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고대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 요소의 사건들로는 역시
삼국지나 초한지를 떠올릴 수 있는데요.
중국의 2~3세기 후한 말기와
삼국시대를 배경으로한 삼국지연의 소설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인기가 많아
게임으로도 다수 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서양 고대 역사에서
삼국지와 비슷한 상황이라 할 수 있는 전쟁은
바로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시대적 배경은 기원전 431년부터
기원전 403년까지 약 30년 정도의 시기였습니다.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주축이라 할 수 있었죠.
이 전쟁이 있기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거대한 적이었던 페르시아를 맞아 싸움에 임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 같은 싸움이었지만 수차례의 육상전과 해전을 치르면서
그리스인들은 단결력과 함께 승리를 맛보았죠.
그리스에는 평화의 시기가 오는가 싶었지만
필요할 때는 민족과 동지애가 발생하더라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
이번에는 그리스인들끼리의 기나긴 싸움으로 인해
폴리스들을 황폐하게 만들어 나갔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고서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은 적게는 20%
많게는 절반에 가까운 국력을 잃었으며
그리스 세계의 질서는 크게 훼손되어
사람들의 평화로운 일상도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죠.
심한 경우에는 아예 멸망을 맞이한 폴리스들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고대 그리스 세계가 붕괴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그리스 최악의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어떤 이유로 일어났을까요?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페르시아 침공을 가장 잘 막아내었던 아테네의 세력이
전에 없이 강해졌는데서부터 출발합니다.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고 그리스인들은
다음 외국인들의 침략에 대비하자는 뜻에서
델로스 동맹을 창안하게 됩니다.
델로스 동맹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 도시와 에게해의 섬들로 구성되었죠.
무시무시한 페르시아를 포함해
이민족의 침입을 막아주겠다는 아테네가 든든하긴 했는데
이제는 아테네가 다른 폴리스들 위에서 제국처럼 군림하게 됩니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 회원국들에게 회비를 거두었고
그 돈을 운용해 해군력을 함께 지켜간다는 명목하에
해상권을 장악하여 병력들을 총괄하게 되었죠.
해상권을 장악한 아테네의 해군들로 인해
작은 섬나라들은 점점 더 아테네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테네는 강력해진 세력으로
자신들의 문명을 최고조로 꽃피움과 동시에
민주주의를 더 확고히 발전시키며
다른 폴리스들에게 후원을 하며 민주주의를 퍼뜨렸는데요.
이에 다수의 폴리스들이 과두제에서 민주제로 돌아서자
귀족 중심으로 국가의 기틀을 잡고 있었던
스파르타로서는 아테네가 달가울 리가 없었습니다.
여기다, 반 아테네 성격을 갖고 있던 폴리스들은
아테네를 견제할 수 있는 건 스파르타 밖에 없다고 띄워주는 분위기로 인해
어느새 그리스 세계는 아테네측과 스파르타측이
서로 견제하는 형태가 되어가고 있었죠.
아테네와 스파르타. 가장 힘이 센 두 국가는
그래도 웬만하면 크게 부딪히고 싶어하진 않았습니다.
큰 세력이 맞붙게 된다면 그만큼 서로에 대한 피해가 막대할 것이고
나아가 그리스 지역의 많은 국가들도 불지옥이 될 것이 뻔했었죠.
그래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기원전 446년에 평화조약을 맺는데
그 조약의 골자는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간섭하지 않고,
스파르타는 델로스 동맹에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소규모의 갈등은 간간히 벌어지긴 했어도
강한 힘을 갖고 있던 두 나라가
정면으로 부딪히는 형국은 피하는 상황이 이어졌죠.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전쟁 원인은
강대국들끼리의 정면충돌이 아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의 암살 사건처럼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도 전혀 예상치 못한 데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기원전 436년, 케르키라의 식민지 이었던
에피담노스 안에서 정권을 둘러싸고 당파 간에 정치 분쟁이 일어났는데요.
민중파와 과두파가 대립을 벌이다
결국 민중파가 과두파를 내쫓는데 성공합니다.
그러자 쫓겨난 귀족들은 에피담노스 주변의 비헬라스인
즉, 이민족과 연대하여 민중파에 칼을 겨누었죠.
다급해진 에피담노스의 민중파는
자신들을 식민 지배하고 있던 국가인 케르키라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케르키라는 에피담노스 내의 분쟁에서
민중파가 찾아오자 도움을 거절하는데요.
그도 그럴 것이 케르키라의 정치 체제는 과두체제였기 때문에
민중파의 도움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던 겁니다.
그러자 에피담노스의 민중파는
다른 지역인 코린토스인들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뻗는데
코린토스는 본래 케르키라를 지배했던 자들이었죠.
때마침, 코린토스는 케르키라와 라이벌 구도처럼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서
에피담노스 민중파의 제의를 받아들이며 케르키라를 압박하게 됩니다.
코린토스는 케르키라와 에피담노스 사이에 있던
아폴로니아로 파병하였고
일이 이렇게 되자 에피담노스의 귀족파는 케르키라에 도움을 요청하였죠.
중간 정리를 하자면
에피담노스의 민중파와 귀족파가
각기 코린토스와 케르키라의 세력에 붙게 된 셈입니다.
에피담노스 내전은
어느새 코린토스와 케르키라 간의 대결로 일이 커졌고
양쪽은 에피담노스를 두고 처음에는 협상을 했지만
협상은 실패로 돌아가며
결국 기원전 435년에 해전을 치루게 되었죠.
어떻게 생각하면 남의 나라 정치 싸움에 휘말린
큰 세력들끼리의 전투가 벌어졌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코린토스는 75척의 선단에
2,000명의 중무장보병을 에피담노스로 보냈습니다.
이에 케르키라에서는 악티온 곶에서 80척의 선단으로 맞섰죠.
그리고 이 해전에서 케르키라가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상황은 케르키라의 승리로 종결이 될 법도 했지만
국지전에서 패배했던 코린토스는
이제 좀 더 본격적으로 대대적인 전쟁준비를 시작하게 됩니다.
강력한 해군력을 자랑하는
코린토스의 화를 돋구었던 케르키라는
다음에는 혼자서 막아내기가 곤란해졌는데요.
그동안 동맹국이 없었던 케르키라는
이참에 초강대국 아테네에게 동맹을 요청했고
아테네는 잠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코린토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국가였기 때문에
이전에 있었던 스파르타와의 평화조약에 따르면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관련해 간섭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아테네의 힘이 필요했던 케르키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득합니다.
“우리 케르키라에 아테네 해군이 상주하고 있다면
이는 앞으로 펠로폰네소스를 견제하기에 좋은 지정학적 위치입니다.” 라며
동맹조건을 제시했죠.
결국 아테네는 케르키라의 손을 잡아주기로 결정합니다.
다만, 스파르타와의 평화조약을 깨뜨리지 않는 선에서 도와주기로 했는데요.
그 내용은 코린토스가 케르키라를 공격할 때는
보호해주는 명목으로 지켜는 주되
아테네가 코린토스를 먼저 공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코린토스와 동맹국들은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케르키라를 공격하였고
전투는 코린토스의 우위로 진행되었죠.
하지만, 케르키라 앞바다에 갑자기 나타난 아테네 함대로 인해
코린토스군은 당황하였고
아테네와의 전쟁은 무리라 여기며 후퇴를 하게 됩니다.
이로써, 코린토스는 아테네에 원한을 가지게 되었고
이제는 칼키디아를 넘어
그리스 세계에서 제멋대로 날뛰는 아테네에 대항하기로 했죠.
아테네 또한 코린토스와 적대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본격적으로 코린토스 주변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아테네는 코린토스의 식민도시 중
자신들과 동맹을 맺고 있었던 포티다이아에 가서
코린토스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했죠.
하지만, 포티다이아와 아테네의 협상은 결렬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아테네에 한을 품고 있던
다른 동맹국들도 함께 아테네에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아테네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하였죠.
오늘은 고대 그리스 최악의 전쟁이라 불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서막에 대한 이야기로 정리해보았습니다.
그리스의 큰 두 세력이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것만은
피하고 싶어 했는데도 불구하고
에피담노스 내전으로 인해 갈등은 점점 더 확대되어 갔죠.
에피담노스 내전은
코린토스-케르키라 간의 분쟁
나아가 코린토스와 아테네의 대결
그리고 결국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만나게 되었습니다.
스파르타의 아르키다모스 왕은
평소 아테네의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와 평소 뜻이 잘 통하여
전쟁을 반대하는 편이었는데요.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동맹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아테네의 횡포를 방관해서는 안된다고 부추겼고
결국 스파르타와 아테네간의 평화조약은 깨져버리게 됩니다.
아테네의 페리클레스는 웬만해서는 스파르타를 피하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전쟁에는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죠.
페르시아 전쟁 이후로 막강한 해군력을 자랑했던 아테네는
해군 경험도 다수 있어 여러 면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여기다 그동안 확보해놓은 해상교통로 덕에
펠로폰네소스의 국가들보다 자금력도 풍족한 편이었죠.
그리고 과두정치를 반대하는 민중들의 심리를 건드려
민주주의 국가라는 명분을 내세운다면
스파르타 쪽의 수많은 사람들도
자신들 쪽으로 돌아설 것이라 믿었습니다.
다음 세계사 영상에서는 지난 영상에 이어
펠로폰네소스 전쟁 3번째 영상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끝까지 시청해주셔셔 감사드리며
평안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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