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고대 문명이라는 단어를 듣고
머릿속에 이미지를 떠올릴 때면
마치 인디아나 존스가 이집트의 유적을 연구하는 것처럼
고대 이집트의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하는데요.
많은 매체에서 이집트를 다루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기간이 너무나도 긴 고대 이집트 문명은
기원전 332년까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유지되어 영향력을 끼치기도 했었죠.
여기서 잠깐!
기원전 332년까지 유지되었다고 했는데
지난 시간까지 얘기한 클레오파트라 7세는
기원전 30년쯤의 이야기라면서, 어떻게 된 거냐?
네. 눈치채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클레오파트라도 실은
그리스계 마케도니아인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이기 때문에
순수혈통 이집트인은 아니었던 겁니다.
기원전 3000년부터 시작된 이집트 문명은
수천년을 이어오다가 기원전 332년에 이르러
페르시아 속국으로 전락하고
그때부터는 페르시아 출신의 파라오가 지배합니다.
그리고는 다리우스 왕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패배하면서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시작되었던 거죠.
어쨌든, 한 국가가 3천년에 가까운 세월을 지속했던 경우는
찾아보기 힘든 예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많은 고대문명의 대명사로서
이집트를 떠올리지 않나 싶습니다.
오랜 세월, 이집트 문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나일강을 꼽을 수 있는데요
풍요로운 토지와 접근성이 좋아서
수많은 나라들이 노리던 티그리스, 유프레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인들에 비해
나일강의 지리적 특성은 외부의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에
이는 이집트인들에게 평온함을 주게 됩니다.
나일강은 시계처럼 규칙적이고
배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유순해서
농사를 지으며 정착하고 살아가기 안성맞춤이었죠.
매년 여름이 되면 나일강이 범람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영양이 풍부한 토사를 선물로 남겨놓아서
이는 ‘나일강의 선물’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범람은 혜택과 함께
무서운 자연의 피해를 주는 일도 있었고
이집트인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운하, 수문, 둑 같은 건축기술과 토지 측량술, 수학과 기하학 등을 발전시키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일강은 다른 문명들에 비해
물관리 방법이 다소 용이한 편이었는데요.
수압 이용과 복잡한 설계가 요구되는 다른 유역의 문명들과는 달리
나일강은 유순한 편이어서
농부들이 홍수로 인해 생긴 물을
흙이나 수로들에 채우는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즉, 나일강의 선물은
이집트인들이 크게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많은 양의 식량을 생산해낼 수 있었고
먹고 사는데 여유가 생긴다는 것은
좀 더 많은 분야의 프로젝트들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의 여유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여유가 생긴다는 생활은
물질적일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낙관적인 생각으로 이어지게 되고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사후 세계에 대해서도 밝은 이미지로 생각하게 되는데요.
다른 국가에서는 죽음이란 어둠을 몰고 오는 분위기라면
이집트인들은 죽고 나서도 일생 자신이 좋아하던 것들과 함께 묻히기를 원했었죠.
이는 사후에도 현세와 같이 생활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심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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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렇다면
이제 길고 긴 역사를 지닌 고대 이집트는
어떤 식으로 구분될까요?
역사가들은 이집트 역사를 크게 세 시기로 나누는데요
-기원전 3100년경부터 2040년까지는 이집트의 고왕조 시기
-기원전 1567년까지는 이집트의 중왕조 시기
-페르시아의 속국이 되는 기원전 332년까지는 신왕조 및 후기왕조 시기라고 합니다.
3천년 정도의 세월을 거쳐오면서
이집트 내부에서도 여러 차례의 세력 다툼이 있어
왕조 사이사이에 ‘중간기’라고 불리는 기간도 있었는데요
어느 국가나 마찬가지지만 외세뿐 아니라
내부에서도 다툼이 많은 사실을 알 수가 있죠.
사실 좀 더 세분화해서 나누자면
선왕조, 원왕조, 초기왕조 등등 많이 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전문적인 공부는 패스하고
간단하게 세 왕국으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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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고왕국부터 시작하자면
고왕국 시기 동안 고대 이집트의 왕권은
파라오의 중앙집권적인 전제군주의 힘이 강화됩니다.
우리가 이집트 하면 먼저 떠오르는 피라미드가
이 고왕국 시기에 지어졌는데요.
당시, 사람들은 왜 태양신 ‘라’의 이름으로 피라미드를 건축했을까요?
예전 피라미드 영상에서도 얘기 드렸지만
피라미드 건축 노동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농사를 짓지 않는 기간 동안, 노동에 대한 급료로
빵과 술이 지급하며 실업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남의 무덤을 위한 건축물을
쌓아 올리는 동기부여가 있어야 했겠죠.
당시 이집트에는 태양신 ‘라’가 있었는데요.
‘라’는 헬리오폴리스를 통치하는 지역신부터 출발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고대 이집트의 핵심적인 신이 됩니다.
‘라’는 태양신이었지만 동시에 창조의 신이기도 했죠.
사람들은 자신들이 착실하게 이집트의 신들을 모셔야만
신들이 우주의 질서를 유지한다고 믿었습니다.
파라오가 죽으면 신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피라미드를 지어서 파라오를 만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죠.
파라오는 신과 동격
혹은 신과 가까운 존재로 여겨졌는데요.
그럼, 파라오는 모든 걸 마음대로 했을 것 같지만
평소, 신처럼 보여야 한다는 기대를 받아서
많은 행동에서 제약이 따랐기 때문에
자유로운 측면에서는 도리어 갑갑한 생활을 하기도 했죠.
고왕국에서는 문자에 대한 능력이 뛰어나서
두 가지 형태의 글이 존재했는데요.
로제타석에서도 다루었던 상형문자와 데모틱 문자로
상형문자는 신성함을 나타내기 위한 글자였으며
데모틱은 좀 더 대중적으로 쓰이는 글자였습니다.
또한, 대중 종교로는 부적, 마법 등을 믿었는데
특히 고양이를 숭배하는 믿음도 수용하면서
여러 이집트 벽화 속에서도 고양이를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부유한 생활을 만끽하던 고왕국 이집트는
기원전 2250년경에 아주 큰 홍수가 지나가게 되었고
생존자들은 누가 다음 파라오를 차지해야 하는 세력 다툼으로
수백년의 중간기를 보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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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흘러, 세력 간의 갈등은 점차 정리되고
중왕국으로 접어들어,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하며
지도자들에게서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새로운 지도자들은 나일강 하류 누비에서 온 국외자들이었는데
그와 함께 파라오와 대적할만한 신의 존재를 만들어내죠.
그중 유명한 신으로는 ‘숨겨진’이라는 뜻을 지닌 ‘아문’신이 있었는데요
아문의 유명세는 상당히 넓은 지역으로 퍼져
그리스인들은 제우스와 이 ‘아문’을 동일하다 여겼습니다.
수천년이 흘러서 알렉산더 대왕 시절 때는
본인을 ‘아문의 아들’이라고 칭하기도 했었죠.
신왕국 시대에 가서는 ‘아문’은 ‘라’신과 결합하게 되고
이는 엄청난 권력을 지니게 되는 ‘아문-라’신을 만들어내어
파라오까지 위협하게 됩니다.
다시, 중왕국 시대로 돌아가서
중왕국 시대도 워낙에 긴 기간이라 한마디로 축약할 수는 없지만
고왕국 시절 때보다는 다른 지역을 정복하거나
혹은 정복당하거나 하는 경험을 겪게 됩니다.
이 시기의 큰 사건 중 하나는 인류 문명사상 최초의 군사적 정복이
기원전 17세기에 일어나게 됩니다.
아시아 계통의 힉소스인들이 전차를 끌고
이집트의 중왕국을 침공해서, 약 100년 정도 통치하게 되죠.
그런데, 힉소스인들이 지배를 하는 동안
이집트를 부숴버리는 데 흥미를 지니는 것 보다는
되려 평온한 이집트 문명에 동화되어 갔습니다.
그 와중에 이집트인들은 힉소스인들을 통해
새로운 문명인 전차기술과 군사력에 대한 연구를 한 후
역으로 힉소스인들을 이집트에서 쫓아내고
강력해진 군사력으로 대외팽창까지 시도하여
이라크의 유프라테스강 상류까지 확장하게 되죠.
이 과정에서 이집트 문명과 함께 전차 기술이
서아시아까지 전파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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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흘러, 그간 지리학적으로 고립되었던 이집트는
‘신왕국’시기에 접어들어, 대외적인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 시기의 신왕국 이집트는 제국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는데요
이제 그들은 금과 노예들을 얻기 위해 남쪽으로 진출하기도 합니다.
신왕국 파라오들은 국력을 군사적인 확장에 초점을 맞췄고
이는 이집트인들과 아시리아인들과의 갈등
다음에는 페르시아인들, 그리고 다음에는 알렉산더 대왕
그리고 마침내는 로마인들과 부딪히게 됩니다.
당시로서는 이집트 이외에도
주변 국가들이 성장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힘과 힘이 부딪히는 상황에서
이집트 또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를 했던 것이죠.
신왕국 시절에 유명한 왕으로는 ‘투탕카멘’이 있습니다.
사실 투탕카멘은 18살의 이른 나이에 죽은 왕으로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길 시간도 없었는데요.
투탕카멘이 유명한 이유는
대다수의 파라오들의 무덤은
오래전에 고대 사람들에 의해 도굴당해서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지만
투탕카멘의 왕의 무덤은
1922년 즉, 20세기에 접어들어 영국인들이 도굴하여
크게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겁니다.
이전까지 실체를 알 수 없었던 고대 이집트 문명에 대한 실마리가 될 수 있었던 거죠.
투탕카멘을 주제로 한 책이 무수하게 많이 쓰이고
또 학자들 중에서는 투탕카멘을 연구하기 위해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고대 이집트 역사를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으로 나누어 정리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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