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역사, 세계사

[세계사, 4대 문명] 아테네의 시칠리아 침공, 흔들리는 아테네

Buddhastudy 2023. 9. 14. 19:37

 

 

기원전 477. 페르시아 전쟁을 마무리한 그리스 세계는

앞으로 다가올 외세의 침입에 대비하자는 뜻에서

아테네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을 창안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페르시아라는 외부의 적만 견제하였을 뿐

이제 그리스 내부에서는 자신들끼리 힘싸움이 시작되었고

그 중심에는 아테네가 제국 형태로 세력을 키워갔습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로부터 지켜준다는 명목하에 기금을 거두었고

막대한 재력을 이용한 아테네는

해군력을 증강시키며 그리스 세계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력을 손에 넣었습니다.

 

아테네가 그리스 세계의 패권국으로 떠오르자

이에 반대하는 폴리스들도 나타났는데

이들은 최강의 육상 전투로 명성이 자자한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아테네에 대항하였습니다.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진영 간에 작은 나라들끼리 먼저 다툼이 일어났으며

시간이 지나며 전장은 점점 확대되어

결국 두 강대국이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간의 정면충돌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기원전 431년부터 시작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해

그리스 세계의 여러 폴리스들에서는 유례없는 사상자들이 발생하였고

아테네에서는 역병까지 도래해 수만 명의 사람들이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한시도 쉬지 않고 전투가 벌어지는 탓에

무적 스파르타의 위세도 예전만 하지 못하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더욱 혼란에 빠졌습니다.

 

전쟁이 시작되고 약 10년이 흐른 후

아테네의 강경파 클레온과 스파르타의 강경파 브라시다스가 전사하며

기원전 420년에는 아테네의 온건파 니키아스의 주도로

양 국가 간에 50년 평화협정인 니키아스 협약이 맺어집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아테네의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의 주변국들을 이용해

스파르타를 고립시키려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이에 아테네는 그리스 패권국의 힘을 되찾고자 멜로스를 점령하게 됩니다.

 

아테네가 중립국 멜로스를 점령하는데 있어

멜로스로서는 당신들은 중립국을 건드리며

정의롭지 못하다고 비판을 했지만

아테네는 정의라는 것은 힘이 있는 자가 정하는 것이며

약자는 힘 있는 자가 만든 정의에 순응할 때 안정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멜로스는 항복하지 않고 아테네에게 저항했지만

아테네는 힘으로 멜로스를 멸국시켰으며

성인 남성은 전원 학살, 여성과 아이는 모두 노예로 만들게 됩니다.

 

한편, 이탈리아 남서부의 큰 섬 시칠리아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에는 그리 관심을 받지 못하는 지역이었지만

전쟁이 격화되어갈수록 점점 관여도가 깊어지게 됩니다.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 지방에는

그리스 폴리스의 식민지로 출발하여

시간이 지나며 독립 지위를 누리는 도시국가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세력을 갖고 있었던 도시는

스파르타와 같은 출신의 도리아인들이 세운 시라쿠사라는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시라쿠사 이외 여러 약한 세력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아테네와 같은 이오니아인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아테네는 시칠리아 내부에서

다른 도시국가 간에 분쟁이 있을 때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스파르타와 연계가 될 만한 시라쿠사도 없애버리고

아울러 시칠리아의 풍부한 자원도

통째로 삼키고 싶어 했습니다.

 

 

 

기원전 416. 세게스타라는 작은 도시 국가가

아테네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세게스타는 셀리누스와의 분쟁에서 불리해지자

아테네의 힘을 빌리고자 했고

그 조건으로 자신들이 앞으로 모든 전쟁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세게스타는 그리 부유한 국가가 아니었으며

아테네 사절단이 왔을 때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모든 금은보화를 보여주면서

우리를 도와주면 지금 보고 있는 금은 보다

더 많은 재산을 줄 수 있다는 과장까지 보탰습니다.

 

당시, 그리스 세계는 10년 이상 지속된

아테네와 스파르타와의 전쟁 때문에

양쪽 모두 피해가 막심한 상태였고

이러한 상황을 정리하고자 아테네의 온건파 니키아스의 주장으로

양 국가는 평화협정을 맺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강경파의 젊은 정치가였던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의 영향력을 더 넓게 확장해야 한다면서 주전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아테네 민회는 격론을 펼쳤고

결국 전함 60척으로 출병.

지휘 사령관으로는 알키비아데스, 니키아스, 그리고 라마코스

세 사람에게 맡기기로 했습니다.

 

지휘관이 3명이 된 이유로는

강경파와 온건파가 함께 하며

또한 군사 경험이 풍부한 노장 라마코스를 포함시켜

팀에 조화를 불어넣으려 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니키아스는

시칠리아 원정은 잘못된 것이라 주장했고

또한 시칠리아인들은 여러분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부와 국력이 엄청나게 센 국가들이라

우리가 당할 수도 있다고 겁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 민회에서는 되려

기존에 60척만 보내기로 한 계획에서

두 배 이상을 늘려 전함 134척에 중장보병 5,

함대 운용인력까지 총 2만 명 이상의 대규모 전력을 파견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제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서

힘을 보여줄 수 있는 시칠리아 원정 준비를 마쳤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출항 전날 밤

헤르메스 흉상이 새겨진 직사각형 돌기둥인

행운의 표시 헤르마가 다수 파괴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를 이용해, 알키비아데스의 반대 세력들은

알키비아데스가 평소 자신이 전쟁영웅이라고 자만하며

신성을 심심찮게 모독하는 행동이라든가

다른 아테네인들을 무시하는 인격 결함으로 인해

분명 그가 헤르마를 파괴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내부에서 대체적으로

군대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출병하기 이전에 재판을 열어달라고 요구했지만

이 탄원은 기각됩니다.

 

그리고 알키비아데스가 출병에 나서자

군인들의 표도 모두 없어졌고

이때 알키비아데스의 반대세력들은 재판을 열어

신성모독 혐의로 알키비아데스를 소환했습니다.

 

이로써, 그간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내부의 정치싸움에서 밀려

자국 내의 재판에 의해 목숨을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이렇게 죽을 바에야

적국 스파르타로 망명을 결정하게 됩니다.

 

 

 

알키비아데스가 아직 본국으로부터 소환 소식을 받기 이전.

아테네 원정군은 자신들에게 전쟁 비용을

모두 부담하겠다고 했었던 세게스타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세게스타에 도착하고 보니

그들에게는 약속을 지킬만한 재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테네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었으나

이때를 기회삼아 온건파 니키아스는

그만 아테네로 돌아가자고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령관은 총 3명이었기 때문에

나머지 알키비아데스와 라마코스의 반대로

이왕 시칠리아까지 왔으니 시라쿠사를 공격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아테네 원정군은 시라쿠사를 압박하는가 싶더니만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네 소환명령을 피해 스파르타로 망명해버리고

니키아스는 자신이 원치 않은 전쟁에 스트레스가 쌓여 병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라마코스는 시라쿠사를 포위하는 과정에서 전사하게 됩니다.

 

라마코스는 사망하고, 알키비아데스는 도망가 버리고

이제 아테네군을 지휘할 수 있는 사령관은

병든 니키아스 밖에 없었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게 망명하는 조건으로

지금까지 자신이 스파르타와의 전투에서 입힌 피해보다

훨씬 더 큰 이익을 보게 해주겠다고 설득했습니다.

 

이에, 스파르타는 전투의 화신으로 알려진

알키비아데스가 찾아와 환영의 뜻으로 맞이했으며

알키비아데스 또한 아테네에서의 화려했던 생활을 버리고

철저하게 스파르타인으로 살아갔습니다.

 

한편, 아테네군으로부터 포위당하고 있던 시라쿠사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원군을 찾아다녔습니다.

 

이때 마침,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에게

시라쿠사를 위한 원군을 보내야 된다고 조언합니다.

그리고 아테네 근처의 데켈레아를 점령하는 것이

앞으로 스파르타가 이 전쟁을 유리한 상황으로

만들어 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스파르타는 니카아스 협약으로 인해 아테네와 휴전 중이었지만

아테네가 자신들과 가깝게 지내던 시라쿠사를 공격하는 걸 보면서

협약은 끝이 났다고 간주했습니다.

그리고 스파르타의 구원병은 시라쿠사를 도와주며

아테네로부터 포위망을 저지하게 해줍니다.

 

이에, 원래부터 전쟁에 뜻이 없었던 니키아스는

아테네가 위기에 빠졌다면서

본국으로 철수 허가 서신을 보내게 되는데

아테네의 답변은 철수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에우리메돈과 데모스테네스 지휘 아래

대형 규모의 2차 원정군을 보내며

시칠리아를 장악하라고 요청했습니다.

 

 

 

오늘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된지 10여 년이 지나,

아테네의 시칠리아 공략에 대한 이야기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아테네는 시라쿠사에 비해 강한 전력을 갖고 있었지만

내부 정치싸움에서 알키비아데스와 니키아스의 뜻이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아테네의 알키비아데스 반대 세력은

그를 역적으로 몰아넣었고

이에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로 망명하며

아테네를 향해 칼을 겨누게 됩니다.

 

전쟁 경험이 부족했던 니키아스는

아테네 본국에 철수 허가를 구하였지만

아테네는 에우리메돈과 데모스테네스를 보내며

더욱 전력보강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다음 세계사 영상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일곱 번째 이야기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