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역사의 왕조는 크게 3 시기로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각각의 왕국 사이에는 혼란한 시대인 중간기가 있었습니다.
고왕국과 중왕국 사이가 제1중간기이며,
중왕국과 신왕국 사이를 제2중간기라고 하죠.
특히, 제2중간기 시기의 이집트 제15왕조는
파라오가 순수 이집트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영상에서 말씀드린 외부에서 나타난 힉소스인들이
혼탁한 이집트 국내 정세를 이용하여
이집트를 공격한 후, 스스로 파라오가 되었죠.
제15왕조는 기원전 1663년부터 기원전 1555년으로
5명 혹은 6명의 힉소스인 파라오가
이집트를 통치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파라오 뿐만 아니라 많은 힉소스인들은
이미 그전부터 요리사, 양조업자, 농부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활동하여 그들이 이집트를 지배한 이후에도
선진 문화였던 이집트 문화에 동화되어갔고
기존 이집트인들이 중요시 여겼던 이집트 신에 대해서도
그대로 형태를 유지해 갔죠.
하지만, 나일강 상류인 하이집트를 차지하였던
힉소스인들과 융화되어가던 이집트인들과는 달리
나일강 하류의 상이집트에 있던 테베시 근처에서는
힉소스 파라오인 제15왕조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집트인들끼리 제 각기 따로 구성한
제16왕조와 제17왕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우선은 힉소스 파라오에게 무릎을 꿇고 해마다 조공을 바쳤지만
여러 면에서는 힉소스인들과 대치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힉소스 파라오들은 자신과 적대관계를 보이는 이집트인들에게는
더 많은 조공과 세금을 요구하였죠.
이렇게, 새로운 종족의 지배가 이어지는 시간이 흐르며 60년 정도 지나자
기원전 1600년경 상이집트의 테베에서는
반힉소스 활동이 눈에 띄게 활성화 되기 시작했습니다.
테베에서의 저항 운동이 거세지자
힉소스 출신의 파라오 아페피는
지금까지 조공을 바치고 있던 상이집트 테베의 왕인
‘세케넨레’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죠.
“테베의 하마가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다.”
당시, 테베에는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하마가 서식하고 있었는데,
테베의 하마는 힉소스의 궁전과는 약 600km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는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보다 1.5 배는 더 먼 거리인데,
하마 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는
저항 운동에 대한 소문이 심상찮으니, 경고를 준다는 뜻이었죠.
이에 세케넨레는 아페피에게 답변을 보냅니다.
“항상 아페피님께 보내드릴 공물은 잘 준비하고 있고,
저희는 결코 전쟁 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답은 이렇게 보냈지만, 실은 투쟁적인 성격이 강했던 세케넨레는
힉소스에게 이집트를 되찾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왕 이렇게 된 판국에 노골적으로 덤비기로 마음먹게 되죠.
하지만, 전투 종족 출신의 힉소스 군주의 군대는
막강한 부대와 전쟁 기술이 한 수 위였으며
결국 준비가 덜 되었던 세케넨레는 장렬히 전사하고 맙니다.
세케엔레의 죽음에 대한 추측 중에는
그가 암살단에 의해 사망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세케넨레의 미라를 살펴 보았을 때
그의 주검에는 단검이 머리를 뚫고 나갔으며
전투용 도끼가 이마에 큰 구멍을 낸 걸로 보아
전투 중에 격렬하게 싸웠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러한 전투용 도끼 흔적은
당시 힉소스인들이 강력한 무기를 지녔다는 증거이기도 했죠.
세케넨레의 미라는 테베에 있는 조그만 피라미드에 안장되었다가
나중에는 왕가의 계곡으로 이전되었으며
1881년에 발굴되어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에 보존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어 평안한 죽음을 맞이했을 때와는 달리
그의 두개골 미라는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확연히 보여주었죠.
급작스러운 세케넨레의 죽음으로
순수 이집트인들로 구성된 테베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다시, 옛 영광을 찾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이집트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용장을 잃어버리게 된 거죠.
이러한 비상시기를 극복하고자 나선 것은
통치권을 임시로 위임받았던
세케넨레의 아내. ‘아흐호트페’였는데요.
남편의 죽음으로 큰 슬픔이 다가와
정신적으로 무너질법했던 아흐호트페’는
단호하게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남아있는 테베마저 힉소스인들에게 빼앗길 것만 같은 위기의식을 느껴
흩어져있던 장병들을 모으기 시작하였으며
비록, 군사적인 전력은 밀렸지만
남아있는 병사들을 다시 하나둘 가다듬기 시작했죠.
힉소스인들에게 정보를 빼내주던 반역자들을 잡아 처형하고
테베의 기틀을 단단하게 잡아가며, 내정에 집중하던 그녀는
국가 내부적으로도 장남 카모세를
아버지 못지 않은 단단한 사내로 키워
아버지의 정권을 계승하게 합니다.
카모세가 권력을 잡자, 주변의 대신들 중에는
카모세의 강한 기질을 걱정하는 부하들도 있었는데
굳이 백성들을 희생해가며, 힉소스인들에게 덤비지 말고
당분간은 조공을 계속 바치며 평화 관계를 유지하자고 했죠.
하지만, 카모세는 테베 주변의 독립했던
이집트인들 출신의 작은 소국들인
‘쿠시 왕국’와 ‘누비아 왕국’이
힉소스와 연합하여 테베에 쳐들어 올 것이 분명하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된다고 부하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리고서는 먼저 공격준비를 하여
작은 독립국이었던 쿠시 왕국을 점령하고
기세를 몰아 힉소스의 남부에서 북부까지 차례차례 진격해가는데 성공하게 되죠.
카모세의 전투력은 금세 주변국들을 누비고
당시 이집트 구역의 최강자였던 힉소스까지 위협하게 됩니다.
카모세는 자신의 군대가 강력하다는 것을 믿어의심치 않았으며
직접 힉소스 이집트의 수도인 아바라리스까지 공격해 들어가는데요
하지만, 아바리스의 요새 건축술은 워낙 견고했으며
생각보다는 쉽사리 수도를 점령하진 못했습니다.
성안에 숨어, 공성전을 벌이던 힉소스인들은
아바리스를 내주지 않게 되었지만
카모세는 수도 주변의 각종 전리품들을 챙겨
테베로 귀환하게 되었죠.
다음 전투까지 나서고 싶었던 카모세였지만
그는 그만 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로써, 힉소스로부터 옛 영토를 되찾고자했던 세케넨레는
일찍이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그의 뜻을 이어 아내인 ‘아흐호트페’와 장남인 카모세는
더욱 가열차게 전투를 이어갔지만
카모세마저 세상을 떠나자
테베는 잠시 저항 휴식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다음 통치자로는 카모세의 동생 아흐모세가
젊은 나이에 테베의 지배자가 되었는데요
이른 나이에 이집트 통일이라는 목적을 두고 재위를 한 그는
아버지나 형과는 다소 성격이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전투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지만
차분한 성향을 지니고 있어
상황을 분석하고 꼼꼼하게 일을 추진하는 타입이었죠.
아버지와 형이 죽고나서 통치자가 되기에는
인생 경험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는
젊은 나이에 지배자가 된 아흐모세는
이집트인들의 염원인 영토회복이라는 숙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아흐모세가 즉위했을때의 이집트는 이전 왕들의 활약으로
영토의 절반은 회복된 상태였지만
나일강 삼각주 지역의 하이집트는
여전히 힉소스인들의 통치 아래에 놓여있었죠.
형인 카모세가 힉소스인들을 크게 흔들어놓았지만
여전히 무기로나 숫적으로나 힉소스인들의 군대가 우위였다는걸 가늠하고 있었던 아흐모스는
무엇보다 내부적인 국력을 키워나가야 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로 인해, 군사훈련을 더욱 강화하고
힉소스인들의 뛰어난 무기 기술을 연구하는데 시간을 들여
우수한 품질의 전차와 대군대를 함께 수송할 수 있는 함대도 지닐 수 있게 되었죠.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이집트 백성들은
힉소스에 조공을 바치는 시절 기간 때는
차라리 편안한 생활을 이어갔지만
아흐모세의 전쟁 준비 계획으로 인해
예전보다 고강도의 노동이 요구되어
백성의 생활은 오히려 더더욱 힘든 하루하루가 이어져갔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살아갈 바에야 항복하자는 목소리들도 있었지만
고대 이집트 사회의 통치자의 말은 절대적이었으며
또한, 영토 회복이라는 아흐모세의 계획에 동의하는 이집트인들이 많아
아흐모세의 계획과 정책은 하나둘 만들어져갔습니다.
아흐모세는 아버지와 형이 전쟁터에서의 경험이 많았던만큼
어릴적부터 보병대의 최하위 계급에서 차곡차곡 군대를 경험했는데
그러한 군 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군대 시스템에 대한 분석과 군사들의 심리를 잘 파악하였죠.
다시 힉소스들을 향한 저항 전쟁이 시작되고서는
빈틈없는 군사 계획을 짜는데
본인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공격시에도 마구잡이로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병사들의 체력과 심리를 가늠하면서
주의깊고 견고한 진군을 행하였는데요.
힉소스인들은 이전 왕인 카모세 때는
카모세의 전투력에 혼비백산하였으나
새로운 젊은 왕 아흐모세를 겪어보니
카모세 때보다 한층 더욱 안정적이고
변화무쌍한 군사작전에 크게 휘둘리게 됩니다.
이에 헬리오폴리스와 멤피스를 금방 내주게 되고
북쪽에 거주하던 이집트인들도 아흐모세군에 합류하며
아흐모세의 군대는 규모는 점점 더 불어났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목표인 힉소스의 수도 아바리스는
이전에도 카모세가 공략하지 못했던 난공불락의 요새였고
힉소스인들은 인력과 자본을 총동원하여
여러 해 동안 아흐모세의 군대를 막아내었죠.
이에 아흐모세도 질세라 병사들을 두둔하였으며
당시 테베에서 주로 믿고 있는 아몬 신의 계시라 하여
모든 이집트인들에게 절대적인 힘을 지닌 아몬 신의 이름으로
정신적 단합을 이끌어내며, 사기를 끌어올리는데요.
오랫동안 이집트 인을 괴롭혀온 힉소스인들에게
아몬 신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고 하였죠.
결국 기원전 1539년 힉소스의 수도는 무너지게 되었고,
이집트인들은 옛 영토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흐모세는 영토를 회복하는데 멈추지 않았으며
이 참에 서아시아인들이 다시는 이집트를 탐내지 못하도록
아예 팔레스타인까지 원정 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팔레스타인의 국경도시인 샤루헨을 공격하며
아버지와 형에 대한 복수심에 이르러
힉소스인들이라 생각되는 일반 주민들까지 모두 학살하기에 이릅니다.
아흐모세는 샤루헨에서 황금으로 제작되어진 왕관과 악기
그리고 도자기등 화려한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왔는데요
이로써, 이집트인들은 힉소스에게 지배당했던 제2중간기를 마치고
이집트 제18왕조의 1대 파라오 아흐모세 1세로서,
신왕조의 출발을 알리게 됩니다.
아흐모세 1세는 이집트의 해방을 가져다 준 위대한 파라오로
테베 백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으며
치세 말기에는 팔레스타인까지 이집트의 영토로 종속시켜 버립니다.
오늘은 고대 이집트 역사 다섯 번째 시간으로
제2중간기 동안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었던 힉소스인들과
그에 대항하는 테베의 세케넨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세케켄레는 전쟁터에서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그의 아내와 아들은 뜻을 이어받아
다시 힘을 내, 해방전쟁을 펼쳐나갔죠.
장남인 카모세는 해방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의 동생인 아흐모세로 인해
이집트는 이전 영토를 회복하게 되었고
시기적으로는 제2중간기가 끝나고
신왕국으로 접어드는 내용까지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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