는 원소의 행동을 공론화하면
연좌제를 통해, 원가를 모두 엮어야 했고
그렇게 된다면 원가의 연줄들과도 적대관계가 되어서
원소는 자신이 ‘원씨’라는 점을 철저히 이용하여
되려, 청류파의 대표 격 인사가 되었습니다.
한편, 서량에서 한수와 마등은 계속해서 난을 일으키고
하북에서는 장거 장순이 일어나는 데 이어
188년에는 황건적의 잔당인 곽태가 이끄는 백파적이 일어나
한나라는 더욱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에, 영제는 자신의 직할 친위대 성격의
황제 직속 군인 ‘서원 8교위’를 창설했는데
자신이 직접 통제하겠다는 뜻을 내비치며
스스로에게 ‘무상 장군’이라 칭했습니다.
황제가 장군을 자칭하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로서
여러 갈래로 분산되어 있는 군대를 하나로 통합해
최고의 군권을 가지고 있었던 대장군마저
영제 자신의 직할로 만들 만큼, 불안한 심정을 보였습니다.
영제는 환관들 중에서도 싸움 실력이 있었던 건석을 포함해
능력이 뛰어나다는 장군들을 불러 모았고
여기에는 청류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원소와
고향에 있던 조조도 차출되어, 서원 8교위를 구성했습니다.
오늘은 삼국지 28번째 시간으로
사세삼공의 명문이지만, 천출이었던
원소에 대한 이야기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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