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중동부에 자리 잡은 케르만샤 근방에는
높이 솟아오른 베히스툰 산이 있습니다.
이 곳에는 기원전 522년부터 왕의 자리를 차지한
다리우스 1세의 등극 과정이 쐐기문자로 기록되어 있죠.
베히스툰 비문은 페르시아 제국의 왕들의 남긴 비문 중
그 역사적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어 ‘고대 비문의 여왕’이라고도 불립니다.
다리우스 1세가 왕이 되기 전에 페르시아는 정치적 혼란기를 겪고 있었는데요.
페르시아는 메디아 왕국의 종속국이었는데
키루스 2세의 주도 아래 독립과 함께 메디아를 멸망시키며
나라를 통째로 집어삼켰습니다.
이후, 오리엔트의 강대국들을 차례차례 정복해가던 키루스 2세는
후손을 두고 세상을 떠났지만
자식들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국가가 분열되고 있었죠.
이러한 정치적 혼란기에
페르시아 제국 전체를 손에 거머쥘 수 있다고 판단한 다리우스 1세는
결국 쿠데타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는 정복 군주로서 카스피 해에서 인도, 마케도니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여
아케메네스 왕조의 판도를 넓혀갔죠.
다리우스 1세는 ‘사트라프’라는 총독 제도를 확립하고
상업을 장려하는 등 페르시아를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러던 중, 페르시아의 서쪽 끄트머리에 있는
이오니아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죠.
이오니아 지역의 도시국가들 중 밀레투스의 통치자 ‘아리스타고라스’는
더 확고한 지위를 갖고자 다리우스 1세에게 군대를 요청하였고
그리스의 낙소스 원정을 공략하게 됩니다.
하지만 낙소스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에 ‘아리스타고라스’는 자신의 입지가 좁혀지자
반대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끌어들여 페르시아에게 칼끝을 겨누었죠.
이오니아의 반란은 수년 만에 제압되었고
다리우스는 이오니아를 도와주었던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이대로 놔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그리스인들을 얕보았던 페르시아는
칼키디케 반도에서의 조난, 마라톤 전투 등
연이어 아테네에게 패배를 맛보게 되었죠.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이 약소한 아테네군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은
페르시아 속국들에게 빈틈을 보였고
이집트 등의 속국은 페르시아에게 반기를 들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고령의 나이가 되었던 다리우스 1세는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가 왕위를 물려받았죠.
크세르크세스 1세는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고
아버지의 숙원이었던 그리스 침공을 나서게 됩니다.
기원전 480년, 그리스 연합군과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입구라 할 수 있는 좁은 길목.
테르모필레와 그 근처인 아르테미시움에서 격돌이 벌어지게 되죠.
테르모필레 지역에서 벌어진 페르시아군과 스파르타 중심 그리스 연합군의 전투에서는
그리스 연합군이 끈질기게 버텨냈지만,
결과적으로는 전멸당하게 됩니다.
이 전투는 영화 <300>으로도 유명하며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채널 내 재생목록
10분 세계사에 있는 ‘테르모필레 전투’ 편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네요.
레오니다스의 정예부대가 전멸당했다는 소식은
가까스로 페르시아 함대를 막고 있던
아르테미시움의 그리스 해군에게도 전해졌고
이에 어쩔 수 없이 그리스 해군도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테네를 포함한 아티카 일대는 살육당하기 시작했고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불태움으로써
그리스 전역에 대한 지배를 확신하게 되죠.
이때, 그리스 연합함대는 살라미스에 집결되어 있었는데
페르시아는 이참에 함대를 모조리 없애느냐
아니면 무시해버리고 펠로폰네소스로 가서 스파르타를 점령할까에 대한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이 벌어지기 이전
아테네의 라우리온 광산에서는 은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는데요.
아테네인들은 시민의 재산이니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나누자고 했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가 또다시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은으로 아테네 해군을 강화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 은을 이용한다면 그리스 제일의 해군국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아테네는 마라톤 전투의 활약에서도 보였듯이
원래는 육군이 발달한 도시국가였습니다.
해양으로는 무역은 발달했지만, 해군력이 약한 상태였죠.
그래서, 다른 해양도시였던 에기나와의 전투에서 항상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평소 강력한 해군의 필요성을 주장했었고
이에 다른 중장보병 파들이 극심한 반대를 하고 있었지만,
은광의 발견으로 해군 증강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죠.
한편, 살라미스섬이냐 스파르타 공략이냐를 고민하던 크세르크세스의 선택은
살라미스 공격이었습니다.
이에 테미스토클레스가 크세르크세스에게 첩자를 보내
살라미스에서 모든 함대가 후퇴할 것이라는 가짜 정보를 흘려보냈다고도 하지만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는 것 같네요.
어쨌든 크세르크세스는 아테네가 자랑하는 해군을 전멸시키고 나면
스파르타가 있는 펠레폰네소스는 알아서 항복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살라미스 해전에 동원된 병력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리스 측에서는 378척의 삼단노선이 준비되었다고 했죠.
그중 180척이 아테네의 전함으로 약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아테네의 물량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앞으로 아테네의 입지가 커지는 것이 두려웠는지
총지휘관은 테미스토클레스가 아닌
스파르타인으로 하자고 전체 함대 지휘권에 합의하였죠.
전쟁이 코앞이고 비상사태에서도 내부 정치싸움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권력이란 게 뭔가 싶기도 합니다.
400척이 안 되는 그리스 연합군에 반해
페르시아에서는 약 1200대가 동원되었는데요.
그리스로 오는 동안 태풍으로 파괴된다든가, 아리테미시움에서의 손실을 감안한다면
살라미스에서는 약 600에서 800척으로 추측된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리스 연합군의 2배 정도가 되는 병력이었죠.
살라미스 해협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리스 함대는
아테네 함대가 좌편, 스파르타 함대가 우편,
그리고 다른 함대들은 중앙에 포진했습니다.
당시 관습으로는 최고 사령관 부대가 우익에 포진했기 때문에
스파르타 함대가 포진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스 연합군 전체 함대보다 2배는 더 많았던 페르시아군의 함대는
밤중에 살라미스 근방까지 와서 기다리다
동이 트고서 곧바로 해협을 봉쇄했습니다.
페르시아의 함대는 그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해협에서 3줄로 배치되었고
이 중 가장 강력했던 페니키아 함대가 우익을 담당하였죠.
이 외에도 크세르크세스는 수백 명의 분대를 해역에 배치하여
배가 난파해서 떠내려올 때 도망가는 그리스군들을 생포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크세르크세스 왕은 살라미스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옥좌를 만들었고
건방지게 여겨지는 그리스 연합군의 전멸을 기대하며
영화관람 마냥 구경 준비를 마쳤죠.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 함대의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 왕의 기대와는 달리 전투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는데요.
수적 우세와 항해술 측면에서는 페르시아군이 우위를 보이고 있었으나
항해술을 살릴 수 있는 곳은 넓은 바다였으며
살라미스 해협의 좁은 바다에서는
평소 지리적으로 익숙했던 그리스군이 유리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도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육군을 맞서 싸우는 동안
아테네는 아르테미시움의 좁은 해역에서 페르시아군과 팽팽하게 싸울 수 있었죠.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유리한 싸움을 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좁은 살라미스 해협이 적당하다고 여겼던 겁니다.
페르시아군은 먼바다를 항해하며
좁은 해협을 공격하는 데 있어 신중을 가하기 위해
동이 틀 때까지 공격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요.
그러는 동안 그리스군은 전투에 대한 단단한 대비를 하고 있었고
테미스토클레스는 병사들을 독려하며 만반의 준비를 가하였습니다.
그리스 연합군과 페르시아군의 배가 조우했을 때
갑자기 그리스 연합군 코린토스인들의 배가
전선을 벗어나 북쪽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죠.
이를 본 페르시아는 그리스인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것이라 판단했고
코린토스인들 쪽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페르시아의 함대를 끌어들이기 위한 유인책이었으며
페르시아 함대가 접근하는 데 있어
해협이 급격히 좁아지며 자신들의 함대끼리 서로 부딪치기까지 했죠.
질서정연하게 수비 대형을 갖추고 있던 그리스군은
페르시아군의 혼란을 기다렸습니다.
상호 간에 배와 배끼리 부딪히면서 육탄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페르시아인들은 가볍게 무장을 한 상태였는데 반해
그리스 해군은 호플리테스라는 중장보병 형태로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죠.
그리스인들의 돌격에 페르시아인들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첩첩으로 쌓여있던 페르시아의 배는 첫 줄과 둘째 줄이
그리고 둘째 줄과 셋째 줄의 배들이 충돌하였죠.
심지어는 페르시아 해군의 우익에 있던 페르시아 함대의 제독인
아리아비그네스가 전투 초반에 전사하면서
페르시아군은 지휘관이 없이 싸우게 되었습니다.
충각을 단 그리스 배는 페르시아의 배를 가라앉히고
좁은 만 안에 꽉 들어찬 페르시아 함대는
일방적으로 불리한 싸움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죠.
여기다 페르시아군의 뒤쪽에서는
돌풍이 불면서 같은 편끼리 부딪쳐 난파했습니다.
그리스 측에서는 아테네에서 은광이 발견되었을 때
테미스토클레스가 당장에 모든 시민들에게 나눠주지 않고
해군력을 강화시켰던 것이
결과적으로 살라미스 해전에 대한 대비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었죠.
살라미스 해전은 그 규모가 상당히 컸기 때문에
전체적인 묘사는 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전황을 처음부터 보았던 자는
언덕 위에 옥좌를 준비해둔 크세르크세스가
전투의 흐름을 볼 수 있었겠죠.
그는 우세를 자랑하던 페르시아의 함대가 꼼짝도 못 하는 것을 보며
아마도 큰 분노를 느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신하들은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리스 해군에게 해상 주도권을 빼앗기면 퇴로가 끊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죠.
게다가 페르시아의 속주들이 패전 소식 알게 된다면 반란이 일어나
왕의 퇴로를 방해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이로써, 페르시아 함대는 바다를 통해 그리스를 정복하는 데 실패하였고
마르도니우스가 남아서 육군을 이끌고 그리스 공격을 계속하기로 했죠.
그리스 연합군은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믿기지 않는 승리를 자축하였고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나 신의 은총에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르렀는데
마르도니우스군이 그리스를 노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죠.
봄이 되자, 테살리아에서 겨울을 보낸
마르도니우스의 육군 4만 명이 남하했고
플라타이아이 시 근교에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그리스 연합군에서는 스파르타의 장군 파우사니아스 지휘하에
중장보병 부대 중심으로 약 8만 정도의 보병이 준비하고 있었죠.
페르시아군은 근방에 있던 병력을 모두 모아
10만 정도로 추정되며,
승리를 조급히 서두른 탓에
마르도니우스가 허를 찔려 패배를 맞이하게 됩니다.
마르도니우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여
모든 페르시아군은 퇴각하게 되었죠.
살라미스 해전 후 에게 해에 진격한 그리스 연합군은
사모스 섬에 있던 페르시아 함대도 물리치고 미칼레 곶도 점령하여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들도 페르시아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최근까지 다루었던 이오니아 반란, 마라톤 전투,
그리고 테르모필레 전투에 이어 살라미스 해전까지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에 대해 정리해 보았는데요.
거대한 페르시아군을 맞아
그리스인들의 단합력을 보여준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었던 밀티아데스는
같은 아테네인들의 정치싸움에 휘말려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죠.
또한,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를 구해낸 영웅 테미스토클레스 역시
아테네의 정치싸움으로 인해
다수결의 원칙대로 국가에서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로 망명하였고
페르시아로서는 그리스의 인재가 추방당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페르시아 지방의 총독 사트라프 자리를 내어 주었죠.
그럼, 오늘도 끝까지 시청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평안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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