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세기 초. 그리스 세계는
거대한 제국인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침공을 당했으나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은 힘을 합쳐 이를 막아냅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전쟁 때
큰 활약을 했던 아테네는 급성장을 하여
마치 제국처럼 세력이 커졌고
이에 위협을 느낀 그리스 세계는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아테네에 저항합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초기 양상은
작은 폴리스들 간의 갈등인 에피담노스 분쟁을 시작으로 점차 확대되어가며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맞붙게 되었고
아테네는 역병을 겪어가며 다수의 시민을 잃었지만
단단하게 다져온 강력한 해군을 앞세우며
전쟁의 주도권을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두 강대국이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간의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양쪽의 강경파들이 사망하고
기원전 421년에는 아테네의 온건파 니키아스의 주도로
니키아스 평화 협정이 맺어집니다.
하지만, 협정은 표면상의 휴전 상태일 뿐이었고
전쟁의 우위에 있던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뿌리 뽑고자
아테네 전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시칠리아를 공격합니다.
시칠리아 공격 과정에서 아테네는
내부 정치싸움으로 인해 전쟁의 천재라 불리던
알키비아데스를 궁지에 몰아넣게 됩니다.
이에, 알키비아데스는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와 제대로 맞붙기도 전에
신성모독죄로 본국으로 소환 명령이 떨어졌고
그는 아테네 재판에서 정치판의 정적들에게 목숨을 잃을 바에야,
스파르타로 망명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로써, 명장 알키비아데스를 잃게 된 아테네는
니키아스를 내세워 시라쿠사를 포위했지만
스파르타로 망명한 알키비아데스의 전략에 막혀
아테네는 사상 최악의 패전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테네의 시칠리아 공략 실패 결과는
아테네군의 핵심이라 할 수 있었던 함선 200여척을 잃었고
4만 명에 달하는 군사력을 잃었으며
전쟁에 들어간 5년 치의 국가 예산이 날아가게 됩니다.
시칠리아를 집어삼켜 스파르타를
완전한 궁지에 몰아놓고자 했던 아테네는 되려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와 스파르타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위기로 빠져들게 됩니다.
무리한 전쟁 준비로 인한 아테네의 국고는 텅텅 비게 되었고
군사력마저 크게 약해졌는데
이제는 아테네 군사 규모가
예전의 30% 수준인 9천 명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여기다, 200여척의 함선을 잃은 아테네는
남은 함선도 100여척에 불과했으며
그마저도 노잡이들에게 지불할 수 있는 임금이 부족해
함선을 제대로 운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돈이 궁해진 아테네는
그동안 약소국에서 거둬들인 강제 징수라 할 수 있는
델로스 동맹의 상납금을 더 많은 비율로 올리게 되는데
이는 동맹국들의 불만을 증가시키게 되었고
결국, 여러 폴리스들이 스파르타 쪽으로 붙게 됩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반인 니키아스 협약 전후 때만 하더라도
스파르타 군대는 다소 주춤한 분위기로
예전만 못한 명성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아테네의 시칠리아 공세 때 벌어진 해프닝인
알키비아데스의 망명은
스파르타군에 큰 힘이 되었고
그의 조언에 따라 스파르타는
아테네 근처의 데켈리아를 확보하게 됩니다.
스파르타의 데켈리아 확보 및 요새화는
아테네의 육로를 모두 제압하는 효과를 발휘했고
이로 인해 아테네의 재정은 더욱 말라갔습니다.
여기다, 스파르타군은 아테네 근처의 은광들을 초토화시키면서
은광 생산인력이었던 2만 명의 노예를 탈출시킵니다.
한편, 여러 차례의 그리스 정복에 실패했던 페르시아는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간의 전쟁을 보며
가만히 앉아 그리스 세계가 붕괴되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그러다, 강한 해군을 이끌고 있던
아테네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페르시아에서는 스파르타를 지원했는데
아테네가 멸망하게 된다면 예전에 자신들의 지배하에 놓여있던
이오니아 지역도 탈환할 수 있었던 계산을 합니다.
이제, 아테네의 편이었던 약소국들도 돌아서고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누구나 아테네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여겼지만
그러한 예상과는 달리 아테네는 여전히 건재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스파르타와 여러 폴리스들, 그리고 페르시아가 힘을 합쳐도
아테네 해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해군이 약했고
스파르타의 지원국이었던 코린트와 시라쿠사 해군의 집결은
제때 이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스파르타와 다른 나라들이 주춤거리는 동안
아테네는 신속한 해상 전력들의 대응으로 반란 지역으로 향하였고
레스보스와 사모스의 반란을 저지시킵니다.
이로써, 델로스 동맹의 완전한 와해는 막을 수 있었지만
키오스와 밀레토스가 이탈하는 것은 막지 못했습니다.
최근까지 시칠리아 원정의 실패로 힘이 약해졌던 아테네를 향해
스파르타와 다른 나라들이 힘을 합쳐 아테네를 무너뜨리려 했지만
그동안 제국처럼 군림했던 아테네는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테네에서는 외부의 세력이 아닌
내부에서 혼란이 발생하게 됩니다.
기원전 411년. 오랫동안 아테네의 민주정에 대해
불만을 품었던 아테네 상류층들은 쿠데타를 일으키게 됩니다.
민주정은 전복되었고 400인의 과두정이 실권을 잡게 되었던 것이죠.
이는 하층민 출신의 시민들이 정권을 유지하는 동안
상류층에 대해 세금 부담을 늘리고 있었는데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군자금이 필요하게 되자
더욱 상류층에 대한 세금 부담을 가중시켜서
결국 상류층이 폭발하게 되었던 겁니다.
쿠데타로 인해 400인의 과두정이 시작되었고
이제 하층민의 정치 참여를 막으려 하는 움직임도 보였는데
이 과정에서도 의견 차이가 발생하였고
소수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급진파,
대중 정치 참여가 필요하다는 중도파가 싸우게 됩니다.
한편, 얼마 전 아테네 민회로부터
신성모독죄로 목숨을 잃을 뻔했던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로 망명하여 스파르타인으로써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스파르타에 망명할 때의 약속대로
아테네와의 전투에서 대승리를 이끌었고
싸움의 천재답게 스파르타에서도 인정을 받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파르타의 영웅이 될 뻔했던 알키비아데스는
기혼녀인 티마이아와 간통을 하다 발각되는데
그녀의 남편은 다름 아닌 스파르타의 왕, 아기스였던 겁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서도 도망을 쳐 페르시아로 건너갔고,
거기서 다시 아테네로 돌아갈 계획을 구상합니다.
페르시아는 너무나 큰 영토를 통치하고 있어
각 지방을 다스리는 사트라프라는 존재가 있었는데
알키비아데스는 사트라프였던 티사페르네스에게 의탁했습니다.
마침, 아테네에서는 민주정이 흔들리고 있었고
알키비아데스는 과두정 지지자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는데
그는 사프라트들의 친분을 이용해
아테네에 과두정을 세운다는 조건으로
사트라프들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게 됩니다.
기원전 411년, 시칠리아 원정 실패 이후
경제적 손실이 컸던 아테네 민회는
알키비아데스의 제안에 따라 400인 회에 모든 권력을 양도하게 됩니다.
이렇게, 아테네의 쿠데타는 민주정을 없애고
과두정을 성립시키는가 했지만
아테네의 가장 강력한 군사 세력이었던 사모스섬의 함대에서
강력하게 민주정을 요구하며 과두정 성립은 불발되었습니다.
결국, 아테네에서는 사모스섬의 요구에 따라
민주제와 과두제의 절충형에 속하는
준과두정이라 할 수 있는 “5000인 회”가 성립됩니다.
아테네는 내부적으로 혼란한 상황을 겪고 있었고
밖으로는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상대하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알키비아데스도
함대를 거느리고 아비도스 해전에서 싸움을 승리로 이끌게 됩니다.
아비도스 해전에서 알키비아데스의 활약은 뛰어나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궁지로 몰아넣었으나
갑자기 나타난 페르시아군의 개입으로
펠로폰네소스 함대는 전멸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페르시아군의 개입으로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지만
알키비아데스의 활약으로 인해 아테네군은
펠로폰네소스 함선 30척을 나포하게 됩니다.
아비도스 해전 이후, 알키비아데스는
페르시아의 사트라프와 협상에 나섰습니다.
아테네인들은 알키비아데스가
페르시아와 우호적인 관계가 되길 바랐지만
현실의 상황은 아테네인들의 기대와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사트라프인 티사페르네스는 알키비아데스를 체포했고
이는 알키비아데스가 페르시아와 그리 가깝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었습니다.
이에 알키비아데스는 페르시아로부터 탈출을 성공하지만
열악한 아테네의 국력상태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협상이 아닌
이제는 타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펠로폰네소스 8번째 영상으로
시칠리아 원정에서 대패한
아테네의 심각한 위기에 대해 다루어 보았습니다.
벼랑 끝에 몰린 아테네는
내부적으로는 민주정과 과두정과의 대립이 이어졌고
그동안의 전투에서 경험 많은 장군들을 모두 잃은 마당에
알키비아데스가 귀환하는 이야기까지 정리해 보았습니다.
다음 세계사 영상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홉 번째 이야기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시사 - 역사 > 역사, 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사, 4대 문명] 스파르타 리산드로스 vs 아테네 알키비아데스 : 펠로폰네소스 전쟁 10 (0) | 2023.10.04 |
---|---|
[세계사, 4대 문명] 아테네 vs 스파르타 : 알키비아데스 키지코스 해전 (0) | 2023.09.27 |
[세계사, 4대 문명] 그리스 최강 아테네 해군 vs 시라쿠사 스파르타 연합 (0) | 2023.09.20 |
[세계사, 4대 문명] 아테네의 시칠리아 침공, 흔들리는 아테네 (0) | 2023.09.14 |
[세계사, 4대 문명] 아테네 vs 멜로스의 비극, 무력과 정의의 기준 (0) | 2023.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