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마귀의 힘으로 불이 켜진다고 생각했소이다”
- 유길준 / 개화사상가 (1856~1914)
1833년 신문물을 배우고자 비국에 파견된 보빙사의 일행이었던 유길준은 깜짝 놀랐습니다.
휘황찬란한 전깃불을 보고 감탄했던 그는 현지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조선에도 전기를 사용하고 싶다” 이렇게 말을 했지요.
“감히 사신으로서 명령을 받은 데다
유학하는 명예까지도 얻었으니...
나는 말과 행동을 스스로 삼갔고..“
-유길쥰 <서유견문>
청년 유길준은 조선 최초의 국비유학생이었습니다.
나랏돈으로 구경한 세상.
그는 ‘온 힘을 기울여’ 보고 들은 것을 전하고자 애썼고...
4년 뒤인 1887년의 3월 6일, 어스름한 경복궁 내 건청궁에서는 ‘와아’하는 함성과 함께 전깃불이 밝혀졌습니다.
“목침을 싸가지고 가던 국회의원이 폭탄으로 오인을 받아서 수색을 당했다.”
1974년 6월 29일 자, 중앙일보 기사 내용입니다.
해외여행 자체가 드물었던 시절이니까 의원들의 외유와 관련된 일화는 넘쳐났습니다.
외교행낭에 물개 가죽 넣어서 보낸 의원이 있는가 하면,
프랑스 시계탑에 낙서를 하거나
“대만에도 기생이 있느냐” 이렇게 물어서 망신을 샀던 일화도 있으니...
의원외유를 규제해야 한다는 의견은 당시에도 수차례 반복됐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70년대의 물개 가죽과 목침은 그저 해외여행이 활성화되지 못하던 시절에 벌어진 해프닝 정도라고 해야 할까..
지난 며칠 동안 뉴스룸이 전해드린 일부 지방의회 의원들의 행태들은 해프닝이라고 하기에는 사실 너무 멀리 나갔지요.
“누가 경찰 좀 불러주세요.”
“가이드를 때려 눈 사이가 찢어졌습니다.”
“한국 사람들 미쳤어요”
“아래 속옷을 벗었어요.”
“여자랑 나가고 싶은데 안 나가니까 물을 붓고”
“집기를 부수고 일행을 폭행한 일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거죠.”
나랏돈을 뿌려가며 그들이 해외에서 배워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1833년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조선의 보빙사절단.
그 신기한 옷차림의 이방인을 보기 위해서 구경꾼은 모여들었습니다.
“노기 어린 얼굴로 군중을 노려보았다...
구경꾼들이 위세에 눌려 조용해졌다.”
-홍사중 <상투 틀고 미국에 가다>
누군가 조선의 갓을 가리키며 비웃자 일행 중 한 사람은 노기 어린 얼굴로 몸을 곧추세우고 주위는 이내 조용해졌다 합니다.
나라를 대신해 파견된 사절이었기에 잃지 않으려 했던 자존감이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신기한 차림을 한 동양의 야만국’도 아니요,
온 세상의 사람들이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K-pop 하나에도 열광하는 나라가 됐는데
100여 년 전 몸을 곧추세우며 보여줬던 세계 최고의 자존심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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