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서 가장 대립 관계에 놓여있는 두 인물
조조와 유비의 첫 만남은 언제였을까요?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의용병을 이끌고 황건적을 토벌하던 중,
전장에서 우연히 조조를 만나지만
역사 기반의 정사 삼국지 기록은
황건적 난 때, 유비의 존재는 매우 미미하였고
조조는 조정에서 주목받는 젊은이로써 기도위에 임명되어
당시, 둘의 만남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웠습니다.
후한 말에는 184년부터 황건적의 난을 비롯하여
서량에서는 양주의 난, 하북에서는 장거 장순의 난 등
여러 차례 중앙 정부를 향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유비는 장거 장순의 난 때 참전하여 반란을 제압한 공으로
기주 안희현의 현위가 되기도 했지만
군의 감찰관인 독우를 폭행한 죄로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 황건적의 난 때 진압된 무리들 중
살아남은 잔여 황건적들이 뭉치면서
또다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대장군 하진은 황건적을 토벌하는데 지원하는 자에게는
누구든 사면해준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이때,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전공을 세우며
또다시, 작은 관직 자리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유비는 관직을 얻고서
얼마 안 가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데
이때의 원인이 바로 조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조조와 유비가
언제 처음 만난 사이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사료나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인데
그나마, 장거 장순의 난이 진압될 무렵이
이 둘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습니다.
위서 무제기에 따르면, 황건적의 난이 끝난 후
조조는 현대 사회 ‘시장’이라 할 수 있는
청주 지역의 ‘제남상’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조조는 한 지역을 통솔할 수 있는 수령 자리를 맡게 되자
평생동안 환관의 손자라며,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아온 평가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 자신의 능력을 보이고자 했습니다.
제남은 전국시대 제나라의 수도였던 곳으로
경제적으로 발달하고, 권위있는 집안이나
환관들의 일가친척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었습니다.
이들을 두고서, 황제의 총애를 받는 무리라 하여 ‘귀척’이라 칭하였는데
제남에 속해 있는 현의 관리들은
귀척들에게 뇌물을 바치기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데 있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조조가 제남상으로 부임하기 전에도
몇몇 국상들이 제남을 거쳐 갔지만
고착화되어 있는 제남의 뇌물 비리 문제를 개선하기에는
귀척들의 눈치를 보느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조는 부임하기 전부터 제남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여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뇌물로 판치는 벼슬아치들을 잡아들였고
많은 관리들을 그 자리에서 면직시켰습니다.
이어, 부패관리들을 대거 숙청하였으며
평소 이들이 백성들을 지켜준다는 명목하에
사당에 제사를 지내는 비용을 강제로 거두었는데
조조는 사당들을 모조리 부숴버리고, 제사를 금지시켰습니다.
제남에 조조가 들어서자 얼마가지 않아
금세, 군내가 깨끗해지고
투명한 통치가 이루어지면서 전국의 관리들에게
제남은 모범 지역이라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하지만, 조조 때문에 오랫동안 제남에서
권세를 누리고 있었던 귀척들이 자리를 잃게 되었고
이는 귀척과 가까운 중앙 정부의 환관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조조는 조정의 뜻에 따라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이후, 낙양에서는 조조가 명성을 떨치지 못하도록
가까이 불러와 영향력이 없는 자리를 권했으나
조조는 몸이 아프다는 것을 핑계로 패국 초현으로 돌아갑니다.
예주 패국은 조조의 조부 집안인 조씨들과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입양되기 전인 하후씨 집안들이 모여 살던 지역으로
한나라 때는 ‘소패’라고 불렸습니다.
이 무렵, 유비는 여러 미관말직을 전전하며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이어갔는데
영웅기에 따르면 조조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쯤
운명적인 첫 만남이 이루어졌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조조는 젊은 시절부터 낙양북부위를 지내면서
돈구현 현령, 조정에서의 의랑, 기도위로 승진하여
전장에서 황건적을 진압하는데 활약하며
제남상으로도 뛰어난 행정가로 전국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하지만, 중앙 정부에서 한나라의 현실을 마주한 조조는
능력없는 영제 사후에는 국가의 혼란이 올 것이라 짐작했고
고향에서 자신의 세력을 다지고자 마음먹게 됩니다.
이때, 조조는 자신보다 여섯 살 아래인 유비를 만나게 되었고
한 명이라도 뛰어난 인재를 모으고자 했던 조조는
유비에게 자신과 뜻을 함께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습니다.
유비가 조조의 수하 형태가 되었는지
혹은 동맹의 형태였는지, 정확한 내용은 알 수가 없지만
이 당시 함께 지낸 조조와 유비 무리에는
관우, 장비, 조인, 조홍, 하후연, 하후돈이 같은 세력 내에 속해 있었습니다.
의기투합했던 조조와 유비의 세력은
몇 개월 혹은 몇 년간은 잘 지내다가
어느 날, 유비는 조조를 떠나 공손찬에게 의탁하게 됩니다.
유비 입장에서 현실적인 계산을 해보았을 때
조조가 유명세를 떨치는 인물이긴 했으나
아직, 공손찬에 비해 그 세력이 너무나 미비했습니다.
유비와 공손찬은 어린 시절 노식 아래
동문으로 수학한 사적인 친분도 있었으며
당시 공손찬의 입장으로서도, 원소와 사사건건 부딪치는데
인근 지역은 유비의 명성이 퍼져나가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유비의 합류는 대환영이었습니다.
또한, 조조가 능력있는 자들을 선호하는 욕심이 커
호시탐탐 관우와 장비를 원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유비에게는 부담이 되었을 것이라 여겨지고 있습니다.
얼마간의 둘의 만남이 이루어진 후
조조는 고향에 돌아와 한적한 곳에 자리잡아
세상을 피하여 독서 등을 하며 은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30대로 접어든 조조는 이제까지는
현실에서 승진하며, 세상에 이로움을 주고자 했으나
이미 한나라는 부정부패가 만연해 기울어가고 있었고
전국 곳곳에서 난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는 앞으로 세상이 혼란해질 것이라 예감하여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사색하기 위해
수많은 글과 책을 읽어가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나라 시대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유가의 경전부터
마융의 주석서, 사마천의 사기, 제자백가 들의 글들을 읽고 고민하며
혼탁한 세상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지 공부해 나갔습니다.
조조는 유교에서 말하는 ‘인의예지’는 그 가르침은 옳으나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성인군자가 아니기에
주관적 판단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국가를 통치하는 기준에서 결함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 시기에 조조가 고향에서 은거 생활을 하며 쌓은 내공은
훗날, 뛰어난 정치 감각과 통치 능력을 이끌어
한나라의 문제점을 수습하는 데 일조하였으며
위나라 초기, 자신이 살아있을 때까지는 안정적인 정국을 꾸렸습니다.
또한, 학식과 무용을 겸비한 조조는
군사적 전략과 능력 면에 있어서도 위나라를 세우기까지
상대하는 대부분의 적 세력이 자신보다 큰 세력을 이겼기 때문에
삼국지 최고 수준의 지휘관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오늘은 삼국지 26번째 시간으로
숙명적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조조와 유비의 첫 만남.
그리고, 황건적의 난 이후
조조의 행적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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