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역사는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함께
최초의 고대 문명을 탄생시켰으며,
1대 파라오인 메네스가 기원전 3100년 경에
상하 이집트를 통합함으로서 그 명맥을 유지해갔습니다.
그후, 1500 간 고왕국, 중왕국 그리고 2번의 중간기를 거쳐
기원전 1570년, 제18왕조의 1대 왕인
아흐모세 1세에 이르러, 신왕국 시대를 열게 됩니다.
제2중간기 시절 150년간 힉소스 인들의 지배를 받았던 이집트인들은
아흐모세 1세와 그의 아들 아멘호테프가
이집트 전역을 되찾으면서 그와 동시에 세력을 확장해
되려, 서아시아의 일부를 차지하기도 했으며
3대왕인 투트모세 1세 때는
북동쪽의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부터 남쪽의 누비아까지
지배 영역을 넓히게 되었죠.
투트모세 1세는 원래 이집트의 장군이었지만
아멘호테프 1세가 후계자 없이 죽고 난 이후에
투트모세가 그 뒤를 이어받았고
그가 재위 기간에 있는 동안에 남긴 업적은
후일 관광지로서 유명해지는 ‘왕가의 계곡’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28년간 영토확장과 왕가의 계곡 공사를 착수하고
기원전 1492년에 병사하게 되는데
옛날의 왕족답게 왕비와 후궁이 많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어머니가 다른 여러 명의 자식들도 다수 있었죠.
그중 잘 알려진 자녀들로는
투트모세 1세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은 투트모세 2세와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대표적인 여성 파라오로 유명해진
하트셉수트가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전통적으로 왕족의 순수 피를 이어가기 위해
남매간의 결혼이 일반적이었으며
투트모세 2세와 하트셉수트도 결혼한 사이였죠.
하지만, 투트모세 2세는 원래부터 몸이 약했고,
제18왕조 4대왕으로 등극하고서는
3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당시, 투트모세 2세와 하트셉수트간의 사이에는
딸 네페루레만 있있고, 아들이 없었는데요.
투트모세 2세는 이세트라는 후궁을 맞아 아들을 낳은 자식이
후계자 투트모세 3세였습니다.
하지만, 투트모세 3세는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니,
큰어머니라 할 수 있는 하트셉수트가 섭정을 맡게 되었죠.
이후, 세월이 지나 하트셉수트는 섭정에서
아예 얼굴에 수염을 붙이고는 5대 파라오로 등극하기도 했으나
그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고
섭정을 하다 자연스럽게 주요 권력을 차지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투트모세 3세는 6번째 파라오였는데
54년에 달하는 긴 재위기간 동안
절반에 가까운 21년을 하트셉수트가 공동파라오로서 실권을 쥐고 있었죠.
하트셉수트라는 이름은 ‘가장 고귀한 숙녀’라는 의미였지만
당시 시대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남성성을 강조해야 했는지
수염 등을 비롯한 기존 남자 파라오의 장식을 달고 있었고
장제전에 조각된 하트셉수트는 남성으로 느껴질 정도로
다른 여성 조각들보다 작아진 가슴으로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하트셉수트는 이전 왕들이 확장한 영토에서
많은 보물들과 자원 확보들을 통해
이제는 부유해진 이집트로 인식하여
전쟁 없는 평화로운 시대로 이집트를 꾸려가고자 했습니다.
주변국인 푼트, 레반트 등과의 무역에도 신경을 써
부국으로서의 위상을 높이며
군사적인 방법이 아니면서도
더 이상은 힉소스의 잔재들이 이집트를 넘보지 못할 만큼
경제 강대국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하트셉수트의 치세는 이집트 역사 전체에서도
모든 여성 파라오 중에 가장 번영하고
성공적인 치세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트셉수트가 현시대에서 유명한 이유로는
그녀의 장제전을 꼽을 수 있는데
이 신전은 오랜 옛날 제1중간기의 대혼란을 잠재우고
중왕국 시대를 열었던
제11왕조 멘투호테프 2세의 장제전을 모델로 삼기도 했었죠.
이에 관련된 영상은 10분 세계사
고대 이집트 역사 4화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하트셉수트의 거대한 장제전은
‘장엄 중의 장엄’ 의 뜻을 지닌 ‘제세르 제세루’ 라고 말로 불리우게 되는데
이곳은 훗날 현대 시대 이르러
콥트 교회의 수도원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콥트교는 이집트를 중심으로 교단을 형성해 온 기독교 분파로
현재 이집트 인구의 약 10%가 콥트교이기도 합니다.
기원전 15세기에 이집트를 통치했던 하트셉수트는
전쟁은 멈추고, 평화로운 경제 부흥을 꿈꾸며
부의 축적과 아름다운 신전을 짓는데 열을 올렸고,
3층 건물의 장제전은 고대 이집트 건축의 걸작으로 손꼽히게 됩니다.
그녀의 장제전은 힉소스인들로부터 영토를 되찾는데 결집하게 해준
‘태양신 아문’과 하트셉수트 자신의 영혼을 위한 이중 기능을 가진 건물로
신전과 사당의 역할을 동시에 맡았죠.
1961년부터 폴란드 고고학 연구소에서 재건되기 시작했으며
여왕의 치적과 생애를 미화한 부조들이 많았지만
추후 그녀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던 세력들로 인해
많은 조각상들이 파괴되기도 했습니다.
재구성된 작품들은 현재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에 있기도 하죠.
이 건물을 지은 건축가 세네무트는
하트셉수트가 가장 좋아하는 신하이자 동시에 연인이었다고도 하며
그로 인해 세네무트가 죽게 된 이후에는
여왕의 무덤과 가까이 묻혔다고도 합니다.
고고학자들은 오랜 연구 끝에
2007년 하트셉수트의 이름이 적혀있는 항아리에서 치아를 발견하였고
이전에 20세기 때 발견했던 왕가의 계곡 60번째 무덤인
KV60 무덤의 미라와 치아 부분이 일치함에 따라
165cm의 여성 미라가 하트셉수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사인은 50대쯔음 뼈에 발생하는 종양
즉, 암의 일종인 골종양이 전신에 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하트셉수트가 살아있는 동안 이집트는
평화롭고 부유한 강국이 되었지만
그녀를 미워하던 존재가 있었는데
다름 아닌 투트모세 2세의 아들. 투트모세 3세였죠.
하트셉수트의 사후, 투트모세 3세가 집권하면서
큰어머니의 흔적을 말살시키기 위해 조각상을 마구 훼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질투와 원한에 쌓인 음모설은
가장 추측하기 쉬운 형태의 접근 방식으로
세간에 관심을 끌기에는 좋은 시나리오였을지라도
이집트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면서
여러 가지 기록물이 추가로 발견됨에 따라
두 사람의 불화설은 그리 힘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우선, 투트모세 3세가 어느 정도 성장하고서는
하트셉수트가 특별한 방해공작 없이
투트모세 3세에게 경험을 쌓으라는 의미에서
공통 통치자로 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투트모세 2세가 죽고 난 이후,
얼마간은 기념비나 기념벽화에 하트셉수트만 나왔지만
투트모세 3세가 청소년기가 지날 무렵부터는
두 사람의 이름이 동시에 나오기 시작해
이때부터는 공동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추측하고 있죠.
또한, 투트모세 3세가 큰어머니에 대해 얼굴조각상을 파손시킬 정도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면
자신이 집권했을 때 하트셉수트를 도왔던 신하들에 대한 숙청이 있었을 텐데
그 신하들은 그대로 투트모세 3세를 모셨다고 합니다.
투트모세 3세는
두 번째 부인에게서 그의 후계자 아멘호테프 2세를 낳았는데
그 부인의 이름이 바로 ‘메리트레-하트셉수트’로
‘라의 사랑을 받는 하트셉수트’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죠.
고대 이집트의 사람들은 이름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후계자를 낳게 한 사람 이름이
원망하는 자와 동일할 가능성은 적다고 보게 된 겁니다.
투트모세 3세는 당시의 정복왕으로 손꼽히며,
이집트의 나폴레옹이라 불릴만큼
고대 이집트 영역을 최대로 넓힌 파라오이기도 합니다.
투트모세 2세와 아세트 사이에서 태어난 투트모세 3세는
어릴 적에는 통치 일선에 나서지 못하고
고모이자 계모인 하트셉수트가 실권을 행사했죠.
그런데, 투트모세 3세의 아내들 중에서는
하트셉수트의 딸인 네페루레도 있었기 때문에
하트셉수트는 투트모세 3세의 고모이자 계모이자
동시에 장모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투트모세 3세는 성장기 시절부터
하트셉수트와는 다른 통치 방향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사람을 모았는데요
군대를 통솔하는 장관들 중에서
출세욕이 있는 사람들을 하나 둘 포섭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투트모세 3세는
이집트의 영토를 확장하였던 조부 투트모세 1세와 뜻을 같이 하였고,
하트셉수스 여왕의 시대가 끝나게 되면
이집트를 세계 제일의 제국으로 만들고 싶어 했죠.
하스셉수트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모든 권력을 차지하게 된 투트모세 3세는
본격적인 친정에 나서게 되는데
20년간 17번의 원정을 떠나
작은 도시를 포함해 약 350개의 도시를 점령하게 됩니다.
시리아 방면으로 진출하여 카데쉬 등의 도시국가를 정복하고
이후, 고대 레반테를 이집트 영토로 만들게 되어
이집트와 서아시아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죠.
이러한 투트모세의 움직임에 따라
전쟁에 잔뼈가 굵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도
히타이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등지에서
이집트의 눈치를 보느라 선물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국내에 나무가 부족했던 이집트는
평소 무역거래에 있어서 다량의 목재 수입으로 인해
국가 재정에 지출이 심했는데
현재 레바논인 옛 비블로스도 정복하면서
목재 공급 부분도 해결되며, 수입에 관련된 지출도 줄었습니다.
기원전 1458년 23세의 나이로 땅을 넓혀가던 투트모세 3세와
당시 대척점에 놓였던 나라로는 미탄니 제국이 있었습니다.
미탄니 제국은 기원전 1500년경에 건국되어
북부 유프라테스-티그리스 강 유역을 다시리던 국가였죠.
현재의 시리아와 터키, 이라크 북부 지역을 지배하던 세력이었는데
당시 최대의 강국으로 손꼽혔습니다.
20대 초반에 단독 왕위에 오른 투트모세는
북메소포타미아의 전쟁민족인 ‘미탄니 제국’마저 넘보게 되는데
다른 국가에서 볼 때는 세상 경험 부족한 어린 친구가
거대한 제국까지 노리는 형국으로
마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으로 보았죠.
미탄니 제국도 투트모세가 메소포타미아 강을 건너올 때만 하더라도
대제국 미탄니 제국에 순방할 줄로만 알아서
제대로 된 군대 준비를 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투트모세 3세는
쉽사리 북메소포티마 지역까지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시라아 부근도 완전 정복하게 된 투트모세는
시리아에서 코끼리를 비롯한 생소한 동물들도 데리고 오며
자신의 행적을 남겼죠.
투트모세 3세는 기원전 1425 년 54세의 나이로 죽게 되는데
그의 무덤은 선왕들처럼 왕들의 계곡에 조성됩니다.
하지만, 그의 무덤은 신왕국 말기에 도굴꾼들에 의해 파헤쳐졌으며
그의 미라도 크게 훼손되었는데요.
도굴꾼들은 왕족의 몸 내부에도 혹시나 보물이 발견될까 하는 마음으로
몸을 수색하였으며,
미라가 발견될 당시에는 코가 뭉개졌고
양쪽 다리는 찢어 없어진 상태였다고 합니다.
오늘은 고대 이집트 역사 일곱 번째 시간으로
신왕국 제18왕조 5대 파라오였던 하트셉수스와
6대 파라오였던 투트모세 3세에 대한 이야기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신왕국 초기시절에는 1,2 대 왕인 아흐모세 1세와
아멘호테프1세의 힉소인들에 대한 영토회복.
다음으로는 투트모세 1세가 영토를 확장시켰으며
이로 인해, 하트셉수트는 많은 자본을 확보하며
경제부국의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투트모세 3세가 파라오를 맡게된 이후에는
나폴레옹을 방불케 하는 이집트 역사상 최대 영토를 확장하게 되어
전투민족 메소포티미아 인들도 벌벌 떨게 하였죠.
투트모세 3세가 정복활동을 하는데 있어
신왕국 전통적으로 아몬신을 추대했는데
이집트의 전리품의 상당수는 아몬신전에 모였고
그로 인해 신관들은 가만히 앉아서 재산을 쌓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번영은 모두 아몬 신이 지켜주는 덕분이라며
신관은 점점 더 많은 공물을 요구하게 되었고
차차 왕족과 신관과의 대립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다음 영상에 대해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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