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본문 한글 보시면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들은 여래가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중생을 제도한다고 말하지 말라.
수보리야 이런 생각은 하지 말지니
왜냐하면 실로는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없는 까닭이니라.
만약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있다 하면
여래는 곧 아와 인과 중생과 수자가 있음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설하되 곧 아가 있다는 것은
곧 아가 있음이 아니거늘/
부처님은 “내가 설했다. 내가 설했다.” ‘나’라는 표현은 하지만, 부처님은 상을 가지고 ‘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범부들이 이를 아가 있다고 여기느라. 범부들은 자꾸 나를 내세웁니다.
이런 얘기가 있어요. 아주 상이 높은 사람인데, 불교를 믿었던 모양입니다. 조주스님이라고 하는 아주 큰스님한테 가서 당돌하게 물었습니다. “대선지식도 지옥에 갑니까?” 그랬어요. 요즘 말로 하면 “큰 스님도 지옥 갑니다.” 큰 스님 앞에 앉아서 그런 얘기를 해요. 그러니까 조주스님이 “암, 가고말고. 내가 제일 먼저가지.”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이 관리가 하는 말이 “큰스님, 도인이 어째서 지옥을 갑니까?” 이렇게 또 다시 물었어요. 그때 조주스님은 “내가 지옥가지 아니하면 자네를 어디서 볼 것인가?” 이랬어요. 상을 그토록 많이 내면 너는 지옥 간다. 그 말입니다. 아무 때나 아무 얘기나 하지마라 이 말이죠. 또 거기 봐봐요.
수보리야 범부라는 것도 여래가 설하되
곧 범부가 아니고 그 이름이 범부니라.
예, 범부나 부처님이나 바탕은 하나입니다. 바탕은 하나요. 잠시 어두워서 좀 깜깜하니까 그냥 법부 노릇을 하는 것이고 환희 밝아져버리면 그 자리는 바로 밝음의 자리, 부처님의 자리가 되는 것이니, 너무 네가 “범부다 범부다 범부다” 자꾸 자학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으흠. “아 네까짓 게 뭐 포교해.” 이런 말도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우리는 너무나 당당한 불자라 이겁니다.
또 이런 얘기가 있어요. 어떤 초심자가 조주스님한테 와서 얘기를 했어요. “스님, 오늘 제가 빈손으로 왔습니다.” 급하게 오다보면 스님께 드릴 선물을 못가지고 올 때도 있겠죠. 그래서 스님이 “그래, 그러면 내려놓게” 그랬어요. “빈손으로 왔습니다.” 하니까 “그러면 내려놓게.” 그래요. “스님, 아무것도 안 가져 왔다는데 또 무엇을 내려놓습니까?” 또 이렇게 물었더니 “그래 그럼 계속 들고 있어라.” 그랬어요. 생각을 계속 들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내려놓을 때 내려 놔야 되요.
그래서 /범부라는 것도 여래가 설하되
곧 범부가 아니고 그 이름이 범부니라./
이랬어요. 마음을 완전히 딱 비우고 나면 텅 빈 충만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오히려 꽉 차는 그 무엇이 생깁니다. 그 아래 각론을 보시면
진여법계 안에서는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을 수 없다.
평등한 성품 가운데는 자타가 없다.
중생은 본래 부처이므로
부처가 중생을 제도하는 일은 없다.
만일 중생을 가히 제도할 것이 있다고 보면
그는 이미 여래가 아니다.
상을 취하는 허물에 빠지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온 우주 자체를 하나로 보아야 한다.
하나로 본다는 의식마저 사라져야 그는 대우주인이 되는 것이다.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세상을 살아야 한다.
내가 그들의 몸이 되고, 그들의 고민이 되고
그들의 생각이 되어야 한다.
불교의 중요 기능은
첫째가 교육의 역할을 하는 것이요
둘째는 봉사(보살)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밑줄 치시고 불교가 해야 하는 역할이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교육의 역할과 하나는 봉사의 역할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상구보리 하화중생 하는 것입니다.
교육을 통해서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고
봉사를 통해서 대아적 삶을 펼쳐가야 한다.
큰 자기적 삶을 살아야 된다. 이 말이죠.
부처님은 바로 대교육자이시오, 대봉사자이셨다.
현재 우리 불교가 이 중요한 사실을 망각한 채
원시종교의 형태를 스스로 고집하고 있다.
예, 거기도 밑줄 치시고 ‘원시종교의 형태’ 현재 대부분의 우리 불자들은 그냥 어디 높은데, 또는 아주 깊은데 들어가서 소원 비는 것, 그 굉장히 중요하기는 해요. 살아가면서
청하고 소원 비는 것,
그것을 불교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한 불교 종교형태를 /청원태/라고 말해요. 청원태.
아주 원시종교의 형태입니다.
답답하면 가서 부처님 전에 가서 빌어요. 청원태입니다.
어떤 사람은 또 부처님한테 가서 협박도 해요. “부처님, 올해 우리 아들이 이번에 대학을 가야 하는데, 만약에 대학을 못가면 나 이제 불교 안 믿습니다. 부처님, 우리 아들이 대학 안가면 내가 가만 안 놔둘 겁니다.” 자기가 어떻게 하 건데요.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내가 들어봤어요. 아주 나쁜 사람이오. 그러한 종교형태를 청원태라. 이렇게 말합니다. 조건 걸고, 청하고 빌고 그게 청원태요. 그게. 그런 묘사가 필요치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100프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희구태/라. 희구태. 희구태의 종교형태는 주로 천국을 얘기하는 사람한테 나타나는 종교현태입니다. “이세상은 어렵더라도 나중에 나는 천국 가. 나중에 나는 극락 간다.” 이렇게 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열심히 잘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일은 그렇게 신경 많이 안 씁니다. 청원태 보다는 수준이 높아. 그러한 종교현태를 (바랄 희, 구할 구) 희구태의 종교형태다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이 종교형태도 필요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더 수승하고 더 훌륭한 종교 형태는 /체주태/의 종교형태라 그렇게 말합니다. (진리 체, 머무를 주) 즉, 진리적 삶을 이 현실세계에 구현하고자 하는 종교형태입니다. 현실 속에서 진리적 세계를 구현하자. 이 말입니다. 그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법당, 내가 살고 있는 가정,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이것이 따뜻하고 평화로워졌을 때 종교의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지 그보다 더 좋은 게 뭐 있습니까?
현실을 떠난 그런 극락, 그런 유토피아는 그것은 좀 과한 얘기입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행복해야 되고, 여기 오니까 법당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고, 자유롭게, 마음도 자유롭습니까? 여기가 바로 극락이고 여기가 바로 평화의 세상이죠. 가정에 갔을 때도, 요 마음을 잘 가지고 가서 그 가정이 행복하고 평화로우면 거기가 극락이죠. 그러한 종교형태, 아주 고급적 종교형태를 체주태라고 하는데 불교가 근원적으로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종교형태는 바로 체주태의 종교형태입니다.
또 읽어보겠습니다.
깨어있는 의식으로 대보살도의 삶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불자의 가치가 없다.
아의 성품이 본래 공하므로 ‘아’가 있다고 볼 수 없다.
범부의 성품도 본래 공하므로 ‘범부’가 있다고 볼 수 없다.
‘아’다 ‘범부’다 하는 의식을 놓아버리면
자성이 청정한 상락아정의 아가 나타난다.
이는 앞생각의 실답지 못한 아와 같지 않다
마음에 능소가 없어야지 참 보살이면 바른 불자이다.
이 능소라는 말은 주관 객관을 말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쓸 때는 ‘나’라고 하는 주관을 너무 내세워서도 안 되고, 또 상대가 ‘베풀어짐을 당한다.’라고 하는 객을 너무 의식하면 안 됩니다. 그냥 순수하게 말해야 되는 거죠. 마음의 능소가 없어야지 참 보살이며 바른 불자이다. 그 게송을 밑에 한번 읽어보시면
중생이 인과를 닦음이여
그 결과가 익어지면 자연히 원만함이라.
법배로써 자연히 건너가게 되니
하필이면 남이 이끌어 주기를 바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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