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제15왕조는 고대 이집트의 제2중간기에 속하며
이때는 100년 이상 힉소스가 하이집트를 지배하는 시대로
정복군주 힉소스 파라오가 통치했습니다.
이에 맞서, 나일강 하류의 상이집트에서는
이집트인들끼리 제17왕조로 칭하여 제15왕조와 경쟁했으며
제17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카모세는
격렬하게 힉소스인들에게 저항했지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죠.
아버지와 형을 모두 전장에서 잃은 동생 아흐모세 1세는
형의 뒤를 이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서고
그는 삶의 목표를 이집트 전역에서 힉소스를 몰아내는데 두었습니다.
결국, 아흐모세 1세는 델타 지역의 힉소스를 물리치는데 성공하였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팔레스타인의 국경도시인 샤루헨을 파괴하고
해당 주민들까지 몰살시켜버리죠.
이제 그는 이집트의 옛 영토를 모두 회복하는데 의미를 두어
반쪽자리 제17대 왕조가 아닌
새로운 제18왕조 왕조를 창설하게 되고
시대적으로 이집트는 제2중간기가 끝나며
새 시대인 이집트 신왕국 시대를 열게 됩니다.
아흐모세 1세는 나라의 행정 체제를 재조직하였고
자원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채석장 및 광산산업을 시작했으며
이집트인들의 정신을 한 곳으로 뭉쳤던
아몬 신의 대형 신전 건축 사업들을 진행했습니다.
고대 이집트는 전통적으로 왕가에서 근친혼을 행했는데
이는 이집트 신화에서 오시리스와 이시스가 남매 신이었지만
결혼해서 호루스를 낳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파라오 왕족의 신성함을 유지하는 상징이기도 했죠.
하지만, 짧았던 중왕국 시기와 혼란스러웠던 중간기 시대 때는
이러한 순수혈통 근친혼 전통이 상실되기도 했다가
아흐모세 1세는 고왕국 시절의 전통을 이어받아 친누이 ‘노프레타리’와 결혼합니다.
‘노프레타리’라는 이름은 ‘아문 신의 아내’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고
이는 아문 신을 숭배하면서, 동시에 신왕국 때부터는
다시 이집트 파라오의 신성성을 회복하려는 정치 행위기도 했죠.
새로운 왕권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아몬 신의 대형 신전 건축 사업을 하는데는 많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많은 재원의 확보는 이집트인들이 힉소스를 이집트에서 몰아내고,
연이어 서아시아인들의 도시까지 파괴하며
전리품으로 가져온 호화찬란한 보물들로 자본금을 마련했습니다.
이때, 아흐모세1세는 이집트의 해방자로
강력하고 위대한 파라오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죠.
아흐모세 1세는 힉소스인들에게 지배받던
이집트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는데 있어 ‘아몬’신의 힘을 이용했는데
아몬 신은 이집트 태초신 8명 중 한 명이었습니다.
예전, 10분 세계사 고대 이집트 1화에서
‘사자의 신’ 오시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오시리스는 헬리오폴리스를 대표하는 다섯 남매 신들 중 장남이었고
여동생인 이시스와 결혼하여 호루스를 낳았었죠.
조금 더 이집트의 신화에 대해 간단하게 조금 더 풀어보자면
오시리스와 이시스를 포함한 다섯 남매의 부모는 게브와 누트 신이었고
게브와 누트는 이집트 태초신 8명 중 2명이었습니다.
그리고 태초신 8명 중, 또 다른 신들 중에는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아몬’신도 있었죠.
8명의 신에는 태양의 신 ‘라’,
모습을 알 수 없다는 ‘아몬’
대지의 신 ‘게브’,
하늘의 신 ‘누트’ 등이 있습니다.
아몬이라는 이름은 ‘아멘’이라고도 부르기도 하고
그 뜻은 ‘감추어진 자’라 하여, 테베의 지방신 출신으로 공기의 속성을 띄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징합니다.
테베를 수도로 삼게되는 신왕국은
점차 융성하면서 아몬을 최고신으로 삼았고
왕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오게 되면
공물을 신관에게 바치게 되면서
서서히 신관의 입지가 강력해지기 시작합니다.
팔레스타인의 국경도시인 샤루헨을 확보한 아흐모세는
다음 목표로는 남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새롭게 정복한 영토에 반란을 일으키는 호족 아타와 테티안을 처형한 후
기원전 1550년경에는 이집트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남북으로 길게 뻗은 영토를 차지하며
절대적인 파라오의 권력을 구축하게 되죠.
아흐모세는 힉소스인들 혹은 다른 종족들에게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국가 체제로 재정비하며
효율적인 군대조직과 정보망을 관리하는 군사력을 지니게 됩니다.
신앙으로서는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믿음의 ‘아몬 신’을 중심으로 두고
전문적인 군사지도를 위해서는
‘바알’과 ‘세트’ 같은 신들을 ‘전사의 화신’으로 받들게 하고
전술과 전략 교육을 시키며
전차를 이용하여 기동력을 함께 갖추게 되죠.
또한, 중앙집권화를 위해 지방호족세력의 힘을 억제시켜
전국을 파라오 중심체제로 구성하게 됩니다.
그의 치세 말기에는 아예 팔레스타인을 영토로 편입했고
이로써, 후세에 이집트가 더욱 영토를 넓힐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아흐모세1세의 아들 아멘호테프 1세는
아버지의 기세를 몰아 영토를 점점 넓혀갔으며
제18왕조 제3대왕 투트모세 1세 때는
팔레스타인을 포함해 북동쪽의 시리아와
남쪽의 누비아까지 지배 영역을 넓히며
이집트는 제국으로서 큰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기원전 1500년경에 재위중이었던 투트모세 1세의 특징으로는
이전 왕들의 피라미드를 탐탁치 않아
비밀 분묘로 만들게 되는데요
기원전 2500 년경부터 시작되어온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천년 이상의 거대한 왕의 무덤을 자랑했으나
그 세월동안에는 당연하게도 도굴꾼들의 솜씨도 늘어나갔습니다.
파라오들은 내세가 있다고 믿었으며
내세를 영생하기 위해 무덤을 지키는 일에
엄청난 시간과 자본을 투자했지만
그에 맞춰 도굴꾼들의 연구도 늘어만 갔죠.
마치, 보안을 위해 백신을 아무리 깔아도
또다시 해커들은 열심히 해킹을 연구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겠죠.
이로 인해, 피라미드 내부의 미로는 복잡해졌으며
함정들도 여럿 설치되고, 묘실의 돌문도 아주 단단해졌습니다.
도굴하다 걸린 자는 손등과 발바닥의 피부를 찢는 고문을 시행했고
죄를 자백하게 되면 사형에 처하게 되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전에도 괴도 루팡같은 자들은 존재했고
그들의 방범을 뚫고자 하는 도전의식은 더욱 고취되어
결국 가장 큰 대피라미드를 건설했던 쿠푸왕의 미라는 사라지며
흔적도 남기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피라미드의 도굴꾼들의 실력이 점점 향상되자
투트모세 1세는 자신의 무덤에는 피라미드를 세우지 않고
이집트 파라오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비밀 분묘를 시행하였죠.
투트모세 1세는 건축가 이네니에게
죽은 파라오들이 영원히 살 수 있는 뜻의
‘영면’을 취할 장소를 찾아내라고 명했고
건축가 이네니는 한적한 오지를 찾아나서게 됩니다.
그는 장마철 이외에는 물이 없는 계곡을 선택했는데
나일 강 서부 해안의 카르낙 맞은편
‘데이르 알-바흐리’에 있는 사막에 위치했고
이때부터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들은
‘왕가의 계곡’이라는 곳으로 불리는 이 곳에 묻히기 시작했죠.
이러한 선택은 파라오와 친인척들에게는
나름대로 고생을 각오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이전까지의 피라미드는 대도시와 가깝게 있었지만
왕가의 계곡은 주기적으로 아주 먼 곳을 왕복하며
영혼에게 바치는 제사를 하러 가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지 않고, 비밀스러운 오지를 선택한 것은
자신이 죽고 나서 자신의 신체가 모두 찢어지는
오체분시가 되는 것보다는 지금 고생하는 것이 낫다고 여겼었죠.
도굴꾼들은 피라미드에서 보물들만 훔쳐 갔을 뿐 아니라,
혹시나 체내에도 귀중품들이 있다고 여겨
미라까지 모두 파헤치는 경우도 많았던 겁니다.
‘왕가의 계곡’ 이라는 명당을 고르게 된 기준은
우선, 이곳의 산 모양이 피라미드 형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곳을 신성하게 여겼으며
지리적으로도 나일강에서 멀리 떨어져
무덤들이 범람으로 훼손들 가능성이 적었죠.
제18왕조의 제3대 파라오 투트모세 1세부터 최초로 묻혔고
그 후로 제18왕조의 10여명의 파라오
그리고, 제19왕조를 지나 제20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람세스 11세까지 이곳에 묻히게 됩니다.
또한, 파라오와 꽌련된 왕비, 왕자, 공주 등의 가족들과
함께 친했던 가까운 신하들이라든가
애완동물들까지 자리가 마련되었죠.
이곳은 속세와 동떨어진 내세의 평온이 깃든 곳이었고
풀 한포기도 자라지 않는 적막한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왕들의 영혼들이 저승 세계와 교감하는 신비의 장소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무덤을 파는 일은 경험많고 검증된 전문가들만 출입이 가능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보안이었기 때문에
보수는 평생을 먹여 살릴 만큼 보장해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무덤 관련 엘리트 건축가들과 대신들은
평생을 파라오의 무덤을 짓는 데만 관여하였고
‘데으르 알-바흐리’에 모여 끼리끼리 비밀의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노동은 오전에 4시간 정도 작업을 하고,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에 4시간 정도로 업무를 마쳤습니다.
주5일 근무제라면 40 시간 정도의 노동이지만
기원전 1500 년전일 대라 주5일 근무제는 아닐 거 같네요.
어두운 지하에서 작업을 하려다보니
불을 피우는 작업 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요.
고급 무덤을 건축하는 만큼 벽면에는
절대적으로 그을음이 생기면 안되었던 거죠.
그을음이 생기게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작업자들은 염전의 해수에 램프 심지를 적셨다가 말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심지에 불을 붙여서 이용하게 되면
연기가 나지 않는 상태에서 작업이 가능했던 거죠.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벽화 작업도 하며
파라오들의 무덤 작업을 오랫동안 공들였지만
왕가의 계곡들 조차도 도굴꾼의 망을 피해갈 순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500년 뒤 쯤인 신왕국 말기에 접어들어서는
국가의 재정이 어려워지게 되는데
그로 인해, 무덤을 지키고 있던 고임금 노동자들에게
임금 체불은 일상이 되었죠.
노동자들은 자신의 집안이 평생 후한 대접을 받아오다가
갑자기 돈이 밀리기 시작하자 무덤을 털기 시작합니다.
국가의 재정파탄은 이러한 무덤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왕족, 귀족, 평민들까지 선대의 귀금속들을 빼돌렸고
너나 할 것 없이 무덤 보물찾기에 나섰던 거죠.
마치 유행이라도 되듯이 무덤 부장품들은 시중에 팔려나가기 시작했고
값비싼 물건들이 시중에 나돌게 되자
경제적으로도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게 되고
힘들었던 왕국은 더더욱 경제상황이 악화되어 갔습니다.
상황이 심각해짐을 인지하여
제20왕조 후반에 파라오인 람세스 9세 때는
도난당한 물건에 대하여, 전방위적으로 대대적인 조사를 하여
제11왕조 때부터 제 20왕조까지 무덤 16개를 살펴보았죠.
그랬더니 단 2개의 무덤을 제외하고는
모두 싹 털린 결과가 나왔습니다.
단지, 전문적인 도굴꾼뿐만 아니라
이쯤 되면 사제들과 도굴꾼이 같이 한 패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제 21왕조 때의 파라오들은
이집트 왕국의 국가재정이 힘들어
직접 선왕조의 무덤을 파헤쳐가며, 재정을 충당하기도 했죠.
심지어는 제21왕조의 한 파라오의 무덤에서는
이전 파라오들의 반지와 관이 각각 따로 발견되는 등
무덤 부장품의 재활용 조합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고대 이집트 여섯 번째 시간으로
힉소스인에게서 나라를 되찾은 아흐모세 1세의 신왕국 건설과
아몬신에 대한 이야기로 영상을 시작했는데요.
아흐모세 1세가 죽고 난 이후
그의 아들 아멘호테프 1세 때는
더욱 영토를 넓혀가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왕위를 이어받은 투트모세는 본래 이집트의 장군이었으나
아멘호테프 1세가 후계자 없이 죽게 되어
투트모세 1세가 파라오가 되었고
그를 시작으로 피라미도 도굴꾼들을 엄하게 벌하며
피라미드가 아닌 왕가의 계곡을 건설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도굴꾼들의 무덤 파헤치기는 계속 되었으며
국가재정이 파탄나게 되자
왕족과 귀족, 평민들 너나할 것 없이
무덤을 파헤치는 이야기까지 정리해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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