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은
카리브해 지역의 섬 국가로
소앤틸리스 제도의 남동쪽, 윈드워드 제도에 위치해 있으며
수도는 킹스타운입니다.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의 영어명은
St.Vincent and the Grenadines이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외국의 국호나 지명을 한국어로 옮길 때
and와 the를 생략하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에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으로 부릅니다.
1498년 1월 22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사라고사의 세인트빈센트 축일에 이 섬을 발견하면서
처음에는 섬을 두고 St. Vincent of Saragossa라고 불렀습니다.
이후, 스페인 사람들이 스페인 남부 지역의 그라나다를 붙이면서
오늘날의 국가명은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이 되었습니다.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의 국민들은
국기를 두고 ‘보석(The gems)'이라 말하는데
왼쪽부터 파랑 노랑 초록을 1:2:1로 배치한 3색기입니다.
1979년에 사용한 기존 국기에서는 3색의 비율이 같고
빵나무를 배합하여 디자인하였지만
1985년 정권이 바뀌면서 가운데 빵나무를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대체하고
3색의 비율을 현재대로 수정하였습니다.
노랑 바탕에 있는 초록의 다이아몬드 3개는
국가의 승리를 뜻하는 ‘V'자 모습이며
‘앤틸리스 제도(諸島)의 보석’임을 의미합니다.
파랑은 하늘과 바다를
노랑은 국민들의 밝고 따뜻한 기질과 금빛 모래를 나타내며
초록은 푸른 식물과 국민의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세인트빈센트는 중앙아메리카의
카리브해 윈드워드 제도에 있는 섬나라로
카리브해가 대서양과 만나는 동쪽 경계의 남쪽 끝에 위치해 있습니다.
인근 국가들로는 세인트빈센트의 북쪽으로
세인트루시아(Saint Lucia)가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에는 바베이도스(Barbados), 남쪽에는 그레나다(Grenada)가 있습니다.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의 국토 면적은 약 390km²로
이는 전라남도 완도군과 비슷한 정도의 크기입니다.
2021년 기준 약 11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이는, 인구수 세계 180위권 정도로
경기도 여주시 인구수와 비슷한 수치입니다.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의 1년 총 GDP는
2021년 기준 약 8억 달러로 세계 181위이지만
1인당 GDP는 약 9,500달러로 세계 80위권에 놓여있습니다.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의 공용어는 영어이며
국민들의 일상생활에서는 과거 유럽과 서인도 제도의 노예들이 사용하던 혼성어인
크리올어를 사용합니다.
종족구성은 흑인이 약 60%, 혼혈인이 20%
그 외 동인도인과 카리브계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의 종교는
약 75%의 인구가 개신교를 믿고 있으며
10%가 로마가톨릭교, 그 외 소수 종교 등을 믿고 있습니다.
2-1. 역사(식민지 이전 시대)
16세기에 유럽인들과 아프리카인들이 당도하기 전에는
시보니(Ciboney), 아라와크(Arawak), 카리브(Carib)를 포함한
다양한 원주민 부족들이 이 지역에서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부족들은 남아메리카의 오리노코 계곡(Orinoco Valley)에서 생겨났으며
트리니다드와 소앤틸리스 제도를 거쳐 북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1498년, 콜럼버스가 세인트빈센트 근처를 지날 무렵에는
카리브 부족이 몇 세기 전에
아라와크 부족을 몰아낸 후, 섬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콜럼버스와 스페인 정복자들은 세인트빈센트와
근처에 있는 더 작은 그레나딘 섬들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대신 중남미 지역에서 금과 은을 캐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이들은 1511년 왕실의 허가를 받은 이후
세인트빈센트와 근처 섬들로부터 카리브 부족들을 몰아냈는데
발견 초기에는 섬에 정착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카리브 원주민들은 18세기까지 세인트빈센트에
유럽인들이 정착하는 것에 맞서 극렬하게 저항했습니다.
세인트빈센트 주변 지역인 카리브해를 둘러싸고
유럽인들의 섬들에 대한 정복 활동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세인트루시아 혹은 그레나다에서 탈출한 아프리카 노예들은
세인트빈센트에서 은신처를 찾아 카리브 부족과 혼인하였는데
이들은 “검은 카리브(black Caribs)라고 불렸습니다.
세인트빈센트의 첫 번째 식민지를 수립한 유럽인들은
프랑스 정착민들로, 아프리카 노예들을 데려와
농장에서 커피, 담배, 인디고, 옥수수 등을 재배했습니다.
한편 유럽에서 일어난 7년 전쟁에서
영국이 프랑스에게 승리를 거두며
1763년 파리 조약에 따라 세인트빈센트는 영국에 양도되었습니다.
섬에 대한 통치권을 갖게 된 영국은
샬롯 요새 (Fort Charlotte)를 건설하면서
섬의 농장에서 일할 아프리카 전쟁 포로 노예들을 데려왔습니다.
하지만, 검은 카리브족 (Black Caribs)이 영국 주둔군에 저항하며
영국을 상대로 공개적 대치 상황에 돌입하게 되었고
1769년 제1차 카리브 전쟁(First Carib War)이 시작되었습니다.
2-2. 역사(1, 2차 카리브 전쟁)
제1차 카리브 전쟁(1769–1773)은
영국이 검은 카리브족(Black Carib)의 영토로
식민지를 확대하려는 시도에 따라 일어났습니다.
검은 카리브족 족장인 조셉 샤토이어 (Joseph Chatoyer)는
1769년 영국 군대 조사 원정에 맞서
섬의 풍상측(windward side)을 성공적으로 지켜내며
영국 식민지 정부 대표자들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1772년 영국 사령관들은 카리브족을 굴복시키고
섬에서 몰아내기 위해 대규모 군사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하지만, 섬의 풍상측에 대한 영국의 무지와
카리브족의 섬의 험준한 산악 지형을 활용한 효과적인 방어는
영국의 전진을 둔화시켰습니다.
영국 본토 런던에서는 세인트빈센트 원정에 대한
소모적 전투에 대해 정치적 반대적 움직임이 나타났고
동시에 군사적 상황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1773년, 섬의 영국 지역과 카리브족 지역 사이에
경계를 구분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1778년, 프랑스가 미국, 스페인과 우호조약을 체결하면서
프랑스 동맹국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간에
5년 동안 영국-프랑스 전쟁이 벌어집니다.
전쟁 기간에 잠시, 프랑스가 세인트빈센트를 차지하였지만
1783년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에 따라
다시 영국이 지배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편, 영국과 검은 카리브족 (Black Caribs) 사이에
아슬아슬했던 평화는 1795년
제2차 카리브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검은 카리브족은 다시 한번, 조셉 샤토이어가 이끌었으며
마르티니크(Martinique)섬에 있던 급진주의자
프랑스인 빅토르 휴고 (Victor Hugues)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카리브족은 킹스타운 근처 인근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 섬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킹스타운 지역은 영국 증원군에 의해
카리브족의 몇 차례 직접적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았습니다.
제2차 카리브전쟁이 시작된지 3년째인 1797년
영국은 랠프 애버크롬비(Ralph Abercromby) 장군 중심으로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여, 카리브족의 저항을 무너뜨렸습니다.
전쟁의 종결을 알리는 평화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5,000명 이상의 검은 카리브족 부족민들이
세인트빈센트에서 추방되었으며
강제 수용소에서 절반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2-3. 역사(화산 폭발과 독립)
1834년 영국에서 노예제 폐지가 선언되면서
세인트빈센트에서는 1838년 완전한 노예 해방이 이루어졌습니다.
노예 해방이 이루어진 직후에는, 많은 지주들이 재산을 포기하고
자유를 얻은 노예들이 땅을 경작하였지만
경제는 침체기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에 따른 농장의 노동력 부족은
1840년대 포르투갈 이민자들과 1860년대 동인도인들의 이민을 불러왔습니다.
하락한 세계 설탕 물가는
20세기로 전환되는 시기까지 경제를 침체시켰으며
이 때문에 과거에 노예였던 노동자들과
이민한 노동자들 모두에게 상황은 여전히 가혹했습니다.
1902년, 수프리에르 화산이 폭발하였는데
이는 1812년의 화산 폭발로 영토의 상당 부분이 파괴된 지
90년 만에 대규모 폭발이었습니다.
두 번째 화산 폭발로 인해,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에서는
1,500~2,000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사망하였고
대부분의 농지도 피해를 입었습니다.
자연과 거주 환경이 열악한 세인트빈센트의 정치 체제는
1877년 왕령 식민지(Crown Colony)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1925년 입법 위원회(Legislative Council) 수립
1951년 보통 선거가 허가되었습니다.
이 시기 동안 영국은 통일 정부 상태로 여러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세인트빈센트와 다른 윈드워드 제도에 대해
병합 시도를 했지만 실패하였습니다.
1979년, 또다시 수프리에르 화산이 폭발하였고
이때는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광범위한 농지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같은 해, 10월 27일,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은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는데
이 날짜는 현재 국가 독립일이자 공휴일입니다.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은 영 연방 내에 남기로 선택했으며
이에 따라 찰스 왕(King Charles)이 군주의 자리에 오르고
총독이 통치를 대리하게 되었습니다.
2-4. 역사(근대사)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의 초대 총리는
중도좌파 세인트빈센트 노동당의 밀턴 카토(Milton Cato)가 맡았습니다.
카토가 재임한 시기 동안
1979년 12월에 유니언 아일랜드에서
Lennox 'Bumba' Charles가 주도한 짧은 반란이 있었습니다.
그레나다에서 일어난 혁명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Charles는
유니언이 중앙 정부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반란은 Charles가 체포되면서, 빠르게 종식되었고
1980년대 초에 일련의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1984년 총선에서는 중도우파인 신 민주당의
제임스 피츠-앨런 미첼(James Fitz-Allen Mitchell)이
총리로 선출되었습니다.
제임스 미첼은 연속으로 3선에 성공하며
2000년까지 총리직을 맡으며
지역 통합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제임스 미첼의 재임 기간 중에도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의 최대 고민거리인
자연재해는 계속해서 발생하였습니다.
1980년과 1987년에 발생한 허리케인은
많은 바나나와 코코넛 농장들에 피해를 주었고
1998년과 1999년에도 허리케인이 심하게 발생했는데
허리케인 레니(Hurricane Lenny)는
섬의 서부 해안에 광범위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국민들은 경제와 자연히 재해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제임스 미첼의 반대 진영 통일 노동당을 이끄는
랠프 곤살베스(Ralph Gonsalves)에게로 관심이 쏠렸습니다.
2001년부터 총리직을 맡게 된 랠프 곤살베스는
좌파 정치를 대표하는 “랠프 동무(Comrade Ralph)”로 불렸고
그는 과거 유럽 국가들이 대서양에서
노예무역을 자행했던 것에 대해
카리브 국가들에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곤살베스는 2005년 재선에 성공했으며
2010년에는 3선, 그리고 2015년에는 4선에 성공했습니다.
2009년, 곤살베스는 당시 국가의 수장인
엘리자베스 II세 여왕의 권한을 없애고, 대통령으로 대체하며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을 공화국으로 세우자는 안건을 제시했습니다.
새로운 헌법 채택은 3분의 2에 해당하는 과반수가 필요했는데
국민투표는 55.64%로 반대표가 성공하며, 안건은 부결되었습니다.
2020년 11월, 총선에서 랠프 곤살베스는
총선에 성공하면서, 다섯 번째 연임하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2021년 4월, 또다시 수프리에르 화산이 폭발하며
화산재가 대기 중으로 수 마일을 날아갔고
분화로 인해 며칠 동안 약 16,000명이 대피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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