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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비타민C] 가톨릭 성지순례 -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 행복한 아침 되세요!

Buddhastudy 2025. 4. 21. 19:24

 

 

 

김대건 신부를 양성한 파리외방전교회

 

조선 후기

심해진 천주교 박해

 

박해의 고난 속에서도

파리외방전교회는 헌신적인 사랑과 희생으로

한국 천주교의 기반을 다졌다.

 

조선사목

제가 하겠습니다!”

(조선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프랑스, 파리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입구

기적의 메달 성당근처, 파리 7지구에 위치

 

선교사 파견 미사를 드리던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성당

 

선교사들이 선교지 떠나기 전 가족들과의

석별의 정을 나누는 파견 장면

(쿠베르탱 작품)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지하 경당

-아시아지역에서 선교하다 순교한 성인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박물관 입구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한국에서 사목하다 목숨을 잃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조선 박해시대 12, 6.25 한국전쟁 12

 

-조선에서 사목하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서신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뒤뜰 정원

-한국 순교성인 현양비

선교사들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2003년 명동대성당 신자들이 세움

-순교자들의 모후 경당

당시 선교지로 떠나면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곳에서 기도를 받치고 선교지로 떠났다.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앵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 , 뵈르뇌 주교,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브르트니에르 신부,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조선에서 순교하여

1984년 한국에서 시성식을 통하여 성인품에 오른 선교사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순교하고 헌신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기억합니다.

 

 

 

--

1825, 사제 파견을 요청하는 한국인 교우들의 편지를 접하게 된 교황 레오 12세는

182791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서는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였고,

파리외방전교회 역시 프랑스 혁명 때문에 회원이 10여 명밖에 없었고

돈도 없었기 때문에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하지만 방콕의 보좌주교이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였습니다.

18319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대목구가 설정되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조선대목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즉시 입국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 3년이 지난 뒤

만주에 도착하였지만, 한국 입국의 많은 어려움 때문에

183510월 한국을 바라보면서 만주의 교우촌 마가자에서 병으로 선종하였습니다.

 

그러나 1836년 모방 신부

1837년에 2대 조선 대목인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가 입국하였습니다.

그들은 곧 파리외방전교회의 본래 목적에 따라

3명의 소년을 선발하여 마카오에 보내 교육을 받고 사제서품을 받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845년엔 최초의 한국인 사제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1849년에는 2번째 한국인 사제로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배출했습니다.

 

이에 앞서 18391월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시작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18399월에는 마침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3명도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 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 사제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한국의 입국을 시도하여

1845103대 조선대목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충청도 강경(江景)에 도착하였습니다.

 

1846년 병오(丙午)박해를 치른 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베르뇌 주교를 비롯하여 메스트르, 프티니콜라, 푸르티에, 페롱,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위앵 신부 등이 계속 입국하였습니다.

하지만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모두 순교하고

살아남은 3명 선교사 리델, 페롱, 칼레 신부도 중국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고

10년이 지난 1877년이 되어서야 다시 한국에 입국할 수가 있었습니다.

신부들이 순교할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관례에 따라

'원한다면 고국으로 돌려보내겠다'라고 권고했으나

신부들은 귀국을 거부하고 순교를 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