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6세기 초, 오리엔트 지역은
메디아, 신바빌로니아, 리디아, 이집트 4강국이 대립하던 시절로
기원전 590년에는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 키루스 2세가 태어납니다.
그는 메디아의 속국이었던 변방 페르시아에서 성장하여
페르시아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메디아, 리디아, 신바빌로니아를 점령하기에 이르죠.
비슷한 시기, 도시 국가 아테네에서는
주변 작은 지역으로 식민지 활동을 펼쳐나가다
시간이 갈수록 빈민들이 늘어나면서
귀족과 평민 그리고 노예 간에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솔론이 금권정치를 통하여 정치 개혁을 시작하였고
이로 인해, 평민들의 정치참여와 함께
권한이 강해지기 시작했죠.
하지만, 급격한 정치 개혁은
권력층과 빈민층 양쪽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였고
결국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빈민층의 지지를 얻으며
정치깡패를 동원해 독재를 펼치게 됩니다.
한편, 키루스 2세의 영토확장으로 시작된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는
키루스 2세의 사후, 아들인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점령함으로써
기원전 525년. 오리엔트를 통일하게 되는데요
캄비스세 2세의 사후에는
다리우스 1세가 쿠데타를 일으켜
더 이상, 키루스 2세의 직계 자손이 왕위를 물려받진 않게 됩니다.
하지만, 다리우스 1세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뜻을 이어받아
페르시아 제국의 통일과 체계적인 관리
그리고 영토확장에도 힘쓰는 정책을 추진하게 되죠.
다리우스 1세는 기원전 513년부터
페르시아의 북서쪽 발칸 반도 원정을 노리게 됩니다.
그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점령하고
다뉴브강. 독일어로는 도나우강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죠.
이때, 트라키아 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아테네 군사령관 ‘밀티아데스’는
더 이상 페르시아 군의 진격을 막고자
다뉴브 강 다리의 파괴를 시도하게 됩니다.
그리스인들의 이러한 훼방은
다리우스 1세의 야망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으며
밀티아데스는 세월이 지나 마라톤 전투에서 다시 활약하게 되죠.
다리우스 1세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만큼 내부에서의 반란도 많았는데
그는 2년 동안 국내 반란을 모두 제압하게 됩니다.
또한, 혼란을 틈타 독립했던 리디아와 이집트도 다시 점령하며
광대한 페르시아 대제국을 형성하게 되죠.
기원전 510년, 아테네의 클레이스테네스는 스파르타의 도움을 받아
독재 참주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히피아스를 추방시키며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로써, 아테네는 독재를 의미하는 참주정을 끝내고
민주정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죠.
페르시아는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여
수많은 민족을 지배하에 두며
당시 최강의 힘을 보인 제국이였는데 반해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점성적인 형태로 존재하며
국가와 도시 중간 형태의 작은 나라들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아테네는 여러 정치적 권력 싸움을 해오다
이제서야 민주정의 기틀을 잡으며 국내 안정을 꾀하고 있었죠.
수치적으로 비교를 하자면 페르시아의 영토는 480만 제곱킬로미터로
지금 대한민국의 48배에 달하는 면적이었죠.
당시 전 세계 인구는 약 1억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 중, 페르시아의 인구는 2천만 명 정도였는데
지금 시대 기준에서는 많지 않은 인구이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난 인구였다고 하네요.
이는 자원도 그리 풍족하지 못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10배에 해당하는 인구였습니다.
기원전 5세기 무렵에는
현대 사회처럼 통신이 발달하여
서로서로 친절하게 정보 공유를 한다거나
혹은 교통이 발달되어 상호간의 교류를 쉽게 하는 시대가 아니였는데요.
다시 말해, 자신들의 전력과 상대방의 전력을 쉽사리 파악할 수 없는 시대다 보니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의 전력이
얼마나 거대한지 가늠할 수도 없었던 겁니다.
이런 와중에 기원전 499년
페르시아 제국의 정복지 이오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죠.
이오니아 지역은 키루스 2세 치세 때
페르시아의 영역에 속하게 된 곳이었습니다.
이오니아 지역의 도시국가들 중에서는 철학자 탈레스의 고향 밀레투스가 있었죠.
밀레투스의 통치자는 ‘아리스타고라스’라는 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통치하고 있던 밀레투스보다 더 확고한 지위를 갖고자
페르시아의 힘을 빌어 아르타페르네스와 함께 낙소스를 정복하기로 했죠.
아르타페르네스는 다리우스 1세의 동생으로
리디아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아리스타고라스의 제안을 받고 낙소스를 원정을 떠나게 됩니다.
이들의 원정은 기원전 499년 봄에 시작되었고
군대는 4개월간 낙소스를 포위했지만
결국 낙소스 점령을 실패하여 밀레투스로 돌아오게 되죠.
페르시아는 패배에 대한 책임을 아리스타고라스에게 물었고
궁지에 몰린 아리스타고라스는 반란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는 우선 스파르타 왕 클레오메네스에게
함께 페르시아를 공격하자고 했지만 거절당했고
아테네로부터는 페르시아 공격 때 지원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죠.
이오니아 인들은 페르시아 대항에 대해서는
마침, 발전된 민주국가 아테네에서 참주정을 끝내고
민주정으로 바뀌어나가는데 반해
페르시아의 독재는 잘못됐다고 여겨졌고
아리스타고라스의 반란 선동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오니아 인들은 그리스의 다른 도시 국가들에게도
만약 자신들의 반란이 실패하게 한다면
이후에는 분명 페르시아는 그리스 본토를 공격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죠.
이는 반란 세력을 더 모으기 위한 요청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스파르타를 포함한 여러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어마어마한 전력 때문에 함부로 나서질 못하고 있었는데요.
이오니아를 도와주기 위해 나섰던 곳들은 아테네와 에레트리아가 있었고
아테네로서는 이오니아 반란에 참여할 명분도 있었습니다.
아테네의 참주정 시절
독재를 떠올리게 하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장남이었던 히피아스는
2대 참주였지만, 아테네로부터 추방당하게 됩니다.
추방당한 히피아스는 페르시아로 망명하였고
이에 아테네로서는 과거 독재의 상징을 그대로 놔두고 싶진 않았죠.
하지만, 이러한 명분뿐 아니라 실리적으로도 전쟁에 이기게 된다면
폴리스들 중에서 아테네의 위상이 더욱 높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시민들의 욕심도 있었습니다.
아테네는 그동안 그리스 지역에서의
점성적으로 분포하는 작은 세력들을 떠올렸는지
페르시아의 거대한 전력을 가늠하지 못한 채로
아테네가 이오니아에게 지원해준 전함은 고작 스무 척에 불과했었죠.
아리스타고라스가 낙소스 원정을 실패한 다음 해인 기원전 498년
이제 아리스타고라스의 칼은 페르시아를 겨냥하였고
이오니스군의 동맹군으로는
아테네와 에레트리아가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삼단 노선 20척의 전력을 지니고 있던 아테네군은
에레트리아에서 지원해준 5척을 더해 총 25척으로 합류하였죠.
이오니아와 아테네 연합군은 사르디스(sardis) 침공을 위해
먼저 에베소(ephesus)로 집결하였습니다.
이들은 에베소 인들의 안내를 받아 산맥을 지나서
아르타페르네스가 통치하고 있는 사르디스를 노렸는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리스타고라스는
다리우스 1세의 동생이었던 아르타페르네스와 함께 낙소스를 노리던 동지였지만
이제는 서로를 겨누는 적군이 되었던 겁니다.
그리스는 페르시아인들 모르게
사르디스 근방의 아래 도시를 침공하였고
아르타페르네스는 주력군을 이끌고 성을 지키고 있었죠.
전투의 양상은 그리스인들이 기선 제압을 하는 듯했으나
도시 하부에 화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에 성안에 있던 페르시아군이 대거 등장하였죠.
바다 넘고 산 넘고 기진맥진하던 그리스인들과
성에서 정비를 갖추고 있던 페르시아인들의 주력군은 싸움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오니아, 아테네, 에레트리아 연합군은
기세등등하던 사기가 떨어졌으며
사르디스에서 퇴각하여 에베소로 도주하였죠.
한편, 소아시아에 있던 또 다른 병력의 페르시아군은
사르디스가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르타페르네스가 있는 곳으로 집결하게 됩니다.
이제 그 숫자가 더 불어난 페르시아군은
주력부대인 기병으로 그리스군을 따라잡았고
양쪽 군대 간의 크게 차이나는 군력과 사기의 차이로 인해
페르시아군은 그리스군을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죠.
결국, 그리스군에서는 다수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며
이오니아, 아테네, 에레트리아인은 각자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에베소는 다른 말로 에페소스라 하여
이 전투를 에페소스 전투라고 하는데요.
에페소스 전투에서 패배를 맞이한 이오니아는
아테네가 고국으로 돌아갔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수세를 취하여
페르시아에 대한 반란을 이어갑니다.
이오니아는 헬레스폰트와 프로폰티스로 병력을 보내
비잔티움 등 인근 도시를 함락하는 수순을 밟았으며
카리스를 자신들의 반란에 참여하도록 설득하였죠.
이러한 분위기는 인근에 있던 키프러스도
페르시아 통치에 반기를 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오니아를 중심으로 작은 도시들의 반란은
수년간 이어졌고,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죠.
반란이 일어난 6년째인 기원전 494년
페르시아 군대와 해군은 집결하여
다른 곳들은 무시하고
반란의 진원지라 할 수 있는 밀레토스 시를 향해 곧바로 진격하게 됩니다.
이때 페르시아의 총사령관은
메디아 출신의 ‘다티스’라는 장군으로 그리스 사정에 밝고
전투에 능한 장군으로 명성이 높은 장군이었죠.
이오니아는 다티스 장군이 데리고 오는 병력을 맞아
육지에서 싸우는 것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밀레투스 사람들에게는 성을 지키라고 하고
다른 운용 가능한 모든 배를 모아서
바다에서 적을 막을 준비를 하였죠.
이들은 밀레투스 해안에서 멀찍이 떨어진
라데섬에 집결하게 됩니다.
페르시아 함대는 이오니아와 연합군의 함대를 보고서
전쟁을 손쉽게는 이길 수 없을 거라 판단을 하는데요.
우선은 이오니아인들에게 지금이라도 항복을 한다면,
물리적으로는 더 이상의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고 회유를 합니다.
다시 말해, 항복을 한다면
자신들의 지배하에 놓여 다리우스 1세를 모시면 되고
만약 우리에게 덤빈다면 이오니아 시민들을 노예, 아이들은 거세,
딸들은 다른 곳에 팔아넘긴다고 하였죠.
페르시아의 회유는 되려 이오니아를 내부적으로 더욱 단합하게 했습니다.
이들은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에 대한 중요성을 부각하며 그리스군을 훈련시켰죠.
라데 해전의 전투 초기에는
페르시아의 협박 및 회유가 전혀 효과가 보이지 않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공격이 시작되자
그리스군은 끝도 없이 몰려들어오는
페르시아의 물량 공세를 도저히 막을 수가 없어 보였죠.
결국 이오니아 연합군은 단합력이 떨어지면서
각자 살 길을 모색하게 됩니다.
하나 둘 페르시아에 항복하며 이오니아 연합군 세력에서 이탈되었죠.
마침내, 페르시아와 이오니아 함대가 조우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주요 연합군 세력들은 이탈하였고
전투는 페르시아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을 맺게 됩니다.
라데 해전으로 인해 패전을 맞이한 이오니아는
이제는 더 이상은 덤빌 여력이 없었죠.
이오니아 반란은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 일어난
최초의 충돌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앞으로 일어날 페르시아 전쟁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었죠.
이 과정에서 다리우스 1세를 배신했던 아리스타고라스는
전쟁에서 사망했거나 혹은 도주를 했다는 등 몇몇 의견이 있으나
어쨌든 이 전쟁 이후로 아리스타고라스는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소아시아는 페르시아 영토가 되었고
다리우스 1세는 이오니아 주를 차지했지만
각 시의 대표를 숙청하지는 않았는데요.
되려, 여전히 이오니아 주의 자치를 허용하였고
대신 속주의 시민으로 페르시아 제국에 세금을 바치라고 합니다.
즉, 자치권은 인정해주되
영토 사용료를 내라는 이야기였죠.
이렇게 소아시아 정벌로 끝을 맺을 수도 있었지만
다리우스 1세는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했던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았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리스의 많은 도시 국가들을
이대로 두었다가는 자신의 통치에 위협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그리스 전체를 징벌하기로 마음먹게 되죠.
즉, 이오니아 반란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다리우스 1세는 이오니아 반란에 있어
아테네에게는 배반이라는 감정까지 갖고 있었는데요.
이 무렵의 아테네는 예전부터 정치 혼란과 함께
얼마 전까지 독재 형태인 참주정의 형태를 띄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참주를 끌어내리는 과정에서
그리스 지역의 최강인 스파르타와 마찰을 맺었는데
아테네 시민들은 이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죠.
아테네인들은 머나먼 오리엔트 지역의
페르시아가 세력이 강하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고 사절단을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사절단이 페르시아에 도착을 하니
다리우스 1세는 변방에 작은 존재들을 보며
“그대들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느냐?”라는 질문까지 할 정도로
아테네의 존재는 변변치 않았었죠.
아테네의 사절단은 페르시아와 우호 관계를 맺으려 했지만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작은 소국이 귀엽게 느껴져
페르시아 제국에게 복종을 하라고 합니다.
이에, 아테네 사절단은 제국의 힘 앞에 복종하기로 약조하죠.
하지만, 본국의 아테네 시민들은
이런 수모를 겪을 수 없다며
자기들끼리 외교 조약에 대해 없었던 일로 치부해버립니다.
이러한 이유로 아테네가 이오니아와 함께
페르시아를 공격할 때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고
다리우스 1세 입장에서는 자신을 공격했다는 것은
복종을 맹세한 것에 대한 배신이라고 느꼈던 것이죠.
다리우스 1세는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한 후
그 일대의 지배권을 안정화시켰고
자신의 사위 중 하나였던
마르도니오스에게 아테네를 진압하라고 명령합니다.
B.C 492년. 마르도니오스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배로 연결한 다리를 이용해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건너 마케도니아, 트라키아에 이르렀는데요.
하지만, 승전보를 기다리던 다리우스 1세는
신하로부터 페르시아군이 전멸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 이유는 페르시아군이 아테네에 도착하기도 전에
칼키디케 반도 앞에서 태풍을 만나 조난을 당했던 거죠.
평화로운 아테네로서는 페르시아군이 진군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은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뭐 아무튼 페르시아의 20만 대군이
전멸당했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이에, 다리우스 1세도 당황스러웠겠지만
어쨌든 자신들의 병력이 대단하다는걸 보여줬다고 생각했기에
그리스 쪽에다가 위협의 내용을 전달하는 사신을 보내는데요.
앞으로 페르시아에 복종을 한다는 상징적 의미로
그들의 땅에서 캐낸 흙과 물을 보내라고 요구합니다.
이러한 요구에 아테네는
사신들을 재판에 세워 사형을 집행하였고
스파르타에서는 즉시 우물에 빠뜨려 사신들의 목숨을 끊어버렸죠.
그리고 다리우스 1세에게
물을 가져가고 싶다면 직접 우물에 와서 가져가라고 전합니다.
이에 다리우스 1세는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오르게 되었죠.
이번 영상에서는 기원전 490년
본격적으로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하기 이전 상황인
이오니아 반란에 대해 다루어보았는데요.
페르시아 전쟁은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어떻게 정리할까 다른 영상을 제작할 때보다 좀 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다소, 부족한 영상이지만
내용을 최대한 쉽게 전달하려 했는데
잘 정리가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다음 세계사 영상에서는 그리스 본토로 향해
다리우스 1세의 야망이 뻗쳐가는 내용으로 전개될 것 같습니다.
그럼, 끝까지 시청해주셔셔 감사드리며
평안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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