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00년경 오리엔트 지방에서는
키루스 2세를 시작으로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가 세력을 뻗치며
다리우스 1세 시절, 지중해 동부에서
인더스 강에 이르는 대제국을 만들게 됩니다.
다리우스 1세는 이집트와 리디아 등의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하며
다음으로는 고대 그리스 지역까지 모조리 정복하고 싶어했죠.
고대 그리스 지방에서는 도시국가 폴리스들이 다수 존재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나 아테네라 하면 민주정치가 먼저 떠오를 수 있지만
기원전 800년 경부터 등장한 폴리스들이
처음 채택한 정치 방식은 귀족정이었는데요.
그러다, 식민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평민들의 권한이 확대되어갔고
폴리스의 정치도 점차 민주정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이 또한, 도시 국가들마다 정치 체제는 다른 방식을 채택했는데
유명한 예제로서 아테네는 민주정
스파르타는 귀족정이 강화된 편이었죠.
규모가 큰 폴리스인 아테네에서는
다른 여느 대도시처럼 빈부 격차나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활발한 식민활동과 상공업의 발달로 인해
점차 평민들의 목소리가 커지게 됩니다.
기원전 600년경, 아테네의 현자라 불리는 정치가 솔론은
그동안 귀족 위주로 펼쳐온 정치 활동에
일부 평민에게 재산의 정도에 따라 정치에 참가할 수 있도록
금권 정치를 펼치는데요.
하지만, 그의 방식은 귀족과 빈민층 모두에게 반발을 사게 됩니다.
그도 그럴듯이 솔론은 평소 가난한 자에게
사려 깊은 귀족이라는 평가를 받았기에
빈민층에서는 자신들의 뜻이 반영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금권정치로 인해 돈있는 자에게만 유리한 행보를 보였다고 생각했죠.
또한, 반대로 귀족들은
돈만 있으면 평민 따위가 귀족과 맞먹으려 하냐고 성화를 냈습니다.
결국, 불만이 많았던 빈농들의 지지를 받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정국을 뒤집으며 권력을 손에 넣었고
현대 시대의 독재 정치와 비슷한 참주를 맡게 되면서
참주정을 펼치게 되었죠.
그러다, 기원전 510년경 참주 정치는 무너지게 되었고
클레이스테네스는 더 이상의 참주의 출현을 막기 위해
도편 추방제와 시민이 선출한 500인 평의회를 만들면서 민주 정치의 기초를 닦게 됩니다.
또 다른 폴리스인 스파르타는
아테네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폴리스였는데요.
스파르타의 신분제도는
사회를 지배하는 시민, 농사를 짓는 노예, 상공업에 종사하는 반자유민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반자유민은 자유는 인정되었지만 시민권이 없었죠.
스파르타의 정치 구조는 두 왕가가 있어서
장로회의 도움으로 정치를 했으나
후에는 시민이 참가하는 민회가 5명의 감독관을 선택하며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스파르타에서는 수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지배하며 관리하기 위해서
시민들은 어렸을 때부터 스파르타 교육으로 훈련을 받고 군인이 되었죠.
스파르타 교육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재생목록 10분 세계사
‘고대그리스 역사: 스파르타 교육’ 편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고대 그리스라 하면
제우스와 헤라 등이 등장하는 그리스 신화와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의 철학자들이 떠오르기 마련인데요.
철학이 등장하기전 그리스에서도
세상의 질서를 설명하는 방법은 다른 문명들과 마찬가지로 신의 존재였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시작을 잠시만 살펴보자면
태초에 카오스가 있었고
카오스로부터 가이아가 태어났으며
그리고 카오스와 가이아 사이에서 우라노스가 태어나게 되죠.
그 우라노스는 다시 가이아와 부부가 되었으며
이 둘 사이의 사랑 행위가 끝나면 우라노스는 가이아에게 비를 내려주면서
비에 젖은 가이아는 생명을 잉태했다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의 신들은 그리스어로
‘보통 명사’인 경우가 많은데요.
다시 조금 전에 말한 내용을 명사로 해석하자면
태초에 혼돈이 있었고,
혼돈으로부터 대지 등이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혼돈은 대지인 가이아와 함께 하늘인 우라노스를 낳았죠.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그리스 신화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시작하여 헬레니즘 시대, 로마 제국 시대를 거치며
많은 이야기들이 더해지게 됩니다.
추후, 로마가 그리스도교화기 전까지는
그리스 신화는 종교의 일부였지만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국교 채택 과정에서
그리스 신화를 이교도로 축출하면서
종교의 성격은 소멸하고 문학적, 예술적 도구로 남게 되었죠.
그리스도교 이전에만 하더라도
오랫동안 종교의 성격을 갖고 있던 그리스 신화였지만
기원전 600년경에는 최초로 신을 배제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최초의 철학자라 불리는 탈레스로
측량, 계산 등의 실용적인 지식에서 원리와 법칙을 알아내고자 노력했죠.
탈레스는 자연현상을 신의 가르침이나
신의 뜻에 따른 현상이 아니라
합리적인 사고로 해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우주를 지배하는 가장 근원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밝히고자 했죠.
탈레스는 모든 것의 근원은 물이며
식물이나 동물 모두 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과학이 발달한 현대 사회 기준에서는 턱없이 부족한 관찰력이라 할 수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2500여년 전의 시대 기준에서는 혁신적인 생각이었죠.
세상 모든 이가 만물은 신에게서 창조되었다고 하는데
그와는 달리 탈레스는
인간이 관찰 가능하고 만질 수 있으며
느낄 수 있는 물이야말로 만물의 근원이라 했습니다.
즉, 신비롭거나 이해 불가능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사유에 의해 이해된다는 말이었죠.
이는 신화적 사유에서 논리적 사유로의 이동을 뜻했으며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 철학의 발명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탈레스는 소크라테스가 주로 활동하던 기원전 5세기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서 활동했는데요
그가 활동한 학파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출발인 밀레토스학파 였습니다.
소아시아 서쪽 해안 이오니아 지방의 남부
그리스 식민도시 밀레토스에서 발생한 자연철학 학파였죠.
밀레토스 학파의 대표 인물로는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가 있습니다.
세상의 만물은 물로 이루어졌다는 탈레스의 밀레토스 학파와는 달리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기원을 ‘불’로 생각했는데요.
그의 사상에 따르면 불은 변화하여 공기, 바람, 물, 흙, 영혼 등
여러 가지로 변화하게 됩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은 물질 이상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담고 있었는데요.
불은 만물의 근원이자 신적 요소 그리고 인간의 영혼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연 현상을 관찰하는
철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우주의 근원은 ‘수’라고 하는 철학자도 있었죠.
세상의 모든 출발은 수.
다시 말해 숫자라니.
누가 떠오르지 않는가요?
바로 우리 모두를 수학시간에 괴롭혀오신 분, 피타고라스였죠.
탈레스가 활동하던 이오니아와는 달리
피타고라스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하여 이탈리아 학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오니아 쪽에서는 하나의 근본 물질에서
우주론을 전개하는 자연학적 경향을 갖고 있다면
피타고라스학파는 진실에 있는 것은
‘수’라는 것이라 설명하며, 수학적 경향을 보였죠.
피타고라스는 모든 것의 근원은
숫자에 의한 비례와 수학적 관계에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만물은 모두 수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고
수의 성질을 연구하면 우주의 진리를 알 수 있다고 믿었죠.
물론, 수가 모든 것을 밝혀낼 수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수학의 발전으로 인해
사물의 규칙을 찾아낼 수 있는 점은 분명했죠.
즉, 수학법칙의 발전을 통해 현대 사회의 과학발전을 이룩하는데는
큰 역할을 했던 겁니다.
이렇게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오니아와 이탈리아 등
여러 곳에서 철학적 사유가 발전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러던 중 기원전 500년이 지나
아시아와 유럽 최초의 전쟁이라는 페르시아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페르시아 전쟁에 대해서는 추후 영상을 제작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에 나타나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흐름을 살펴볼까요?
앞서, 여러 철학자들의 학설들에서
만물의 원소는 물이다 혹은 불이다라는 주장이 있어왔습니다.
이때까지의 특징은 자연현상의 근본물질이 하나라고 주장한 일원론적 주장이었죠.
그러다, 기원전 470년경
그리스 시칠리아 섬에 있는 도시
아크라가스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엠페도클레스는
만물의 기원은 하나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앞서 있었던 여러 학설들 중에
물, 불, 공기, 흙이 여러 가지 비율로 섞이고 나눠지면서
다양한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라 했죠.
엠페도클레스는 이 네 가지 만물의 원소는
아무리 쪼개도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궁극적인 요소라고 주장합니다.
세상에 그 무엇도 새로 태어나거나 죽지도 않고
물과 불, 그리고 공기와 흙이 섞이고 나눠지면서 생성과 소멸이 이루어진다고 했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접근했던 것도 아닌 것이
엠페도클레스가 주장한 네 가지 원소가 변화하는
궁극적 힘에 있어서는 물리적인 접근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세상 힘의 원천은 사랑과 미움이라는 개념이었죠.
사랑의 기운이 강하면 축복의 형태가 되고
미움의 기운이 강하면 사라지고 퇴보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사랑과 미움으로 접근한 그의 사고방식은
과학적 사고와는 거리가 먼 듯 했으나
그는 2천년 뒤에나 세상에 등장하는 주장을 펼치는데요.
엠페도클레스는
이 세상은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다윈의 진화론 같은 사고방식의 시초라 할 수 있는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죠.
서로 떨어져 있는 원소들이
사랑의 힘으로 만나 우주의 별이 탄생하고
그러한 별들이 회전하면서 물이 생기는 등
아무튼 최초의 생물을 설명하는데 있어 신을 개입시키지 않았던 겁니다.
모든 물질은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변화한다는 주장을 했죠.
또 다른 다원론자를 살펴보자면
이오니아에서 세력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아낙사고라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많은 부유 집안 자제들처럼
정치가 꿈나무였지만
학문에 열중하다 여행길에 올랐죠.
아낙사고라스가 오랜 기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집이 폐허로 변했는데
어차피 그는 재산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고향을 떠나 아테네로 가서
자연철학 분야에서 활동한 철학자였죠.
아낙사고라스 역시 신에 대한 존재를 부정했으며
모든 사람들이 달빛을 보고 동경할 때도
달의 빛은 그저 태양빛의 반사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동시대 태양을 두고 아폴론 신 등으로
큰 의미를 부과했던 그리스 사회에서
그는 태양이란 단지 ‘불타는 돌덩이’라고 주장했는데요.
이는 현대 사회의 관점에서는
대단히 관찰력이 돋보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신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되었죠.
아테네에서 쫓겨난 아낙사고라스는
람프사코스로 망명하게 되었고
늙어 죽을 때는 주변인들이 그를 향해
외국에서 죽는 건 너무 슬프지 않냐고 물었을 때
어차피 저승에 도달하는 거리는 어디서나 똑같다는 대답을 했죠.
아낙사고라스가 말하는
모든 사물의 근본 원질은 종자라고 불렀습니다.
기존의 철학자들이 만물의 원소는
물이다 불이다 하는 특정한 원소를 말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만물의 원소에 크고 작다의 개념을 도입하게 되죠.
즉, 세상에 모든 사물은 각각의 씨앗으로부터 생겨나는데
개의 ‘씨앗’이라는 개념에서 강아지가 된다던가
사람의 종자에서 아기가 된다는 등의 개념입니다.
쉽게 말해 대문자 A의 근본은 소문자 a로
각각의 사물은 저마다 자신만의 종자가 있다는 얘기였죠.
그 외에도 아낙사고라스가 말한 누스 등의 정신적인 원리 등이 있지만
이 정도로 넘어가고
이제 마무리로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 중
가장 유명세가 높은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로 피날레를 장식하겠습니다.
데모크리토스는 기원전 460년경
그리스 북동부의 압데라에서 태어났는데
압데라는 이오니아 지방이 만들어온 철학의 영향과
근동의 사상이 모여든 곳이었죠.
데모크리토스의 아버지는 압데라의 재력가이자
지방에서 힘을 행사하는 권력가이기도 했습니다.
제2차 페르시아 전쟁 중에는
아테네를 제외한 대다수의 폴리스들이
페르시아에게 항복의 뜻을 내비쳤는데요.
데모크리토스의 아버지도 당시
페르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크세르크세스 왕 일행을 극진히 대접하기도 할 정도로
압데라의 권세가였습니다.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난 데모크리토스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으로 세상을 돌아다니며 스승을 찾아 나섰죠.
그는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으며 이집트, 페르시아 등 드넓은 곳을 여행하며
현자와 학자들을 만나 학문을 배웠습니다.
지식을 탐구하며 여행을 떠났던 그는
나이가 들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빈털터리가 되었는데요.
압데라에서는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자식은
고향에 묻을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결국 데모크리토스는 바다에 던져지는 것을 피하고자
‘자연에 관하여’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이 책을 읽은 시민들은
그의 방대한 지식에 감탄하여 장례비를 모으기도 했죠.
데모크리토스는 서양 철학사에서
유물론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유물론은 말 그대로
진실은 눈에 보이는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개념인데요.
신의 존재도 부정하며 동시에 영혼의 존재도 부정하는 주장으로
그는 모든 현상은 원자의 운동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데모크리토스는 철학 뿐 아니라
문학, 천문학, 수학, 의학 등등 다양한 분야에 공부를 좋아했기 때문에
박학자라 불리기도 했지만
원자론을 주장함으로써 무신론자로 사회에서 배척당하게 되었죠.
심지어, 중세시대까지 유럽에서 데모크리토스는 사탄으로 취급되어,
그의 이름조차 언급되는 것에 대해 불편해할 정도였습니다.
데모크리토스는 만물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었다고 가정했고 이 입자를 원자라 불렀죠.
데모크리토스가 주장한 원자는 이후 1천년 이상 잊혀진 이론이었으나
근대에 재조명을 받으며 18~19세기 사이
프랑스의 라부아지에나 영국의 돌턴에 의해 밝혀지게 됩니다.
물론, 데모크리토스가 생각해낸 원자는
현대 시대에서 말하는 원자와는 차이가 있는데요.
가령, 납이 나무보다 무거운 이유는
납에는 원자가 서로 붙어 있고
나무의 원자는 서로 듬성듬성 떨어져 있다는 식이었습니다.
이는 과학적인 실험의 토대를 거치지 않고
머릿속으로만 생각한 가설로서
현대의 화학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던 거죠.
하지만, 기원전 5세기에
만물이 더 이상 잘게 부술 수 없다는 알맹이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의 시도는
상당히 혁신적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동서양의 전쟁인 페르시아 전쟁 전후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에 대해 정리해보았는데요.
고대 그리스인들 중에서는 신화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연현상을 연구함으로써
인간의 시선중심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접근한 철학을 ‘자연 철학’이라 부르며
탈레스와 데모크리토스 등이 대표적인 자연 철학자라 할 수 있었죠.
소크라테스가 활동하기 이전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자연현상을 연구하는 자연 철학자가 있는가 하면
정치적인 활동으로 토론을 중시한 소피스트들도 있었습니다.
소피스트에 대해서는 언젠가 따로 영상 제작을 할 것 같네요.
오늘도 재밌게 시청해주셔셔 감사드리며
평안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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